디미트리오스의 관 동서 미스터리 북스 76
에릭 앰블러 지음, 임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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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추리 소설 가운데 가장 기피하는 장르를 고르라면 스파이 소설을 주저없이 꼽는 편이다. 스파이 소설은 대부분 내가 선호하는 엔딩인 해피엔딩이 아닌 배드엔딩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는 스파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감동적으로 읽었던 작품도 있었다.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하지만 이 작품도 예외없이 배드엔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읽게 된 것은 에릭 앰블러라는 거장의 작품 한권쯤은 읽을 필요가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추리 소설가 라티머가 이스탐블 여행 중 우연히 보게 된 디미트리오스라는 한 구의 시체... 디미트리오스는 살인자, 스파이, 마약밀매자였던 악당이었는데 라티머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한번쯤 탐정의 기분을 느끼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하지만 도중 방해꾼이 나타나고 디미트리오스의 현재에 접근하게 될 즈음 뜻밖의 사건에 말려든다. 이 작품은 스파이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어패가 있다. 디미트리오스의 삶을 통해 역자도 말했다시피 그 시대의 국가간의 관계, 유럽의 역사, 등장한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 백인 노예 매매에 마약 밀매. 역사에서 사회상까지 보여주면서 마지막 라티머는 다음 작품 구상을 아가사 크리스티적 내용으로 끝맺는다.  

살인자이며 스파이, 노예 매매업자, 마약밀매업자였던 디미트리오스의 죽음을 거슬러 올라가는 한 추리 소설가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스파이 소설이 아니다. 에릭 앰블러의 이름만으로 스파이 소설을 연상하고 읽는다면 조금 실망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보다 주인공 라티머가 파헤치는 디미트리오스의 행적을 통해 그 시대 유럽이 처한 현실을 알려주는 역사 탐험기 같은 작품이다. 터키와 그리스의 전쟁, 발칸 반도의 공산화, 각 나라 간의 치열한 스파이 싸움. 얄밉게도 그 사이에서 영국만 쏙 빼놓은 점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거야 작가 마음이니까. 마지막 라티머의 다음 추리 소설 구상이 마치 뒤렌마트의 추리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어 도리어 기뻤다. 허구 속에서도 여전히 허구에 만족하려 하는 현실의 반영이 씁쓸함을 느끼게 하는 디미트리오스의 행위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외의 것들이 더욱 마음에 든 작품이었다.  

전형적인 스파이 물이라고 보기에는 박진감이 없지만 역사적인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좋은 작품으로 여겨질 만 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보다 에릭 앰블러의 다른 작품인 <어느 스파이의 묘비명>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지만 개인 차가 있는 거니까 두 작품을 비교해서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이 작품이 뛰어난 점은 그 시대의 아픔을 담담하게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편에 치우침 없이 -물론 역사학자가 보면 달리 생각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 잘 표현하고 있다. 그 시대, 디미트리오스가 살았던 시대에서 재편성되는 유럽 각국의, 그리고 그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 전쟁 속에서도 인간의 사랑은 피어나고 더 악은 기승을 부리며 사람들은 그래도 살아가는 법이라고 했던가. 누군가 나치 시대에 독일에서 어떻게 살았냐고 물었더니 그 시대를 산 독일 사람들은 그저 평범하게 살았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생각하면 끔찍했을 일제 시대에도 우리의 선조들은, 지금도 살아 계신 분들은 사셨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라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관점에서 이 작품을 본다면 더 재미있게, 진지하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관객은 잔인한 현실을 마주하기보다 허구적 재미로 현실에서 등을 돌리고 싶어하는 법이라는 듯이. 마지막 결말이 조금 엉성한 감을 주지만 디미트리오스를 찾는 과정에서 엿볼 수 있는 유럽에서 그 당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묘사는 좋았다. 그리고 배드엔딩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고 이런 결말을 원한 건 아니다. 디미트리오스보다 어쩌면 그 라티머의 생각이 더 잔인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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