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하는 사람 집행하는 사람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아래아 / 1999년 7월
평점 :
절판


형사가 살해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베를락 반장은 병 때문에 사건을 찬즈 형사에게 맡긴다. 찬즈는 죽은 형사가 가스트만의 파티에 참석하고 오는 길에 살해된 것임을 알아낸다. 살해 방법도 나름대로 추측한다. 베를락 반장은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지만 증거가 없기 때문에 알려 줄 수 없다고 한다. 가스트만은 현직 의원이고 전직 대령이며 그의 변호사인 사람을 보내 자신을 조사하지 말도록 압력을 넣는다. 그는 거물이었다. 하지만 찬즈는 그를 계속 주시하고 결국 그를 정당방위로 살해한다.

이 작품의 제목에서 말하는 재판하는 사람은 베를락이다. 집행하는 사람은 찬즈다. 그리고 재판 당하는 사람은 가스트만이다. 그 구도는 베를락과 가스트만의 젊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허름한 술집에서 토론하던 그들은 완전 범죄에 대해 내기를 한다. 그 후 가스트만은 많은 범죄를 베를락 앞에서 저지르지만 입증되지 못해 번번이 빠져나간다. 베를락은 이제 1년밖에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자신이 죽기 전에 가스트만을 재판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살해된 형사는 가스트만이 죽인 게 아니라고 베를락은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그를 죽였을까. 

 스위스가 낳은 거장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작품 <재판하는 사람 집행하는 사람>은 간결한 문체와 단순한 구도를 가지고 놀랄 만큼 많은 문제를 제시하는 추리 소설이다. 이 작품을 단순히 추리 소설로 단정하는 것은 뭐하지만 사건을 통해 인간을 생각하게 하는 것, 그의 작품 전체에 흐르는 악의 응징은 엘러리 퀸의 <악의 기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세상에는 늘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중간적이다. 때에 따라 선할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선함을 가장하고 악함을 행하는 사람을 필사적으로 잡으려는 형사와 그 형사에게 잡히지 않고 악을 실행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결코 뻔뻔한 악을 잡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하는 식으로 악에는 악으로 맞선다. 그리고 악은 종말을 맞이한다.  

그리 긴 작품이 아니면서 이 작품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흔히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한다. 그것은 소시민에게 법은 너무 멀리 있다는 것을 뜻한다. 법을 행사할 수 있고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권력자가 주먹도 함께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생각만 해도 아찔한 결과를 예고한다. 흔히 사이비를 조심하라고 한다. 그것은 현대에 양의 탈을 쓴 수많은 늑대를 경계해야 함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럴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또 그것 때문에 또 다른 늑대를 양산하지는 않을지. 

형사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작품이지만 사건의 발단은 인간이 얼마나 범죄를 저지르고 잡히지 않을 수 있는가를 토론하던 두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그 토론으로 한 사람은 영원히 완전 범죄를 꿈꾸는 악의 화신이 되고 다른 한 사람은 그를 응징하려고 몸부림치는 재판관이 된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도 범죄를 입증할 수 없어 하던 재판관 앞에 마지막 기회가 찾아오고 그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집행관으로 하여금 판결을 집행하도록 만든다.  

엘러리 퀸의 작품도 마찬가지지만 악은 너무도 쉽게 인간에서 인간으로 퍼지는 것 같다. 이 작품은 살인은 너무 쉽고 누구나 저지를 수 있으며 하나의 범죄, 한 명의 범죄자만을 잡는다고 절대 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악은 악으로밖에 단죄할 수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안타깝지만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슬프다. 간결하면서도 완벽한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