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울 것
임경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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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유롭다가도 자유롭지 못한 삶에 나는 다시 위로를 받는다.
[자유로울 것](예담) - 임경선

ㅁ 임경선 작가님의 [자유로울 것]이란 책은 내가 작가님을 알고 나서 읽은 두 번째 책이다. 이전에 [태도에 관하여]를 읽고나서 ‘아 작가님 참 멋있으시네.’ 라는 산뜻한 기분을 가지고 있던 터라, 두 번째 에세이가 나왔던 17년도 쯤에 구매해서 읽었다. 그 땐 국방의 의무를 하고 있던 때라서, 책을 읽을 때, 엄청 우울했던 걸로 기억한다. 처음 하는 일들과 수직적인 구조 때문에 정신없을 시기였고, 무엇보다 바깥과의 단절감이 엄청 스트레스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심리 속에서 하필 책 제목도 [자유로울 것]이라니. 이 얼마나 필연적인 만남이었는가. 물론 별 의미 없지만, 그 땐 진짜 제목 하나와 작가님의 책이란 이유로 구매했다. 자유롭고 싶어서, 읽었다. 
 책을 읽는다고 내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지만, 단지 마음으로 위로를 받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몸이 갇혀있으니 생각도 갇혀버릴 것만 같아서. 생각만이라도 좀 말랑해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읽고나서 조금 나아졌냐고?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약간은 말랑해졌고, 그 후로 약간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니 그냥 일이 편해진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리고나서 책은 서랍에 꽂혔고, 그 뒤로 손길이 닿지 않았다.

ㅁ 이 책을 다시 꺼냈을 땐, 고작해야 1년 전에 읽었다고 생각했다. 막상 글을 쓰면서 예전에 언제 읽었는지 찾아보니까 진짜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알았다. 2년 반. 나는 이 책을 2년 반만에 다시 읽었다. 그래서 첫 만남의 기억을 잘 알지 못한다. 단지 책에 써둔 메모들을 통해 기억의 조각을 다시 맞췄던 것 뿐이다. 그래도 뭐… 약간 무의식이 반응하듯이, 읽다보니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 땐 그랬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정말 많이 했다. 지금과는 너무 다른 시기였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책임과 통제, 자기 규율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험한 대가를 치러야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자유로운 사람으로 남고자 계속 노력하면서 살고 싶다. 
- p. 6 서문 中 -
ㅁ 당시엔 자유롭지 않은 환경이라서 스스로 쪼일 필요가 없었다. 주변이 이미 엄청 쪼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저 말을 전혀 공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자유를 위해서 스스로 제약을 건다는 게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환경이 바뀐 지금, 공감하지 못한다는 메모를 지웠다.(지우려다가 밑에 첨언을 추가했다. ‘아냐 스스로 통제를 해야 자유로운 거더라.’라고) 자유로워서 스스로 통제해야 하는 요즘이라서. 역시 겪어보지 않는다면 모르는 것이다. 지난번과 다르게 기본적인 환경이 바뀌었고, 내 생각도 바뀐터라 읽는 내내 과거의 나를 엿보는게 참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사람이 2년 반만에 이정도로 바뀔 수 있구나. 이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물론 아직도 같은 생각을 하는 부분도 많았지만 말이다.  


ㅁ [자유로울 것]이란 책은 임경선 작가님의 에세이(두 번째)였다. 사실 제목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읽고 보면, 작가님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살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시는구나 생각이 들곤 했다. 처음 읽을 당시에나, 지금 읽을 때나 이건 비슷한 마음이다. 아마 다음 구절에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국은 유독 오래가는 인간관계를 높이 평가한다. 인내하며 오래 살아낸 노부부의 사랑을 아름답다 하고, 오랜 세월 사귄 연인과 헤어지는 것을 나무란다. 학창 시절 친구가 점점 불편해지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의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도 고통스러운 만남을 이어간다. 
p.121
 이런 생각을 난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받아본 적은 굉장히 많았다. 물론 학창시절의 친구 중에 그런 건 아닌데, 그런 관계는 어디든 존재하니까. 굉장히 불편한데도 만나서 내 시간을 소비하고 있으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회의감이 들곤 했었다. 이미 끊어진 인연의 끈을 억지로 붙잡는 듯한 기분. 이미 끝나버렸는데 말이지. 그렇다고 끊어진 걸 버리는 게 맞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건 그거대로 불편했다. 마치 야박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 작가님도 비슷한 말을 하지만, 나는 작가님과 비슷했다. 처음 읽을 땐, 야박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야박함을 둘째 치고 내가 편해야한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관계는 현재진행형이다. 늘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관게를 다져가는 성의를 보여주는 사람만이 시간이 흘러 현재의 관게에서도 살아남는다. 그러니 과거에 친분을 맺은 기간이 아무리 길었어도 지금 점차 멀어져가는 사람들에 대해 무리한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p.121
 "삶은 나라는 식물에 인연이라 불리는 곤충들이 오고 가는 것이다. 오는 곤충을 다정하게 맞이하고 가는 곤충에겐 너무 집착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비슷한 느낌인 듯. 이걸 보면서 자유롭다는 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심적으로 편한 상태? 진정한 자유가 바로 이런 걸까. 지금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하고 싶은 걸 하는 상태라고 생각했다.(그렇게 메모가 되어있었다.) 그 때의 상황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겠지. 그 땐 정말 갇혀있는게 싫었나 보다.  


ㅁ 이번에 읽을 때, 유독 눈에 띄던 부분은 나이에 관한 이야기와, 예술가(나 작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이에 대한 건지 사실 삶에 대한 건지 헷갈리지만 다음 구절을 보자. 

“나이 먹는 일의 가장 슬픈 점은 더 이상 낙이 없다는 것이야.” 나이 들면 마음이 흔들리거나 설레거나 떨리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 감동할 기회도 적어진다. 그나마의 위안은 나이 들어가는 일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p.238
 당시엔 그렇게 막 대단한 문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읽을 때 이게 왜 이렇게 기억에 남았는지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저렇다고 하지만 사실 요즘 저렇다. 그래서 그런가? 위 문장 앞부분에 비슷한 말이 있다. 영화 <45년 후>에 나오는 대사라고 하던데 ‘늙으면 목적의식이 없어져서 싫어’였다. 목적의식. 아마 이게 자꾸 눈에 밟히고 있다. 무엇을 향하는 게 이렇게나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 그게 줄어든다. 확실히 지금의 나는 많이 줄어들었다. 그게 주변환경이든 여러 이유로든. 처음 읽었을 때보다 내 목적의식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ㅁ 예술가, 또는 작가에 관한 이야기는 요즘 글을 쓰니까 그런 것 같다. 특히 예술가. 사실 그렇게 예술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글과 시를 쓰는 이유도 예술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저 나의 작은 재미를 위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직업검사를 하나 했다. 여러 분야에 흥미를 측정하는 심리검사였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 해봤다. 이런건 보통 학생 때 자주 하니까. 성인이 되면 할 일이 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예술계 흥미가 엄청 높게 나와서 놀랐다. 세부적인 영역의 흥미는 역시 내 전공분야가 제일 높았는데, 예술쪽 흥미가 전반적으로 높게 나왔던 것이다. 특히 글/글쓰기와 시각디자인. 조금 의외였다. 좋아하긴 하지만 이게 내 전공만큼 좋아할 줄은 몰랐다.(두 흥미도의 차이가 고작 2뿐이었다. 이 정도는 그냥 같은 지위의 흥미라고 상담가님이 말하셨다.) 그 뒤로 자꾸 예술쪽에 눈이 갔다. 뭘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책에서 다음 문장이 있었다. 

예술가에게 재능은 존재의 본질 같은 것. 그 재능을 어떻게 다루면서 살아가야 할까. 쳇 베이커처럼 짧고 굵게, 뜨겁고 강렬하게 불사르며 살아가야 할까, 혹은 세이모어 번스타인처럼 가늘고 길게, 겸손하고 마일드하게 살아가야 할까. 
p.250
 짧게 설명을 덧붙이자면, 쳇 베이커는 영화 <본 투 비 블루>에 등장하는 천재적인 연주가라 화려한 시절을 보내지만 그 부담감으로 결국 마약으로 망가지는 캐릭터였다. 반면 세이모어 번스타인은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라는 영화의 주인공인데, 그는 한창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인기를 구가하는 시기에 스스로 무대를 벗어나 조용히 후학을 가르치는 삶을 택한다. 이는 비단 예술만이 그런 게 아니다. 재능을 가진 걸 어떻게 펼쳐내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선택과 감당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같은 글 마지막에 작가님도 그렇게 말하신다. 이게 예술이란 단어로 써져있어서 관심이 가졌는데, 다시 곱씹다보니까 그게 아니였던 것 같다. 나도 지금 딱 저 선택의 기로에 있어서 그런가 보다. 작가님은 예술가를 이렇게 정의하셨다. ‘예술가는 머리가 아닌,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가는 사람이다.’(p 249). 문득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은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ㅁ 막상 다시 읽은 것치곤, 차이는 많지 않았다. 앞에서 쓴 것처럼 그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내가 참 많이도 다른 생각을 했구나 싶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때와 다르게 눈에 띄더 부분이 늘었다는 사실. 공감되었던 부분도 더 많아졌다. 물론 첫 번째 읽은 당시의 상황이 지금과 너무나 달랐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다음 미래의 내가 이 책을 세 번째 읽게 될 때, 알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건 첫 번째나 두 번째나 재밌다. 마음이 포근해지는 기분은 똑같았다. 안 그래도 지쳤을 때 책장에서 꺼낸 책이었다. 첫 번째 읽을 때고 그렇게 골랐고, 이번에도 똑같이 위로를 받는구나...

ㅁ 그렇다고 내가 임경선 작가님의 책을 많이 읽은 건 아니다. 사실 에세이 말고는 읽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자유로울 것]을 두 번째 읽으면서 느낀 건, 작가님의 글은 이런 문체라고 말하고 싶었다. ‘서늘한 포근함’. 일단 이렇게 쓰고 있는데, 사실 적당한 표현을 모르겠다. 작가님은 다른 에세이랑 다르게 완전 말랑말랑(이걸 넘어서면 오글거림이 되는 것 같다.)하지 않다. 약간은 단단해서 서늘한 느낌이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포근함이 느껴진다. 무작정 따뜻한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무튼 이건 지금이나 처음 읽었던 시기에나 똑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더 좋다. 일반적으로 합쳐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오묘하게 섞여 있어서. [태도의 관하여]는 부대 내 도서관의 책으로 읽었는데, 요즘 들어서 구매하고 싶단 생각이 든다. [자유로울 것]을 읽고나니까 이전 에세이도 다시 읽고 싶어진다. 에세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 임경선 작가님의 에세이가 유독 좋아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년 반이라는 시간 사이에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임경선 작가님의 책 [자유로울 것]에서 마주쳤다. 다음엔 어느 시간의 내가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를 만날지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다시 읽는 것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나라는 존재를 만나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책에 담긴 작가님의 생각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는 건 언제나 똑같은 생각이다. 그렇기에 다시 이 책을 볼 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자그마한 메모를 남겼다. ‘다음엔 어떤 자유로움을 생각할지 기대하겠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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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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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모두에게 서로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기를...

(스포를 안쓰려고 노력했는데, 그런 뉘앙스는 있으니 조심하시길)


ㅁ 2016년 9월 12일~24일에 처음 보고

647일 지나

다시 보게 된 건 2018년 7월 3일~14일 ㅁ


신경숙 작가님의 책이다. 아마 작가님의 책 중에서 가장 처음 접한 책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신경숙 작가님'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대부분이 이 책에서 나온 것들이다. 


내용부터 문체, 서사방식부터 모두 다.


책을 읽은 날짜까지 자세하게 아는 경우는 드물다. 시간이 지나면 잊어먹기 때문인데, 


저걸 기억하는 건, 


당시 책을 양으로 읽는 시절에 따로 리뷰 따위는 쓰지 않았다. 


대신 그냥 일기를 쓸때 코멘트를 달곤 했다. 그 일기장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나도 이걸 다시 읽으면서 그 일기장도 다시 꺼내 봤다. 그렇게 추억팔이로 1시간이 삭제된 건 덤.


다시 읽는 행위가 책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다 해보았을 것이다.


이 짓도 처음과 다시 볼 때의 간격? 간극?을 보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다행히 기록이 있어서 다행이다. 언젠가 '읽은 것을 쓰다'에 쓴 리뷰도 쓸 날이 오겠지...



무튼 그만 사족을 달고, 책 이야기를 쓰자.


가장 큰 차이를 느꼈던 건, 


(다시 읽는 다른 모든 책들도 비슷하겠지만,) 왜? 라는 부분이 조금 더 공감되었다는 것.


아마 흔히들 말하는 복선을 다시 읽으면서 찾아낸 게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들이 왜 그런 선택과, 그런 말을 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보였는지...


힐끗힐끗 가려진 의미를 좀 더 들춰볼 수 있었다.


좋다. 그래서 다시 읽는 거구나.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처음에는 좀 답답한 면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주인공인 정윤도 그렇고, 명서도 그렇고,


그리고 마지막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써있다. 아마 그 땐, 좀 얕게 읽었던 것 같다.


근데 지금 보면, 음... 답답한 게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던 것이란 걸 알았다. 


그게 마지막에 가서야 깨닫는 걸 알고, 그리고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한지 이해가 되더라.


왜 그런가 싶었는데, 최근에서야 문장을 읽는 게 아니라 '음미'하게 된 게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책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글을 쓰면서, 


문장을 더 꼼꼼히 보게 된다. 그래서 그냥 슥- 하고 지나가는 단어조차도


이젠 곱씹는다. 그렇게 하나하나 머릿속을 채우니


그들을 알게 된다. 아니 그들이 되어간다.


언제는 정윤이 되었고, 다른 날에는 명서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윤교수가 되었다.


소설을 제대로 읽는다는 게 이런건가...


처음보다 더 많이 메모했고, 그만큼 책은 좀 더러워졌겠지만,


먼 훗날 읽을 때, 또 어떤 기분일지...



다시 봐도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던 인상 깊은 내용은 바로


윤이가 단이의 편지를 읽는 그 때!


정말... 처음에 볼 때도 가슴이 아렸던 게 알고 봤는데도 아렸다.


그렇게 슬픈 '언젠가는'은 처음 보았다.



마지막은 작가의 말로 끝내려고 한다. 작가의 말 중 한 부분이다


여러 개의 종이 동시에 울려퍼지는 것 같은 사랑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청소년기를 앙드레 지드나 헤세와 함께 통과해온 세대가 있었다면 90년대 이후엔 일본작가들의 소설이 청년기의 사랑의 열병과 성장통을 대변하는 것을 보며 뭔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한국어를 쓰는 작가로서 우리말로 씌어진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소설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내가 지금 쓰려는 소설이 그런 소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지금 청춘을 통과하고 있는 젊은 영혼들의 노트를 들여다보듯 그들 마음 가까이 가보려고 합니다. 더 늦기 전에요. 청춘에만 갇혀서는 또 안되겠지요. 누구에게든 인생의 어느 시기를 통과하는 도중에 찾아오는 존재의 충만과 부재, 달랠 길 없는 불안과 고독의 순간들을 어루 만지는, 잡고 싶은 손 같은 작푸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느 날 불현듯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기도 하는 것처럼 세월이 흐른 후의 어느 날 다시 한번 찾아 읽는 그때도 마음이 흔들리는 그런 소설로 탄생하기를요.

p.374


진짜... 짜릿한 감동.


처음 이 책을 보았던 이유가 바로 저것이었다.


주변 얘들이 다들 소설을 보면 기욤 뮈소, 히가시노 게이고 등 외국 작가들을 좋아했다. 음...


물론 그들 소설도 진짜 재밌다. 하지만 난 지금 내가 사는 이 곳의 이야기. 


외국이름이 아닌 우리말로 된 주인공들의 이 곳에 대한 이야기.


그걸 너무 보고 싶었다. 거기에 딱 맞는 책을 봐서 얼마나 행복하던지..


한국현대소설들이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요즘 자주 하게 된다.



그리고 제목에 대한 이야기.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요즘 전화벨은 잘 안 쓴다. 톡을 자주 쓰지...


근데 중요한건 전화벨이 아니라, '어디선가 나를 찾는'이다.


후반에 가면 어디선가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내용이 나온다.


음... 그게 처음 볼 때 뭔 소린가 했다.


그렇게 어디선가 누군가를 간절히 찾는 마음.


서로를 붙잡는 하나의 각인.


작가님이 말하듯, '서로에게 어떻게 불멸의 풍경으로 각인되는지...'(p. 377)


그들의 충만과 부재의 관계 속에서 이어진 끈을 보며


살아있는 모두에게 어디서든 그리고 언제든 서로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기를...



ㅁ Re:ading 1.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문학동네) - 신경숙 작가님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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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쓰다가 느낀건 다시 읽기랑 리뷰랑 차이를 모르겠다.


단순 비교만 되는 기분이랄까...


일단 모르겠다. 하다보면 좀 길이 보이겠지.


그동안 리뷰 같아도 계속 써봐야겠다.


이 소설에서 어쩌든 슬픔을 딛고 사랑 가까이 가보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이 읽히기를, 비관보다는 낙관 쪽에 한쪽 손가락이 가 닿게 되기를, 그리하여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언젠가‘라는 말에 실려 있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꿈이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 새벽빛으로 번지기를...
p.378 작가의 말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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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 펼칠 때


그 냄새가 좋다.


그래서 책이 많은 곳을 찾는 걸까.


책향이 좋거든.(어디서 팔았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교○문고에서 팔더라 소름;;)


그리고 그 책과 저자와의 첫 만남도 좋다.


(저자는 여러 번 봤을수도 있겠다. 보통 한 저자 책을 찾아서 보는 편이니까...)


사람도 첫 만남에 모든 걸 알지 못하는 것처럼


책도 그렇다.


'다시' 만나는 것처럼 '다시 읽는 것.


첫 만남과는 또 다른 만남. 그걸 '색다른' 만남이라고들 하더라.


'다시' 그리고 '색다른' 만남을 씁니다.


ㅁ Re: ading(다시 읽다.) ㅁ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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