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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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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모 커뮤니티에서 빈부 격차와 소득, 계급 고착화에 대해서 논쟁이 오갔던 적이 있다. 많은 학자들도 이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는바 사실 논쟁의 주제도 되지 못하는데, 때문에 당시 논쟁은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용어의 정의 자체에 대한 토의가 주를 이뤘다. 다수 계층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있는 마당에 빈익빈이라는 용어는 부적절하다는 한 편의 주장과, 다른 한 편으로는 상대적인 부의 박탈감이 이전에 비해 커졌기 때문에 빈익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 계속 오갔는데, 서로 이해가 다른데서 출발한 논쟁의 끝이 개싸움과 진흙탕으로 귀결됨은 이미 예정된 결과이다 보니 그 논쟁이 어떻게 끝맺음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무방할 것이라 본다.


그러나 당시 논쟁에서 오가던 두 가지의 주요한 내용, 1. 과거에 비해서 삶의 질이 향상되었으며 2. 소득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 간의 소득차가 과거에 비해 매우 커졌다는 것은 모두 분명한 사실이다. 과거 사치품으로 분류되었던 매체들은 더 이상 상위 계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또한 1대 99로 불리는 월가 점령시위가 보여주듯이, 상위 계층이 한 사회의 부를 상당수 차지하고 있는 것 역시도 사실이다.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의 재산을 합친 금액보다 미국 하위 1억 2천만 명의 소득 총 합이 낮다는 통계 결과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부익부빈익빈이라는 말은 과연 오늘날에도 유효한 용어인가? 설령 빈익빈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반박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부익부'라는 사실에 관하여서는 반박의 여지가 없을 테다.


3분의 2에서 파레토로, 그리고 1대 99 사회로


가진 자가 더 많은 부를 창출하는 부익부 현상은 예전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최근에는 상위 20%가 전체 소득의 80%를 가져간다는 파레토의 법칙부터 이보다 더 나아간 1%의 소수 계층이 다수의 부를 차지한다는 1대 99사회까지로 그 격차가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이는 다분히 좌파의 시선에서 바라본 결과이겠지만, 최근의 미국 통계에 따르면 상위 1%의 계층이 사회 전체 소득 가운데 20% 가까이를 가져간다는 사실을 보았을 때,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의 사례만 보더라도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가운데 하나다. 그 만큼 전 세계적으로 소득의 계층화는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에 따라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은 점차 감소하는데 반해 인류의 숫자는 늘어나고 있는 역설적인 모습 속에 가장 큰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이 자신의 저서 노동의 종말에서도 '기술의 진보가 실업자를 양산할 것이다'라고 예측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것만으로 오늘날의 소득 격차를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 노동 현장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을 제외한 채 현재 근로중인 노동자의 평균 연봉과, CEO의 그것과 살펴보았을 때 과거의 수십 배에서 오늘날의 수백 배의 차이는 단순한 산업, 정보 혁명에 따른 결과라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에는 무엇이 있을까? 책 플루토크리트는 이에 대하여 베네치아의 사례를 제시한다.


유동성은 사회의 발전을 보장하지만 계급의 안정성을 보장하진 못한다


베네치아는 삶의 안정성을 담보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한 불모지였지만, 그들은 그렇게 선택한 불모지를 당대 최고의 무역 국가로써 발돋움 시키게 된다. 그런 그들의 사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느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무역을 시작할 수 있는 제도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회의 자본은 높은 유동성을 띄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반대로 특정 계층의 계급 고착화를 막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다. 아무리 부를 쌓아 올렸다고 하여도 지속적인 개혁과 도전이 없다면 언제라도 그들의 부는 새롭게 시장에 뛰어든 이들로부터 뺏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유동성은 그래서, 사회의 발전은 보장하지만 계급의 안정성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런 높은 유동성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승승장구 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또한 이러한 그들이 세력화되어, 어느 정도 소리를 낼 수 있는 수준의 단체로 성장하게 되면, 그들은 이전처럼 계속적인 경쟁을 거부한다. 그리고서는 그들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해자'를 요구하게 된다. 새로운 사람들이 해당 분야로 들어오는 데에 일정 수준의 방어벽을 형성하는 것이다. 오늘날 전문직을 갖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자격시험의 합격 인원 감축을 요구하는 것 역시도 해자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당대 베네치아의 그들이 요구하던 해자는 그보다 더욱 적극적 이여서, 그들은 이미 해당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 의외에 다른 사람의 유입을 원천적으로 방지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전에 그들 사회의 발전을 보장했던 그 제도 역시도, 더 이상은 시행하지 않기에 이른다.


독점적인 권한을 누릴 수 있었기에 그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지만, 반면에 그들 사회는 점점 병들어가기 시작했고, 한 때 유럽 전체의 무역을 담당하던 해상무역의 최고 국가에서 그들은 이제, 과거를 추억하며 사는 이들이 모여 만든 박물관, 그 이하의 것으로 격하되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 그들에게 찬란했던 과거의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계급의 안정성을 보장받기 위해 마련한 유동성의 제한이 결국은 그들 사회의 발전을 억압하고 나아가 그들이 누리던 부 마저 뺏어가기게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독점적인 권한을 누리기 시작한 이후 잠시 동안 더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며, 또한 그 과정 속에서 빈부격차 역시 커져나가는 방향으로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증가되는 빈부의 원인 역시도 바로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해자


해자는 성벽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되는 걸림돌이라고 보면 되는데, 경제적 해자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펫 도시의 '경제적 해자'라는 책을 읽어보면 좋다. 그런 내용은 차치하고, 책 플루토크라트에서도 해자라는 용어가 자주 언급되는데, 이 때 사용되는 해자는 상위계층이 자신들의 바운더리를 사수하기 위해 그들만의 세계를 사수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방법들을 총칭한다고 보면 되겠다. 앞서 언급한 자격시험이 바로 이러한 해자의 전형적인 모습인데,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해자를 그런 수준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책에서 언급되는 해자는 이러한 물리적인 방어벽뿐만 아니라 상위계층이 기존의 지역이나 직장에 따른 공동체를 구성했던 데에 반해 오늘날은 상위계층끼리만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에서 오는 벽 역시도 해자의 일종으로 그려내고 있다. 즉 물질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박탈 역시도 해자의 일부분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해자가 가져오는 사회 통합의 저해는 실로 상당하다. 그리고 이러한 해자는 앞서 언급한 베네치아와 같은 모습을 보여 오는데, 마찬가지로 그들만의 이너 서클을 지키기 위해서 그와 같은 방어벽을 만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계급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상위계층들의 이러한 이너 서클을 통해 은연중에 계급의 전형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역시도 다분히 좌파의 시각에서 바라본 평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보다 커져가는 빈부격차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나은 해답은 없어 보인다. 또한 가끔씩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대기업 임원들의 만행들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나은 것도 없을 것이다. 책 플루토크라트를 읽어본다면 이 주장에 대해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플루토크라트 : 보호를 위한 해자, 고립시키는 해자


예전의 경우 역설적이게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와의 이념 전쟁이 자본주의의 이러한 문제점을 보다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플루토크라트가 다수의 노동자 계층과 보다 가깝게 지낼 수 있었으나, 레이건과 대처 이후 불어온 신자유주의 열풍이 이러한 현실을 오늘날의 그것으로 변화시켜 왔고, 이러한 흐름 가운데에 오늘날 1대 99로 불리는 현상 역시도 태동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자가 결국 그들을 몰락시키는 전형이 될 것임은 베네치아의 사례에서 충분히 보이고 있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유동성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유동성은 자신들의 안정적인 지위를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회는 분명 몰락하게 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도 쇠퇴 일로에 서있을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책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100가구가 사는 한 마을에, 99가구가 평범하거나 또는 그 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매우 잘 사는 한 가구가 그 마을 속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말을 통해서 이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책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대안이나 해답을 제안하지는 못하고 단순히 이러한 현상들을 그려내는 데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해답을 찾기 위해서 현실을 보다 자세히 아는 것은 중요 할 테고, 따라서 책 플루토크라트는 그런 측면에서 가치를 갖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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