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의 4증인 -상
이언 피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1998년 11월
평점 :
절판


베이컨의 우상론은 처음 배울 때도 어려웠고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편견을 만사에 투사하여 생각하는데서 생기는 인류 공통의 ‘종족의 우상’, 개개인의 독특한 편견이나 선입관 등으로 인해 생기는 ‘동굴의 우상’, 인간의 공동 생활에서 특히 언어의 그릇된 사용으로 인해 생기는 ‘시장의 우상’, 전통적인 권위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데서 생기는 ‘극장의 우상’...이라는 4가지 우상을 4명의 증언과 회상에 대비시키고 이해하는 것은 단편의 지식을 암기하는 것보다는 수월할지 몰라도 여전히 난해하기만 하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지극히 간단하다. 이탈리아 신사가 옥스퍼드에 도착하면서 사라 블런디라는 처녀가 대학의 교수이며 자신이 하녀로 일한 성직자 그로브 박사 살인죄로 교수형 당하기까지를 4명의 목격자가 자신의 이야기와 더불어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뒤 회고하고 있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하는 마르코 다 콜라의 이야기는 소제목이 시장의 우상이다. 그의 말을 시장의 우상을 유념하며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사라가 범인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보고 느낀 점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두 번째 증인은 잭 프레스콧이라는 반역자의 아들이다. 그의 증언은 소제목이 동굴의 우상이고 가장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기도 했다. 그는 범인으로 자신의 친구이며 그로브의 죽음으로 이득을 얻는 유일한 사람인 토머스 켄을 지목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목적 때문에 사라를 모함하고 거짓 증거로 그를 교수형 당하게 만든 인물이다. 그의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역사적 수수께끼가 등장한다. 그것은 잭의 아버지가 유죄인가 무죄인가 하는 점이다. 그는 아버지의 무죄를 입증하려 애쓴다.

세 번째 증인은 암호 분석가인 월리스 박사다. 소제목은 극장의 우상이다. 그도 사라 블런디가 무죄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라의 무죄를 밝히지 않는다. 그는 범인으로 마르코 다 콜라를 지목한다. 그의 이야기에서 문제는 이제 단순히 한 개인의 생사가 아닌 영국이라는 나라의 존망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증인인 사학자 우드에 이르러 길 안내 표시라는 소제목처럼 모든 이야기의 진실과 거짓, 그리고 완전한 해답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 내용은 종족의 우상과도 매치된다.

이 이야기는 역자 후기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한 개인의 죽음과 단순한 살인자 찾기 게임이 아니다. 개인과 국가, 인간의 존재와 역사의 존재, 또 그것을 초월하는 인간과 신의 관계와 기독교적 관점에까지 폭 넓은 성찰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7세기에 한 개인의 삶은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했다. 개인은 나와 상관없는 타인이라면 관심을 가질 가치가 없는 존재고, 내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고,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을 위한 방패이고, 내게 의미가 있을 때만이 존재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 사라 블런디의 상황이 그걸 말해 주고 있다. 그 밖에 역사 속에 살다 죽은 많은 인물들이 모두 그런 존재였을 뿐이다. 정의나 진실이라는 관점이 사실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그리고 보여지는 것은 사실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고 속임수가 너무 교묘해 알 수 없어 역사는 무지를 가르친다는 생각만 들게 한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비교되는 많은 역사 추리 소설들이 있지만 내가 읽어본 작품 중에 이 작품이 가장 비교할 가치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베이컨의 우상론을 배우는 학생들이 읽으면 우상론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고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작품 구성도 독특하고 특히 작품 속의 역사적 등장 인물들을 만나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보일이라든가, 로크같은 인물들이 조연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적극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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