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 미스테리콜렉션 15
레이몬드 챈들러 지음 / 모음사 / 1990년 6월
평점 :
품절


드디어 필립 마로우라는 인간적인 진가가 나타나는 작품이다. 내가 필립 마로우를 좋아하게 된 작품이다. 계기는 그가 탐정이면서도 벗어버리지 못한 기사의 갑옷을 벗고 인간적인 감성을 물씬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954년에 쓰여진 것이다. 그러니 배경도 그때쯤일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술에 취한 가난뱅이가 길에 쓰러져 있다고 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세상이다. 양심은 뒤돌아보게는 하지만 손을 내밀게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험한 꼴을 당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 마로우는 손을 내밀었고 그래서 험한 꼴을 당한다. 하지만 그는 한 사나이에 대한 추억이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추억이 그 사람의 누명을 벗기도록 부추긴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협박하는 상황에서도.   

술집 앞에서 우연히 만나 돌봐 준 테리 레녹스에게 호감을 가진 필립 마로우는 그와 가끔 만나 김릿을 마시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테리 레녹스는 자신의 부유한 아내를 무참히 살해하고 도망을 가서 자살을 한다. 그리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마로우에게 사건에 참견하지 말라고 협박을 한다. 필립 마로우는 베스트셀러 작가를 찾는 일을 맡는데 그도 자살을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와 테리의 아내는 부정한 사이였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테리와 작가의 아내와의 관계다.

마지막까지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걸작이다. <안녕, 내 사랑>보다 더 멋있어진 나이가 들어 비로소 멋있어진 필립 마로우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변함없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자신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그러면서 그런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아마도 마로우는 천성이 그런 모양이다. 누군가는 그러게 술주정뱅이는 도와주는 게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삭막한 도시에 이런 필립 마로우 같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과연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는 비록 쓰러진 술주정뱅이를 스쳐 지나가는 겁쟁이지만 누군가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보살펴 주기를 바란다. 어쩌면 그 술주정뱅이가 내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인간은 세월을 따라 변한다. 누구나 조금씩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해 간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자기만의 생활 신조랄까, 철학이랄까, 인생관을 가지고 변함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이 작품의 필립 마로우처럼 말이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마로우 시리즈 중 가장 마지막에 나온 작품라서 그런지 작가가 가장 공을 들인 느낌이 드는 더 치밀하고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15년이 흘렀는데도 필립 마로우는 변함없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60여 년이 지났는데도 모든 탐정의 멘토가 되어버린 필립 마로우. 하드보일드 작품의 탐정 중에 가장 빛나는 탐정이 필립 마로우다.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어 기쁘다. 

마지막 반전이 멋있는 작품이다. 필립 마로우에게 진짜 테리 레녹스같은 친구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도시에 사는 모두가 가끔 만나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술 한잔 마음 편히 마실 수 있는 그런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모르는 타인이라도 말이다. 도시의 쓸쓸함, 인생의 덧없음이 가득한 진짜 멋진 작품이었다. 하드보일드의 참 맛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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