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열린책들 세계문학 216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오마르의 말에 따르면, 체스 두는 자 역시 깊은 밤과 하얀 낮으로 만들어진 체스판의 포로신은 체스 두는 자를 움직이고, 체스 두는 자는 말을 움직인다. 누구인가? 먼지와 시간, 그리고 잠과 죽음으로 씨실과 날실을 짜기 시작한 신 뒤의 신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말이다.   

미술품 복원전문가 훌리아는 플랑드르 시절 거장 반 호이스의 작품 <체스 게임>을 복원하는 일을 경매 회사에서 의뢰받는다. 그 작품을 복원하던 중 그림 밑에 숨겨진 수수께끼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흥미를 느낀다. 후원자이자 가장 믿는 골동품상 세사르에게 도움을 구하고 그는 무명의 체스 선수 무뇨스에게 그림 속 체스 게임의 풀이를 부탁한다. 하지만 누군가 훌리아와 세사르를 방해하려 하고 급기야 연쇄살인이 시작된다. 도대체 그림의 내막은 무엇이고 누가 그들을 살해하려 하는 것일까? 결국 그림마저 도난당하게 되며 의문은 더욱 증폭되고 훌리아는 죽음 직전까지 가게 된다. 

한 15세기 화가가 그림 안에 숨긴 <QUIS NECAVIT EQUITEM>, <누가 기사를 죽였는가?>라는 말로 인해 사건은 일어난다. 그림은 15세기의 작은 공국의 대공과 그의 친구이자 신하인 기사가 체스를 두고 옆에서 대공의 아내가 책을 읽은 그림이다. 기사는 역사적으로 누군가에게 암살 당했고 그림을 그린 화가는 기사의 죽음에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가장 처음 등장하는 기사는 그림 속의 기사다. 두 번째 기사는 체스판에서 죽은 백기사를 어떤 흑 말이 잡았는가 하는 체스 게임의 문제가 제시되고 이것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두 번의 살인 사건의 열쇠가 된다.  

15세기 역사의 미스터리와 그후 500년이 지난 지금 한 플랑드르 화가의 작품을 복원하던 도중 발견된 미스터리, 그리고 현실적인 살인이 어우러진 걸작이다. 서양의 작품에는 체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자주 등장한다. 가장 유명한 작품이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또 추리 소설에도 체스가 등장한다. 그런 경우 체스는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가 된다. 이 작품에서처럼.  

거장의 그림 안에 숨겨진 <누가 기사를 죽였나?>하는 문장은 <체스 게임>이라는 그림 안의 기사의 역사적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체스의 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작품을 에코의 작품에 비교해서 대단히 수사학적 난해함으로 나를 괴롭힐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작품은 에코의 작품보다 깊이는 덜한 반면 재미와 대중성은 더 있는 것 같다. 모든 추리 소설이 그렇듯이 누가 범인인가는 중요하다. 그리고 범인이 쉽게 나타나면 재미가 덜해진다. 하지만 이 작품은 많은 암시로 뻔하게 범인이 드러남에도 오히려 재미가 더해지는 매력이 있다. 그것은 중세 역사와 체스 게임과 현실의 모습이 잘 조화롭게 어우러진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한편의 잘 짜여진 체스 게임을 책으로 읽는 느낌을 주는 아주 독특한 작품이다. 그 안에 양념으로 중세의 시대상과 그림을 언급하긴 했지만 이 작품의 주요 관점은 체스다. 체스에 사건의 단서가 있고 체스를 통해 추리와 사건의 해결이 이루어진다. 항상 영어권 작가의 추리 소설이 아닌 다른 나라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은 대단한 기쁨이다. 스페인 작가의 작품은 처음 읽는다. 스페인이 예술, 특히 피카소의 나라라서 그런지 그림과 골동품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작위적이지 않게 느껴지고 그 나라의 독특한 문화와 유럽의 정서가 나타나 영어권 작품과는 다른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한다.  

서양 사람들이 왜 체스에 열광하는 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작품 속 주인공들의 말처럼 게임은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도피처다. 왕으로 대변되는 권위에 대항하거나 말을 잡으면서 상상적인 살인도 할 수 있는 대리 만족을 준다. 말 하나 하나에도 의미가 있고 철학적으로, 수사학적으로, 정신분석학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추리 소설이 아니더라도 15세기 역사와 그림, 그리고 체스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한 작품이다. 살인하는 인간을 살인하도록 조정하고 그를 벌하지 않는 신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 신 뒤의 신은 누구일까. 이런 의문을 품으면서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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