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지금 막 탐정 사무소가 문을 닫아 혼자 된 남자다. 그의 이름은 기 롤랑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짜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어하던 일을 시작한다. 그것은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일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이름은 무엇이고 어디서 어떻게 살던 사람인지 그는 알고 싶었다. 그 남자는 이제 더 이상 젊지 않다. 어쩌면 그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고 싶은 것은. 그리고 그것을 지금에서야 시작하는 것은.

그는 자신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남자로부터 시작한다. 그 남자의 입에서 자신과 같이 있던 것을 본적이 있다는 한 남자를 찾는다. 그 남자는 사진이 담긴 과자 상자를 준다. 그 속에는 자신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 그리고 늙은 남자가 있다. 게이 오를로프, 그 젊은 여자는 이미 죽었다. 그 여자의 첫 번째 남편을 찾는다. 그에게서 그녀의 두 번째 남편 이야기를 듣는다. 프레디 하워드 드 뤼즈, 그가 자신이었을까? 이제는 그 여자의 두 번째 남편이던 남자를 찾는다.

그는 드디어 그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난다. 하지만 그는 그 여자의 두 번째 남편은 아니었다. 그는 그의 친구였다. 이름은 페드로. 이제 그는 다시 사진을 받는다. 이번에는 네 명이 있다. 그와 그 여자와 그 남자와 처음 보는 여자의 젊은 시절의 사진이다. 드니즈 쿠드뢰즈, 그녀를 찾으면서 그는 서서히 기억의 단편들을 찾아낸다. 그 여자는 그의 아내였다. 그리고 그들은 몰래 국경을 넘다가 실종되었었다.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이 찾고 있는 사람은 모두 없었다. 자신이 모르는 자신밖에는. 

가끔은 그것은 꿈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골목길과 장미꽃이 피어 있는 파란 대문 집, 한 낮의 뜨거운 햇빛과 인적 없는 고요함. 어린 시절의 어느 즈음의 기억이다. 나는 그것이 내 기억임을 안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추억이니까. 하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도 모르는 한 남자가. 그는 이제 자신을 찾으려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를 원한다.  

그는 그 길을 떠난다. 자신을 찾아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어렴풋이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누군가와 같이 있던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는 그 누군가를 찾아간다. 그는 낡은 사진 한 장을 보여 준다. 그 속에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이 있다. 젊은 여자와 함께. 사진 속의 여자는 그가 사랑한 여자였을까? 그는 그 여자를 찾는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또 다른 사람은 낡은 과자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기억의 찌꺼기들을 선물한다. 말린 네 잎 클로버나 망가진 장난감 병정 따위가 들어 있는. 그를 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다.

그를 알지도 모른다는 사람들은 그가 모르는 이름으로 그를 기억하고 그가 모르는 시절의 이야기, 그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떠들어댄다. 그렇게 사람들의 작고 희미한 기억 속에 의지해서 그는 결국 자신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을 되찾는다. 그 기억 속에 있던 가장 친한 친구도, 그가 사랑한 그의 아내도 존재를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마치 그 사람이 존재했었는지 어쨌는지도 확실치 않아질 때까지 우리가 이 땅 위에 남기는 그 자취의 무, 흩어지는 구름, 과거를 모두 기억할 수 없다면 살아서 무엇하나? 그러나 살지 않는다면 추억해서 무엇하나?  

옮긴이 김화영의 말이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아내, 아이를 기억하지 못했다. 같이 살면서도 그는 이방인이었고, 자신을 잘 알던 친구들이 옛날을 이야기해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치 유령처럼. 그는 단지 기억을 못할 뿐 자신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그래도 그는 낯설어 했고 괴로워했다. 그런데 자신을 기억하고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 없는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서 있다면 그의 심정은 어떨까? 

그 남자는 찾는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을, 그에 대해 말해 줄 사람들을. 그리고 차츰 기억해 간다. 어떤 때, 어떤 장소, 어떤 사람과 그 길을 걷던 자신의 심정을. 그는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된다. 아내의 이름과 친한 친구의 이름도. 하지만 아직도 알아야 할 것은 많고 그는 다시 그것들을 찾아 나선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낡은 사진 속에 있는 낯 선 얼굴을 보며 이 사람이 누구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그 시대에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누군가에게 그는 소중한 사람이었던지. 기억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더 이상 소중하지 않고 쓸모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말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잃고 있는 것, 잊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한번쯤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모래는 우리들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으므로.

작가는 우리가 기억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참혹하고 불안하던 2차 대전의 기억을 잊고,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을 잊고, 그 잊었다는 기억마저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도대체 남자는 자신을 찾아 떠나면서 자신이 사랑한 아내를 찾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는 게 참 허무하다고 느끼게 하는 아주 서글픈 작품이었다. 

가끔 먼지 날리는 바람이 불 때 가슴이 쓸쓸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지난날의 잊어버린 기억 때문이다. 무언지 생각나지도 않는 어떤 것이 가슴에 남아 몸부림치는 것 같은 느낌. 죽을 때까지 이런 느낌은 따라다닐 것이고 그것은 아마도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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