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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리커버)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문미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5월
평점 :
품절
유튜브 리뷰: https://youtu.be/yLTYZsGVTdU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얇은 책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이야기의 무게는 현실의 벼랑 끝에 선 한 사람의 선택을 따라가며 독자의 마음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흔든다. 분량도 많지 않고 문장도 어렵지 않아서 금방 읽을 수 있지만 다 읽고 나서도 마음에 오래 남는다.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으며 각자의 감상을 나누기에도 정말 좋은 작품이다. 서로 다른 시선에서 이 이야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꽤 풍부한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소설은 주인공 ‘명주’가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명주는 연금 문자를 받고 어머니의 죽음을 ‘조금만’ 유예하기로 한다. 자신을 위해 써본 적 없는 큰돈 앞에서 처음으로 흔들린 것이다. 이후 명주는 시신을 직접 처리하고 비밀을 숨긴 채 일상과 감정을 유지하려 애쓴다.
이웃에 사는 청년 ‘준성’은 알코올성 치매를 앓는 아버지를 간병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 그는 명주에게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이야기는 점점 팽팽한 긴장 속으로 나아간다. 누가 봐도 부도덕한 선택이지만 삶의 벼랑 끝에 몰린 명주의 심정은 복잡하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이 작품이 빛나는 건 인물의 내면을 따라가는 방식에 있다. 명주가 저지르는 일은 분명 범죄이자 패륜이다. 하지만 독자는 어느 순간부터 명주의 선택에 이해의 끈을 드리우게 된다. 이성적으로는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처한 상황 앞에서 감정은 자꾸만 흔들린다. 그 과정에서 느끼게 되는 이 양가감정은 이 소설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명주의 행동은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명백한 잘못이다. 그러나 그녀의 삶 또한 절박하다. 과거의 사고로 일할 수 없는 몸, 나이로 인해 닫힌 취업의 문,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현실. 독자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면서도 자꾸만 그녀의 편에 서게 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이야기 속 인물들이 우리가 외면해온 '어쩔 수 없음'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날 위해 이만한 돈을 써본 적이 없었어. 이 세상에 별 미련도 없지만 이 돈이라도 맘껏 써보고 죽자 했지.”
이 대사를 읽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돈이 생기자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자신이 아니라 딸이었다. 자신을 위해 써본 적이 없던 사람은 결국 자신을 위해 쓰는 법도 모른 채 그렇게 버텨낸다. 늘 자신을 제일 나중에 두는 그 삶. 이 작품은 그런 명주를 통해 한 인간이 얼마나 오랜 시간 ‘버텨왔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선택의 윤리보다 그 선택 뒤에 있는 마음에 더 집중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누군가의 '잘못'을 바라보기보다 그 사람이 얼마나 추운 시간을 지나왔는지를 묻게 만든다. 불편함과 연민, 이해와 거부감이 동시에 교차하는 이 독특한 감정이 오래 남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단순히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경험’에 가깝다. 어떤 사람에게는 불편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깊은 공감을 주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고 나누기에 좋은 작품이다. 같은 이야기를 두고도 누구는 명주를 이해하고, 누구는 규탄하며, 또 다른 누구는 준성에게 감정이입을 할 것이다. 그런 다양한 반응들이 이 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누구나 저마다의 겨울을 지나왔다. 어떤 겨울은 너무 길었고, 어떤 겨울은 너무 조용했으며, 어떤 겨울은 그저 무사히 지나간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겨울을 지나온 방식이 모두 다르듯 이 책도 독자마다 다르게 읽힐 것이다. 누군가에겐 불편함으로, 또 누군가에겐 깊은 공감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