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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체포하라 - 14인 사건을 통해 보는 18세기 파리의 의사소통망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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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다수가 믿고 따르는 의견, 즉 '여론'이 곧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그렇지만 결론부터 내리고 보면 이는 '틀렸다'. 과거에 빈번하게 자행되었던 마녀사냥이 이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이며, 불과 수년전 국내에서 벌어졌던 광우병 사태 역시도 이것과 맥을 함께한다. 물론 꼭 수입할 필요도 없는, 또한 큰 위험은 없지만 장기적으로 위협 요인이 될 수도 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30개월 이상, 그리고 특정위험물질(SRM)까지 수입하려는 것은 충분히 지적받고 시정 돼야 할 부분이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언급했듯이 당시의 광우병 논란은 필요 이상으로 확대되어 있었다. 또한 이는 실질적으로 30개월 이상 연령, 그리고 SRM 수입을 금지하기로 한 추가협상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당시의 시위는 폭력적으로, 그리고 반체제 성향을 띄어가기 시작했다.


무죄 추정 원칙은 본질적으로 '10명의 범인을 잡는 것 보다 1명의 무고한 사람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결국 이는 기본적으로 사회는 위험을 최소화 시키는 방향의 정책을 펴는 것이 옳다는 또 다른 예이기도 하다. 즉, 이전의 마녀사냥이나 수년전의 광우병 사태만 보더라도 다수의 의견을 정답이라 결정짓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며, 따라서 의견을 종합하고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일반 국민이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 충분한 정보를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에서는 유권자가 후보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접할 수 있어야 합리적인 후보를 선출할 수 있을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이는 다시 이야기하자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기본 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의사소통 망이 잘 꾸려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 '시인을 체포하라'는 18세기 당시 파리의 의사소통 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현학적인 표현을 떠나 간단하게 이를 살펴보면 '시'를 통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는 내용이다. 오늘날 의사소통을 혁신적으로 바꿔냈다는 SNS도 이와 크게 차이는 없다. 결국 누군가의 트윗에서 다른 이의 트윗으로, 누군가의 담벼락에서 다른 이의 담벼락으로 옮겨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혹자는 몇 명의 식자층이 다수의 대중을 향해 뿌리는 과거의 '시'와, 오늘날 일반 대중들이 다른 대중들을 향해 뿌리는 트윗은 분명 차이가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SNS도 결국은 몇 몇의 일반 식자층, 즉 수많은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는 소수의 트위터리안들에 의해 내용이 퍼져나가고 있는 사실은 자명하다. 트윗의 출발이 설령 식자층이 아니라고 하여도, 그 내용을 잘 뜯어보면 결국 식자층의 특정한 트윗의 변형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렇게 퍼져나간 여론을 우리는 수용해 나가야 하는가? 이렇게 여론이 퍼져나가는 동안, 이 내용을 접한 다수의 대중들은 그 이전에 해당 사안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근본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반대 측 정보 역시도 종합할 수 있어야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옮겨가는 과거의 '시', 그리고 오늘날 몇 자 되지 않는 '트윗'을 통해서 애초에 이런 다양한 정보를 옮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이야기다. 결국 이런 형태의 의사소통은 특정한 정보를 아래로 흘려보내거나 또는, 특정한 사안에 대한 결론을 다수에게 퍼뜨리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이러한 형태의 의사소통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는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이 어떤 사안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어야만 '그나마'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정보를 접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단순히 자신들을 대표할 다른 사람을 뽑아주는 것에 그칠 뿐이다.


결국 이렇게 의사소통 망이 확립되지 않은, 또는 불완전한 사회에서는 몇 몇의 계층이 다수의 대중을 손쉽게 조종하며 움직일 수 있게 된다. 특히 불완전한 의사소통 망이 사회의 정답처럼 굳어지게 되면 이러한 부작용은 더더욱 커지게 된다. 자신도 그러한 의사소통망의 위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 15세가 자신을 비방하는 시에 열을 내며 그들을 잡아들이려고 했던 것 아니겠는가. 누군가는 이를 SNS의 긍정적인 면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는 엄연한 부작용이다. 왜냐면, 반대로 루이 15세가 파리의 의사소통 망을 잘 이용했다면 당시에 14인 사건과 같은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이를 이용할 때 장점이 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단점이 된다면 이는 엄연한 '부작용'이다. 결국 다시 다수의 의견이 항상 정답이 아니라는 말로 돌아가게 되지만, 어쨌거나 의사소통망은 그래서 중요하고, 또 올바른 의사소통 망이 확립되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어떤 것이든지 간에 애매한 것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단테는 '지옥의 가장 암울한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사실 이러한 결론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다. 누가 봐도 정의로 보이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몸을 던진 과거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사 등이 그것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설령 그것이 진정한 정의이고 정답이라고 할지라도, 다수의 대중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은 채, 그리고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채 단편적인 사안들만을 대중들에게 전했다면 이는 엄연한 '선동'이다. 그들이 깃발 높여 싸우고자 하던 정의롭지 못한 대상들과 그들이 근본적으로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책 '시인을 체포하라'에서 보이고 있는 의사소통 망이나, 오늘날 '혁신'이라고 불리우는 정보사회에서의 의사소통 방식이 예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일이다. 의사소통망은 식자층이 누군가를 선동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다수의 대중이 여러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기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본인들이 정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들도 정의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에서 먼저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이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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