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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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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블로그로 대표되는 대안언론들이 많아지면서, 기존의 신문사나 방송사 등 대형 언론사들의 영향력이 많이 축소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정치, 사회학과 같은 내용을 전공하지 않은 비전공자들이 그와 관련한 내용들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내는것은 한편으로는 우려할 만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론 엘리트주의에 빠져서 이러한 대안언론들을 마냥 무시하는 것 또한 바람직 하지는 않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아무리 기존의 언론사를 대체할만한 새로운 매체들이 나온다고 하여도 기존의 언론사들이 가지고 있는 그 영향력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발품팔아 기사를 쓰는 블로거라고 한들, 오랜 기간동안 취재만을 해오며 쌓은 내공을 따라잡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더군다나 비전공자가 쓰는 글의 수준에서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오늘날 대안언론들은 주류언론들이 취재해 온 내용들을 토대로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는 정도에만 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사회든지 간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또는 조직에게는 수준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게 되기 마련이다. 마오쩌뚱의 아들 이야기는 6.25 전쟁사에서 익히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며, 2차 세계대전 당시 명문가 자제들만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의 학생들 중 2천여명이 전쟁에서 사망한것 역시도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다. 흔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불리우는 이러한 것들은 고위층의 인사들에게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함으로써 계급간의 갈등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해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도 그럴것이 고위층의 언행들은 결국 사회의 모범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컨데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는것처럼, 그 사회의 고위층들이 어떤 태도로 사회를 살아가느냐는 결국 그 사회의 모습으로 바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언론이라고 해서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날리 만무하다.
사실 언론은 그러한 기준에서 벗어날리 만무한 수준이 아니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위층들에게 요구하는 도덕보다 더 높은 수준의 가치가 요구되어진다. 소위 '총보다 펜이 더 무섭다'라는 말은, 총은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한 사람만을 조종할 수 있는 반면에 펜은 불특정 다수의 여론을 순식간에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마찬가지로 언론은 자신들의 펜을 통해서 그들이 속해있는 사회의 여론을 한 방향으로 몰고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결국은 사회속에서 진정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세력은 어떻게 보면 언론이라는 결론을 내려볼 수 있다. 수 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을 막아낸것도 결국은 여론의 힘이였다는 점을 상기시켜본다면, 대중의 힘이라는 것은 그들이 하나의 의견으로 단결할 경우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언론이 가지고 있는 힘이 무시무시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언론에는 왜 그렇게 강한 힘이 있는것일까. 이는 언론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사회를 상상해보면 간단하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 옛날에도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의 갈등이야 꾸준히 있어왔던 일이지만, 대개 그 옛날의 경우 지배층에 의한 힘의 논리로 인해 피지배층의 일방적인 패배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중은 하나의 의견으로 뭉친다면 강력한 힘을 발휘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대중은 그저 각개격파를 통해 무너뜨릴 수 있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언론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는 지배층으로 부터 학대당하던 피지배층을 그와 비슷한 수준까지로 높혀줄 수 있는 '신의 한 수'였다. 즉, 이전의 사회 구성원들은 지배층의 도덕성에 전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맡길 수 밖에 없었던것에 반해, 언론이 등장하고 나서부터는 지배층을 견제할 수 있는 도구가 생겼다는 의미다. 결국 언론은 대중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함으로써 지배층을 견제할 수 있었고, 이는 언론이 가지고 있는 힘의 근원은 대중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언론이 지배층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진단한다면 언론 스스로가 지배층의 발 아래로 기어 들어간것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수도 있겠다. 말이야 언론이 지배층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체감할 수 있는 힘은 없었기 때문에 권력욕에 가득찬 그들이 지배층의 기대에 영합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테고, 이는 지배층으로써도 손해볼것은 없는 장사였다. 눈에 가시같은 언론만 통제할 수 있다면 문제될것이 없을테니 말이다. 이러한 사례는 오늘날의 이탈리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옛날 우리 역사의 암흑기인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횡행했다. 다만 후자의 경우 우리가 느끼는 그 충격은 아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언론의 역사 가운데 하나인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의 전말을 접하고 나면, 그 누구라도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을것이다.
물론 시장의 기대에 영합하는 언론시장주의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도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뭐든지 간에 돈이 있어야 풀칠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현명한 군주가 시민들을 결속시키고 계속적으로 충성을 바치게 할 수 있다면, 잔인하다는 평판을 듣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지나친 자비를 베풀어 무질서를 낳아 살인과 약탈이 자행되도록 하는 군주 보다 소수의 몇 사람에게 가혹 행위를 함으로써 기강을 바로잡는 군주가 사실상 훨씬 더 자비롭기 때문이다.'라고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말했던 것처럼, 일단은 돈이 있어야지 사람들을 모으고, 그리고 지배층을 견제하던지 말던지 할 수 있다는 반박은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도 학생들에게 항상 이야기 하지 않는가? 억울하면 공부해서 성공하고, 그 다음 세상을 바꿔보라고.
문제는 기본적으로 권력이나 돈은 마약과 같다는 것이다. 설령 그 위험성을 인지한다고 한들 이미 끊기에는 너무 많은 걸음을 와버린 경우가 많다. 그래도 그나마 그 사실을 자각한 경우는 낫다. 최소한의 희망이라도 그 곳에는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책 '폭력의 자유'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만 대개의 이런 형태의 서적들이 그러하듯이, 대체적으로 보수 주류 언론들을 비판하는 구도로만 쓰여지고, 또한 진보 주류 언론들을 그 해답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이 책도 피해가지는 못했다. 물론 보수 주류 언론들이 권력층과 영합하는 모습을 더 보여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진보 주류 언론들도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일까. 책에서는 '진보 언론의 보수 언론 따라하기'라는 내용을 언급은 하고 있다. 그렇지만 큰 비중은 없다.
책 폭력의 자유는 바람직한 언론의 모습을 '가난하고 소외단 자들의 벗'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꼭 그것을 목적으로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애초에 언론이 이러한 목적을 갖게 되면 여기에서 또 다른 권력으로의 영합이 이뤄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소위 진보 주류 언론이라고 불리는 한겨례나 경항 신문만 보더라도 이러한 현상은 분명하게 나타난다. 물론 그들이 추구하는 '민중의 벗'이라는 가치에 대해서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그러한 이유로 인해 특정 정당의 입맛에 맞는 기사들이 많음은 분명하다. (이는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주류 언론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애초에 언론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겠다는 태도를 견지해야지, 그곳에 언론인으로써의 개인적이 감상이 덧붙여져서는 안된다고 본다. 그렇게 있는 사실을, 그리고 다양한 계층의 모습들을 보이는 그대로만 전달할 수 있다면, 자연스레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의 벗이 될 수 있을것이다. 굳이 그런 가치를 추구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