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정원
존 베런트 지음, 정영문 옮김 / 황금나침반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같은 장소, 같은 사건, 같은 사람들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지고 평가된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미국 남부의 서배너라는 곳을 들여다볼 때 작가는 처음 <보물섬>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생각하고 그 우아하게 남아 있는 고상한 도시에 머물기로 한다. 그리고 그곳을 떠날 때도 같은 마음을 갖고 떠난다. 그에게는 어떤 것이 중요했을지 몰라도 있는 그대로의 1980년대의 서배너의 모습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KKK단의 우아하게 포장한 모습과 다르지 않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그들의 모습은 우월감 그 자체였다. 서배너의 상류사회인사들은 그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클럽이 있었고 자자손손 그곳의 상류층이어야 했다. 그것 하나로 모든 것이 인정되는 곳이고 그것 없이 능력과 부만 있는 사람에게 그곳은 지독하게 배타적이었다. 심지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공적을 폄하하기도 하고 그들 사이에 흑인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흑인들은 여전히 흑인들끼리 모임을 갖고 백인들을 흉내 내서 코티용 파티를 열지만 백인들은 그들이 그런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동성애자가 유혹을 했다는 이유로 레인저 부대원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해도 배심원들은 그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하지 않았지만 정당방위로 살인을 했다는 그들의 이웃이지만 상류층은 아닌 부를 과시하는 골동품 상인에게는 살인죄를 적용해서 재판을 한다.

 

이 책이 출판된 뒤에 서배너에 관광을 간 사람들 숫자가 늘었다고 한다. 그들이 보고자 한 것은 백인들의 우아한 상류층의 옛 건물과 옛 향수가 아니었을까 싶다.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고. 나이가 들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면 그 영화가 명화가 아닌 역겨움만을 준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스카렛 오하라나 레트 버틀러에게 눈길이 가는 것이 아니라 흑인들의 순종적이고 초라한 행색에 눈길이 가게 된다. 그것도 역사였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되풀이 하지는 말아야 한다.

 

작가가 연대를 정확하게 책에 표현하고 그 시대를 이야기한다는 점을 강조했더라면 읽다가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바네사 윌리엄스는 1984년 미스 아메리카인데 여기에서 언급되는 것이 의아했다. 아마도 재판이 그만큼 오래 끌었기 때문에 작가가 혼동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오타도 많고 번역의 미숙함도 엿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만한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 속 서배너를 있는 그대로 자신의 사견 없이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럼으로써 더욱 서배너가 지니고 있는 점이 부각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작가만이 지니고 있는 감각이리라 생각된다. <선악의 정원>에는 선과 악의 공정함이 없다. 그 정원에 있는 선과 악은 가진 자의 선이고 있는 자의 악뿐이다. 선악이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 아님을 이 작품을 알게 해준다. 서배너라는 선악의 정원은 고인 물과 같다. 고인 물은 언젠가 썩게 마련이다. 그 썩고 난 자리에 좀 더 공평한 선악의 정원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나는 서배너로 관광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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