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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적과 싸우라

공포와 싸우라.
공포는 모든 행동을 제약할 뿐이다.

탐욕과 싸우라.
탐욕은 생산이 중단케 되어 목표를 이룰 수 없고
또 이루어도 모래 위에 집짓는 것과 같다.

고지식과 싸우라.
고지식은 자기 생각 외에 아무것도 용납을 못한다.

혈기와 싸우라.
의로운 분노는 필요하나
혈기는 아름다운 인생에 오점을 남길 뿐이다.

미움과 싸우라.
미움은 생각을 삐뚤게 하고 건설적 사고를 차단한다.

질투와 싸우라.
질투는 끝없는 미움의 끝이며
질투하는 시간은 창조정신이 중단된다.

거짓말과 싸우라.
거짓말은 넓은 영역을 스스로 구속시키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무정함과 싸우라.
정이 없는 사람은 잎이 없는 나무와 같다.
메마른 영혼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할 수 없다.

복수심과 싸우라.
원수를 직접 갚지 말고 자신의 승리로 갚으라.
복수심은 또 다른 복수를 낳게 된다. - 소 천 -

세상은 움켜잡거나 이기기 위해 싸우지만 제자들인 우리는 그 반대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고후10:3~)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전6 : 12)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11)

  "It is sad not to be loved, but it is much sadder not to be able to love"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슬프다,  그러나 사랑할 줄 모르는 것은 더욱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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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참 바보처럼 살다 가셨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었는데도
그는 바보처럼 좋은 옷 대신에 소매가 닳아빠진 옷을 입었고
멋진 차 대신에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곤 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교회를 대물림 해주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사랑하는 외아들을 먼 외국으로 쫓아내다시피 했습니다.



    새까만 후배목사들이 통일운동에 앞장선다면서
    북녘땅을 제집 드나들 듯 마음대로 들락날락 거릴 때도
    그는 참 바보처럼 ‘저 많은 실향민들이 고향엘 가지 못하는데
    어찌 나 혼자만 가겠는가’ 하면서
    그리운 고향 땅을 한번도 밟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자후 같은 명설교도, 가슴을 쥐어뜯게 하는
    감동적인 웅변도 할 줄 몰랐던 그는
    그저 바보처럼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손과 발로
    그리고 자신의 삶으로 설교하고 선포했을 뿐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입이 아니라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발을 가졌던
    이 바보같은 목사님의 이름은 한경직입니다.”
    위의 인용글은 지난 2000년 4월 19일에 돌아가신
    한경직 목사님의 빈소에 올려진 글의 한 대목입니다.


    사도 바울은 천막짓는 일을 하며 자비량 선교를 했습니다.
    20여년에 걸친 전도여행 중에  수없이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지만
    바울은 편안한 선교를 거절하고
    자기 손으로 일하며 선교하는 고난의 길을 택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피땀으로 세워진 교회로부터
    보수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복음에 장애가 될 것을 염려하여 보수를 거절하고
    끝까지 자비량 선교를 고집했습니다(고전9장).
    그는 참 바보처럼 돈을 거절한 사람이었습니다.
    ‘검소’라는 단어를 그에게 붙이기 부끄러울 정도로
    그는 내핍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바울은 풍부와 궁핍에 처하는
    일체의 비결을 터득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빌4:12).

이상은 김형근님의 글이었습니다

    저는 사도바울과 한경직 목사와 같은 사람들과,
    오늘날 한국교회의 여러 교계 지도자들을 비교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걸었던  좁은 길을 그들도 가고 있을까?
    자기를 부인하고, 이름도 빛도 없이 매일 죽어야 갈 수 있는
    험난한 십자가의 길을..그들도 걸어가고 있을까요? 


    세습이라는 말은! 절대권력이나 큰 부와 명예를 가졌을 때
    비로소 나올 수 있는 단어입니다. 나눔을 실천했어야 할 자들이
    부와 명예와 권세를 두 손에 움켜쥔 채, 자기배를 불리다가
    그것도 모자라, 자식에게 부귀영광을 세습하는 모습을 봅니다.
    소자의 발을 씻기고, 가난한 자들과 나누고,약자를 돌보는 대신
    가난한 자와 약자를 이용하고, 양들 위에 섯노라며
    하나님의 권위를 업고,큰소리치는 모습을 더 많이 봅니다.


    사람에게 맹종하며, 보이는(금송아지)우상처럼 떠 받들거나
    작은 교황들이 되게 도우며,독재에 방조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진리의 성령은, 거짓과 왜곡,부패와 타락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왜곡된 복음에 현혹되고 있는 영혼들을 안타까워 하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말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여, 지혜롭게 선악을 분별하고
    주님과 제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살아 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우리는 할수없다. 
    하지만 우리 없이 하나님은 일하지 않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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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하나님이 만드신 하와를 처음 봤을 때
'예쁘다'라거나 '밉다'라는 판단을 하지 않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기 전 인간에게는
'좋다 나쁘다'라거나 '예쁘다 밉다'라는 판단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실 인간의 외형은 그냥 생김새일 뿐입니다.
그런데 생김새의 차이를 가지고
'잘생겼다 못생겼다'라는 차별을 두고
잘생긴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사람의 외형에까지 선악개념으로
판단하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선악개념의 기준은 자기 자신입니다.
즉, 자기 자신의 가치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선한 것으로 여기고.. 별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자신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대상에 대해서는
거부하고 싫어하는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가 예쁜 여자를 사랑하고자 하고
여자가 잘생긴 남자를 사랑하고자 하는것도
이러한 선악개념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잘 생기고 예쁜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감정이며.. 감정에 따라 흐를 뿐입니다.
그런데 왜 꼭 인간의 감정이
예쁜 여자를 향해 움직이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감정 자체에까지
악이 스며들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 악은..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자가 예쁜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남자라고 하는 자신의 가치가 향상됩니다.
여자가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하는 것 역시
그 남자로 인하여 자신의 가치가 향상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아름다운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사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이기주의의 한 모습일 뿐입니다.

사랑을 통하여 자기만족을 꾀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는 말도 하지만
설사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 할찌라도
결국은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자기만족을 삼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사랑과 비교하면
예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그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날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못생긴 날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무식한 날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둔하고 게으른 날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추하고 더러운 날 사랑하십니다.
못나고 더러운 나를 사랑하시는
우리 주 예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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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가면 세가지 놀란다고 합니다.


첫번째는 당연히 천국에 갈꺼라고 믿었던 유명한 사람이 없다는 것


두번째는 오지 않을꺼라고 믿었던 사람이 와 있다는 것


세번째는 내가 천국에 왔다는 사실...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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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경험이다 ㅡ 김남준 목사

기독교 신앙은 사람을 고치는 힘이 있습니다.
신앙은 한 사람의 삶의 태도를 바꾸게 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의 본질까지 고치는 힘이 있습니다.
황폐한 마음, 망가진 인생을 고치시기 위하여 다가오시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사랑 앞에서 마음이 녹아 내리는 참회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주님과의 영생하는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주님과의 풍성한 사귐의 비밀이 없는 사람들은 말은 많아도 인격이 천박합니다.
사랑의 비밀이 없는 사람들은 능란하며 심오한 설교를 할지라도
그 사랑의 힘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실어다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 그 순전한 사귐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비밀을 가진 사람들은 그 은혜의 샘물에 깊이 잠겼던 사람들입니다.
그의 말은 주님에 대한 진실한 증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을 직접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진하고 깊은 사귐 속에서
신령한 은혜의 물에 잠겼던 사람들은 분명히 다릅니다.
은혜의 동산을 거닐었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체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님 사랑의 체험은 말과 글과 삶 속에 숨길 수 없이 묻어 납니다.

몇 해전 여름철이었습니다.
부산에 있는 어느 한적한 기도원에서
어느 신학교 학생들의 수련회에서 설교해 주도록 청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기도원에 들어간 그 다음날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거기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가련한 나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말씀하시는 주님과
그 황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더 없는 친밀함을 느꼈습니다.
갑자기 내가 아주 작은 존재가 되어
그분의 임재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과 만남으로
함께 누리는 거룩한 사랑의 사귐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함에 있어서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그때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주고도 그런 사귐 속에서 영원히 지내고 싶었습니다.
눈물과 거룩한 환희로 가득한 그런 세계에서
주님과 교제하던 마음으로 거룩한 세상에서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요.

우리는  더 깊은 은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더 깊은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경험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상처주기 보다는 상처받게 하소서
우리가 타인에게 상처주지 않기를 소원하는 이유는
우리 주님께서 바로 거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께서.. 내 모든 언행심사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말씀대로 순종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희생할때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시고 상 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생명 주셔서... 피빛 절규로 우리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깊고도 진실하신  그 사랑이 지금도..
우리의  가슴속으로 막힘없이 흘러들어 올 수 있기를 원합니다.
거룩하신 그분의 능력과 그 완전하신 사랑이
내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안에 각종 더러운 것과, 장애물을 발견하도록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단호히 제거하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황무지와 같은 우리 마음이..사랑으로 꽃피게 하옵소서.


ㅡ예수 그리스도의 향기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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