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그마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전쟁 속에서 가해국이든 피해국이든 그 안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 모두의 삶은 너나없이 황량하다. 왜냐하면 전쟁이라는 이유로 개인은 개인의 자유의지를 빼앗기고 국가에 종속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개인들의 삶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국가를 떠나 시대를 잘못 만난 불쌍한 인생들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명분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라가 있어야 국민도 있다는 단 하나의 명제 아래 그 어떤 명령에도 복종해야 한다. 국민이 있어야 나라가 있는 것이라는 명제는 평소에도 먹히지 않는 말인데 전시에야 반역에 가까운 말일뿐이다.

 

이 작품은 독일의 암호기 이니그마의 암호를 풀기 위해 안가처럼 꾸며진 블레츨리라는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한 개인의 눈을 통해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이다. 톰 제리코는 단지 수학을 좋아하고 수학을 연구하고 싶어 대학에 들어온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던 그가 전시에 우연히 블레츨리에 들어가서 잠시 이니그마의 암호를 풀게 된다. 그 와중에 그는 정신이 피폐해지고 연인에게 차인 고통으로 요양을 위해 잠시 블레츨리에서 떠나 있게 된다. 하지만 그가 이니그마의 암호를 푼 것도 잠시 다시 이니그마는 재정비되어 연합군은 무차별 유보트의 어뢰 공격을 받게 되어 다시 그는 블레츨리로 불려간다. 그때 그는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실종과 거기에 얽힌 모종의 기록을 얻게 되면서 그는 이니그마의 해독과 함께 실종사건도 풀어야 하는 난제를 안게 된다.

 

우리는 톰의 발자국을 따라 가면서 이 작품이 단순히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전쟁만을 다룬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오히려 전쟁 속에서 자신이 원하지 않던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전쟁이 사람을 얼마나 잔인하게 만드는지를 알게 된다.

 

전쟁만 아니었다면 그들 개개인의 삶은 그렇게 엉뚱하게 일그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전쟁이 아니어도 인간의 삶은 한순간에 일그러질 수 있다. 그래도 전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그런 삶을, 기억을 강요하고 각인시켜버린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은 원수의 원수는 친구라는 말로 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다. 어차피 전시든, 평시든 인간의 삶은 어떻게든 흘러가게 마련이니까. 그러니 톰이 모든 것을 파악하고 진실을 알았다고 한들, 국가가 국민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한들, 또한 국가가 전시라는 이유로 국민을 감시했다고 한들, 스파이가 있었다고 한들, 배신자가 있었다고 한들, 총성이 난무하고 죽음이 있었다고 한들 어쩔 것인가. 이니그마 암호문을 해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배들의 피해를, 그 안의 무수한 죽음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이유로 납득시키기에는 모자라지만 그것 이외의 어떤 것도 붙일 수 없는 일인 것 또한 사실이다.

 

인간의 역사는 흔히 전쟁의 역사라고 한다. 그 안에 개인의 역사는 없다. 한 덩어리로서의 인간만이 존재하고 각 개인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할 수 없다. 마치 이니그마가 하나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고 무수한 암호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이니그마보다 못한 존재인 많은 무명씨들의 삶은 그래서 이 안에서 이니그마보다 덜 조명 받지만 우리 무명씨들에게는 더욱 공감하게 만든다. 그 속에서 개인은 이니그마에서 하나의 암호를 이루는 기호 하나와 같았으리라 느껴지기 때문이다. 암호도 깨지고 인간도 깨지고...

 

영어권 추리소설이 작아지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 <당신들의 조국>에 이어 나온 이 작품을 통해서 새로운 좋은 작가를 만났다. 다른 관점에서 쓰였다고 볼 수 있는 두 작품에서 작가의 일관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인이다. 인간이다. 작은 인간의 삶을 조명하면서 작가는 조지 오웰의 <1984>와 같은 울림을 느끼게 한다. 그런 작가의 시선이 있어 그래도 역사는 읽혀지고 되새김질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로, 개개인의 역사로, 그것이 모여 역사 자체가 되는 것이라는 울림... 작가의 다음 작품을 만날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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