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홉살은 책읽는 아홉살이었다. 독서는 나에게 지금처럼 버릇이 아니라, 무언가 절실했었고, 지금처럼 글자들을 훑어나가고, 책에 대한 욕구가 '소유'를 정점으로 내려오는 것에 비해, '책'은 그 자체로 '욕구덩어리'였고, 어린나이의 치유할 수 없는 중독이었다. 집에 있던 중고등학생용 전집과 어른용 세로 글자 전집까지 뭔소린지도 모르고, 읽어나갔지만, 지금 어른이 된 내가 나의 아홉살에게 이런 책을 선물했다면, 나는 지금의 문과형 인간보다, 관찰형 아웃사이더 독서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는 지금의 나보다는 '아홉살의 나'에게 이 책들을 선물하고 싶다.
레이프 라슨의 데뷔작 <스피벳> 워낙에 데뷔작덕후이긴 하지만, 이런 멋진 데뷔작을 읽게 되면, 누구에게나 '첫'작품은 필수불가결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이 사람은 책 안쓰고 이때까지 뭐하고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R은 이 책을 아홉살에 읽지 못한 것을 억울해하고, 주변의 아홉살에게 모두 쥐어주고 싶다고 하였지만, 사실 이 책의 주인공은 열두살이다. .. 이러나 저러나 아이의 나이인건 맞지만.
열두살의 스피벳에게는 카우보이 아버지와 과학자 엄마, 실수로 죽은 동생, 그리고 누나가 있다.
아무리해도 아버지와 가까워지지는 못하지만, 엄마의 과학적 탐구정신만은 그대로 빼다 닮았다.
주변의 모든 것을 '도해화'하는 144cm 33kg 의 그가 나이를 속이고 몰래 기고한 도해들로 인해 스미소니안 박물관의 저명한 베어드상 수상자로 지명되며, 난생처음 농장을 떠나 '천국이 있다면 '스미소니안 박물관'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스미소니안 박물관'으로 가게 된다. 이 아이같지 않은 아이의 용기와 아직까지 '신기하고' '그릴 것 투성이인' 경이로운 세상.을 아홉살의 나에게 읽어줬다면, 아마, 나는 책을 덮고, 좀 더 밖으로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줄거리는 로드무비에 성장소설, 모험소설로 보이기는 하지만, 아니, 그게 맞지만, 이 아이의 정신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관찰과보다는 상상과에 가까운 나는 '관찰'과 '도해' 라는 '과학'이 지금까지도 몹시 생소하다. 아니, 어쩌면 그저 때를 놓친것뿐일지도. 스피벳의 모험이 시작되는 장면이자, 아버지와의 갈등이 고조되는 장면은 아이가 몰래 기차를 타고, 가족을 떠나게 될때의 새벽이다. 그 부분과 그 앞뒤로, 아버지와의 갈등의 본질을 보여주는데, 말도안되게 설득력 있는 장면이다. 그 섬세함이 작품의 끝에서는 좀 아쉬워지긴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작품인 건 분명.
사토우치 아이의 <모험도감> 부제, '캠핑과 야외생활의 모든 것'
스피벳이 지금 여기 있으면, 이 책을 필수로 챙겨갔을지도 모르겠다. 캠핑북이라고 하면, '캠핑'이라는 단어가 왠지 먼나라 이야기인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나는 어렸을적 꽤 캠핑을 다녔다. 요즘 어린이들도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막상 남동생이 태어났을때 우리 가족은 더 이상 캠핑을 가는 일은 없어졌지만. 가족끼리, 성당에서, 학교에서, 걸스카웃에서, 제법같이 야외에서, 집 밖에서 잘 일들이 있었는데 말이다. 캠핑북도 맞긴 맞는데, '서바이벌북'으로 읽어도 재미날 것 같다.
그냥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정보 모음이겠거니, 했는데, 훌훌 넘기면 넘길수록 재미난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그것도 만화로다가!) 만화와 글이 적절한 비율로 나와 있고, 편집과 기획도 훌륭하다.
'캠핑에서 해야 할 일들을 ‘떠나기 전에’, ‘걷는다’, ‘먹는다’, ‘잔다’, ‘만들며 논다’, ‘동식물 만난다’, ‘위험에 대처한다’ 의 7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별로 알아야 할 사항을 다양한 주제로 더 세분화 해 소개' 하고 있는데, 예컨데, '걷는다' 에서는 신발 종류와 밑창과 알맞은 신발, 신발끈 매는 방법의 세세한 그림 소개(우와!), 양말의 종류와 적절한 양말 선택, 물집 예방, 물집이 생겼을때 등등 '걷는 법'에서는 신발바닥 그림에 지면에 닿는 부분 표시 각각의 상황에 (출렁다리 건널때, 통나무 다리 건널때, 얕은 강 건널때 등) 맞는 올바른 걸음걸이와 팁이 나와 있다.
어디라도 당장 짐싸서 집나갈것 같은 부작용을 감수한다면, 정말 최고의 책이 아닌가 싶다.
로버트 헉슬리 <위대한 박물학자>
이건 사실, 지금의 나에게도 무척 유용한 책인데, 어릴때부터 읽었어도 좋았을 것 같다.
40여명의 박물학자(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박물학자'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다.) 에 대한 이야기를 훌륭한! 멋진! 최고의! 도판들과 함께 짤막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낯익은 이름들도 있지만, 처음 보는 이름들이 다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읽고 지나간 생소했던 이름들이
이 이후에 읽는 책들에서 언급되면, 예전에는 그냥 스르륵 넘어갔지만, 지금은 '아, 이 사람!' 하며 급 반갑다.
스피벳이 무척 좋아했을 것 같은 이 책은 커피테이블북으로 가장 눈에 잘 띄는, 손 닿는 곳에 놓기에도 훌륭한 표지와 만듦새, 그걸 아무때나 아무페이지나 넘겨 보아도 적절, 아이부터 어른까지 남녀노소 불문, 지금 우리가 누리는, 수업시간에 달달 외우고 넘어가는 많은 것들이 찾아지는 그 순간, 노력, 희열을 접할 수 있고, 그들(박물학자들)의 집념을 위대하다. 느낄 수 있다. 뭐랄까, 요즘 세상에 안 어울리는 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좋은 책'이다.
책을 엮은 로버트 헉슬리는 런던 자연사 박물관 식물부의 실장이다. 스피벳이 만났다면 아주 좋아했을 것 같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