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라인
앤드류 클레이번 지음, 정명진 옮김 / 책세상 / 1997년 8월
평점 :
품절


상사의 부인과 바람을 피다 들킨 신문기자가 한 사형수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18시간 동분서주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이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군상들이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형수에게 회개하고 외치며 거들먹거리는 목사, 이슈를 위해 죄 없는 사람을 잡은 검사, 그저 누가 죽든 상관하지 않고 무사히 일이 진행되기만을 바라는 교도 소장, 쫓겨나지 않기 위해 특종을 노리는 신문기자... 그들의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에서 인간적 비애를 느끼게 된다. 

인생이란 밝음은 공허하고 어둠은 깊은 그런 것이다.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불행한 사람들은 결코 그 불행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세상 어느 한 귀퉁이에서 누군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다 해도 그것은 인생의 불행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살인자다. 우리 나라에는 사형 제도가 있어 범죄자가 죽임을 당한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세금을 내고 그 세금으로 검사와 판사가 공공연한 살인을 저지른다. 세상에는 범죄자가 너무 많다. 때론 그들을 제거해야 선량한 시민들이 보다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99명의 범죄자를 잡아 없애고 그들이 죽일지도 모를 시민의 생명을 구한다고 해도 단 1명의 죄 없는 사람이 인간이 저지르는 실수로 인해 무고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형 제도는 폐지되어야만 한다.  


이 작품은 사형 제도의 불합리함을 고발하는 작품은 아니다. 주인공이 근사한 것도 아니고 대단한 내용을 담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충분히 생각할 여지를 준다. 단 18시간 동안 생사가 바뀌는 이야기지만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더 끔찍한 일은 이런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신이 잠깐 편의점에 들른다. 무언가를 사서 나온다. 바로 그 직후 편의점의 직원이 살해당한다. 주변의 목격자는 때마침 그곳에 들른 당신을 용의자로 지목한다. 정치가가 당신을 희생양으로 이용할 생각을 한다. 대중이 당신을 목매달기를 원한다. 당신의 결백을 누구도 믿지 않는다. 더구나 당신에게는 과거가 있고 든든한 연줄이 없다. 그것으로 끝이다. 당신은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그뿐이다.  

자연 발화에 대해 생각다. 자연이 자연적으로 숲을 태울 때가 있다. 나무가 타 죽고 미처 피하지 못한 동물들도 죽고 많은 것들이 재가 되고 나면 오히려 숲은 더 울창해진다. 이런 자연 발화를 생각할 때면 정치, 희생양, 대중 심리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처음 이 작품을 읽을 때 어떻게 신문 기자가 금방 찾아내는 증인의 모순을 놓칠 수가 있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의도적인 정치 게임이었다. 

세상에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꼭 정의로운 방법에 의해 구현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선한 사람이 꼭 선한 행동만 하는 것은 아니고 악한 사람이 반드시 악한 행동만 일삼는 것은 아니듯이 진실은 정의를 통해 밝혀지지 않고 사사로운 목적에 의해 드러나기도 하고 진실을 은폐한 이들을 반드시 나쁜 사람이라고 칭할 수 없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실일 거라고 믿는 역사라는 것조차도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된 허구일진대 한 개인의 진실이 중요하게 다뤄질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 작품의 요점은 이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우리도 모르는 거짓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신문 기자는 또 다른 신문 기자가 주인공인 시리즈 <플레치>의 플레치와 너무도 닮은 인물이다. 그들은 모두 지극히 개인적인 인간들이고 스스로 정의나 진실을 입에 담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사실이 궁금할 뿐이고 그것을 기사로 써서 만족을 얻고 싶을 뿐이다. 그것은 그들의 성격상의 끈질긴 단면의 표출일 뿐이고 그것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만이 그들의 최우선 목적이다. 이제 우리는 정의라는 허구적 낱말에 연연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 아마 동화에서 빠져 나왔을 때의 허전함이 이런 느낌일 것이다. 자궁에서 벗어난 아기가 우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슬프다.  

 

그래서 나는 인생은 단지 슬픔의 연속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행이라고 하지 않던가. 인간은 태고의 원시 상태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절대 진화하지 않는다. 단지 껍데기만 바뀔 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잔인한 의식을 원하고 희생양을 원한다. 그들의 피를 손에 묻히고 환호하며 미친 듯이 춤을 추는 자들, 그들이 인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