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 / 유은실 지음 / 2014년 11월 28일 발행
"그리고 너처럼 씩씩하게 선지를 받으러 갈 수 있으면 좋겠어."
거짓말 같았다. 선지라면 냄새도 못 맡는 언니가 선짓국 귀신인 나를 부러워하다니! 선지를 받으러 도살장에 가고 싶다니!
"나는 니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나도 그러니까 사, 사실은 나도 가기 싫어. 그, 그러니까..... 도살장 냄새 싫어."
"하기 싫어도 너는 해내잖아. 그래서 대단해."
"아."
싫어도 하는 게 대단한 거라면 나는 대단한 게 맞았다. 한 번도 선지를 사러 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수원아,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별로 대단하지 않아. 내가 지금 여기 숨어 있는 것처럼."
"......"
언니의 말을 다 이해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언니가 아주 귀한 얘기를 내게 마음을 담아 털어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변두리 156-157쪽 中)
"낡은 부엌살림, 선짓국 끓이는 냄새, 화장실에 가는 것.... 담 없는 이 집에선 숨길 수 없는 게 너무 많았다." 소녀 수원은 그렇게 변두리를 자각한다. 1985년 서울 변두리 동네 황룡동, 소녀는 원피스를 입고 케이크를 먹는 대신, 도살장 옆에서 선짓국과 소 간을 받아먹고 자란다. 몸집이 크고 말을 더듬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 수원. 아빠는 자주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한다. 술에 취해 남의 집 팬티를 훔치기도 하고, 동네 하천에 넘어져 똥을 지리고 크게 다치기도 한다. 늘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엄마의 목소리 역시 자주 담장을 넘는다. 이 '변두리'에서 수원은 자신의 이름처럼 '동구밖 과수원길'을, 대도시 '수원'을 상상한다.
변두리의 삶의 남루함은 눈에 보일만치 명백하다. 소풍 날 싸가야 할 김밥의 밥마저 가늘고 누리끼리하고, 들통에 선지를 받아오다 건널목에서 미끄러져 피범벅이 되어 돌아온다. 아카시아 나무 뿌리처럼 가늘게 금이 간 벽은 또, 누런 뻐드렁니와 충혈된 눈은 또. 이야기는 이 풍경들을 정밀하게 들여다보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비감도, 동정도, 위안도 없이. 그저 정확하게 바라볼 뿐이다.
도살장은 백정들의 공간이다. 아빠는 어린 동생 수길에게 도살장 너머에는 초원이 있어 소들이 뛰놀고, 죽을 때가 된 소들이 초원으로 실려오면 카우보이들은 그 소를 향해 묵념을 하고 고기로 파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백정과 카우보이 사이, 소녀 수원은 어린 동생이 진실을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동생은 모르길 바라는 사려 깊음에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성장이라는 것은 '나'를, 나를 둘러싼 '세계'를 자각하는 일이다. 내 세계에 밴 비린내를 자각하게 하고, 고개를 숙이게 하고, 말을 더듬게 하는 고통스러운 성장의 과정을 소녀는 묵묵히 통과한다.
이 소설은 아주 귀한 것에 관해, 마음을 담아 털어놓는다. 자기 자신의 삶을, 그 변두리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태도'는 누구나 지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멀쩡한 이유정>,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유은실이 쓴 첫 청소년 소설. 청소년 소설로 묶여있지만, 청소년에게만 권하기엔 아쉬운 소설이다. 성장은 누구에게나 현재형이어야 하고, 누구에게나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은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변두리를 끝내 내 삶의 중심으로 인정하기까지의 여정. 수원의 씩씩한 성장을, 자기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변두리의 풍경을 정직하게 들여다본 작가의 움직임을 응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