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
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모모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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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조 미키히코, 양윤옥 역, [백광], 모모, 2022.

Renjo Mikihiko, [HAKKO], 2002. 2008.

하나의 사건을 두고 보는 시각에 따라 저마다의 견해가 있고, 또 여기에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경우에는 방어기제를 펼치며 나름의 입장을 취한다. 한여름 대낮에 일어난 참사는 인간의 본성을 여실히 드러내는데, 여느 막장 드라마로 여기기에는 수려한 문체가 매혹적이다. 평온한(?) 가정에서 일어난 4살 여자아이의 실종과 죽음... 연관된 사람들은 하나씩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반전의 반전이 거듭된다는 말조차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처음으로 만난 렌조 미키히코의 소설 [백광]... 白光이다.

일흔이 되고 처음 한동안은 죽음이 주춤주춤 다가와 해가 갈수록 성가신 물건처럼 자꾸 들러붙는다 했더니만 최근 일이 년 사이에는 또 다른 나 자신이나 친한 친구처럼 내 몸속에 들어앉아 아예 일상이 되어 버렸다.(p.8)

하루하루 몸이 쇠약해져 가는 것에 반비례해서 요즘은 추억만 하루하루 젊어져 간다.

하지만 그 추억도 이제 슬슬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다. 날마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옛날 일을 이래저래 곱씹었으나 이제는 그 추억의 재료도 떨어진 모양이다. 아직 재료가 고갈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과거뿐이다. 만세 소리와 아내의 미소로 배웅을 받으며 죽음의 길을 떠났던 전쟁 통의 그날 밤, 그리고 천신만고의 항해 끝에 도착한 남태평양의 섬, 허연 불꽃처럼 작열하는 태양 빛이 내리쬐는, 새파란 바다에 둥실 떠오른 듯한 원색의 섬. 그 두 가지는 몇 번을 떠올려도 처음과 똑같이 선명하게 내 머리와 몸을 온통 점령한다.(p.14-15)

이제는 죽음의 기운이 일상처럼 느껴지는 나이, 노인성 치매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게이조는 젊은 시절 태평양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다. 과거 전쟁터로 끌려가는 기차역에 마중 나온 아내와 딸 그리고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일어난 사건... 정신은 희미하나 두 가지 일은 잊히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때의 상흔은 여전히 남아 노인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게다가 태풍 전의 고요함이라고 할까, 아침 일찍 만들어둔 샌드위치로 나오코까지 넷이 식탁에 앉아 점심을 먹을 때쯤부터 신선한 바람이 불어서 집 안은 안온한 정적에 감싸였다. 시아버지도 조용해졌고 사토코도 묘하게 곤두섰던 신경이 풀려서 이번 여름 들어 처음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마음이 편안하기까지 했다.(p.28)

하지만 반드시 그것만으로 한 소녀의 운명이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사토코는 혹시 나오코가 집에 있기 싫다고 말했다면 함께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오코는 할아버지하고 집에 있을래?"라고 물었는데 나오코가 고개를 까닥거리는 인형처럼 천진하게 그러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제 엄마가 두고 간 꽃무늬 가방에서 스케치북과 크레용을 꺼내더니 방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토코가 "집에 있을래?"라고 물은 뒤부터 그림을 그리기까지 삼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네 살짜리 어린아이의 너무도 재빠른 반응에 내심 놀라서, 제 엄마한테 집 보고 있으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법을 아예 꿰고 있구나, 하는 짠한 마음이 들었다.(p.29)

등장하는 인물은...

게이조와 두 번째 부인 아키요. 첫 번째 부인과 딸은 전쟁 때 공습으로 죽고, 아키요도 몇 년 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아들 류스케와 며느리 사토코. 둘 사이에는 딸 가요가 있다.

사토코의 동생 유키코와 남편 다케히코. 둘 사이에는 딸 나오코가 있다.

그리고 대학생 히라타 나오키.

여름날, 나오코가 사라진다. 한순간 사건 현장이 되어버린 집안... 아이 엄마 유키코는 문화센터 강의를 들으려고 나오코를 언니 집에 잠시 맡긴다. 사토코는 딸 가요를 치과에 데려가야 해서 나오코를 시아버지에게 부탁했다. 게이조는 치매로 정신이 없고, 남편들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여덟 명의 자기 고백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 다르게 제각각 속 사정이 있다. 그 시간에 아이 엄마는 문화센터에서 만난 대학생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고, 아이 아빠는 불륜 현장을 뒤쫓고 있었다...

맨 처음에 2시 41분이라는 시간에 대해 말했었지만, 그건 육 년 전 어느 날, 한 남자가... 미타카 역 플랫폼을 통과하는 열차에... 신혼 초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함께 타고 있던 열차에, 바로 내가 몸을 던지려고 했던 시간입니다.(p.57)

"나오코는 죽어서 다시 내 몸속에 들어왔어.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죽는다는 건 태어나지 않은 거래. 그 아이는 앞으로 내 핏속에서 계속 살아가고 나는 점점 더 그 애를 닮아 갈 거야."(p.88)

우리는 각자 서로 다른 이유에서 그날 죄 없는 나오코를 죽였다... 서로 상대가 공범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그리고 부부로서는 손을 맞잡지 못했지만 그 아이를 죽인 범죄자로서는 손발이 잘 맞는 공범이 되어서. 여태껏 없었던 다정함을 느끼며 지금 이렇게 손을 맞잡고 있다...(p.216)

이 집은 배신과 보복의 전쟁터였다.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채 영원한 싸움을 반복하는 전쟁터...(p.245)

자매(형제)는 태어날 때부터 경쟁자인가? 부모의 사랑을, 관심을, 인정을, 재산을 더 받으려고... 서로 가진 것을 탐하고, 시기하는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현명하고 착한 언니, 언제나 화려하고 시선을 끄는 동생... 자매의 보이지 않는 전쟁은 결국 한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저마다의 이유... 너무 예뻐서, 돌보기 귀찮아서, 내 아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라서, 죄의 결정체라서... 모두가 공범으로 관여하고 있다.

나오코는 자기의 죽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전쟁의 상흔, 이기심과 욕망으로 인한 가족의 파괴와 해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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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도망자의 고백
야쿠마루 가쿠 지음, 이정민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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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마루 가쿠, 이정민 역, [어느 도망자의 고백], 소이미디어, 2022.

Yakumaru Gaku, [KOKKAI], 2020.

죄의식과 진정한 속죄에 관해서... 일본의 소년범죄를 다루며 꾸준히 글을 쓴 작가는, 최근에는 범죄와 형벌 이후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글을 쓴다. 늘 그렇듯이 다양한 의견과 논쟁이 뒤따르지만,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작가 정신에 찬사를 보낸다. 야쿠마루 가쿠의 소설 [어느 도망자의 고백]은 음주 운전으로 인한 사망사고와 노인성 치매를 소재로 하여 또 한 번 현실의 문제를 마주한다.

술을 마신 상태로 운전해서 사람을 치어 죽이고 달아났다. 붙잡히면 상당한 중죄로 다스려질 것이다.

수년간 교도소에 갇히고, 사회에 나온 뒤에도 사람들에게 범죄자라는 뒷손가락질을 받고 평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내 인생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뿐만이 아니다. 부모님과 누나도 범죄자 가족으로서 떳떳하지 못한 삶을 강요받게 된다.(p.37)

마가키 쇼타는 여자 친구의 메시지를 받고, 한밤중에 빗길에서 음주 상태로 운전하다가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치고 도망간다. 다음날 뉴스 보도로는 피해자는 80대 여성으로 200m를 끌려가서 사망했다고 한다. 되돌리고 싶은 상황이다. 노리와 후미히사는 인플루엔자로 고열에 시달렸는데, 아내는 새벽에 편의점으로 얼음을 사러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가해자는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피해자는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아야카와 사야마 일행은 내가 체포된 것을 알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교도소에 수감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교도소는 도대체 어떤 장소이고 그곳에서 얼마나 갇혀 지내야 할까. 출소한 뒤 나는 어떤 모습일까.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거나 또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거나 결혼할 수 있을까. 장차 아이를 가질 수는 있을까. 그러고 보니 누나는 예정대로 신이치 씨와 결혼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변함없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출소하면 다시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을까.(p.66-67)

몸을 가늘게 떠는 마가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사키는 그 눈물의 이유를 상상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에 대한 뉘우침의 눈물일까. 아니면 자기 앞길이 막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오는 눈물일까.(p.107-108)

곧바로 이어진 경찰 수사는 용의자를 특정하고, 쇼타를 체포한다. 유치장에 갇힌 범죄자의 심리는... 치인 게 사람인 줄 몰랐다고, 신호등은 차량 진입 신호였다고 하며 과실을 주장한다. 피해자 가족에게 사과의 편지를 쓰지만 거절당한다. 인터넷에서 악성 댓글과 비난이 난무하고, 가족의 신상 털기가 이루어진다. 가족을 잃은 피해자의 심리는... 이것은 누가 봐도 살인이다. 예상치 못한 이별과 상실의 아픔은 깊은 절망과 원한으로 마음에 사무친다.

법정에서 피고인이 흘리는 눈물은 사죄와 뉘우침의 눈물일까? 아니면 막막한 자기 처지에 비관한 눈물일까? 현실의 문제이고, 논란의 쟁점이다. 마가키 쇼타는 징역 4년 10개월의 형벌을 받는다.

'해야 할 일이 있다.'

마가키 쇼타의 판결이 나온 날에 나고야에 가자고 권했더니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며 거절했다.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지만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 말이 마음에 걸린다.(p.146)

여느 일본 미스터리하고는 다르게 범죄의 수사나 재판의 과정보다 그 이후에 중점을 둔다. 세월은 흘러 마가키 쇼타는 만기 출소한다. 교육평론가였던 아버지는 일을 그만두고, 어머니와 이혼했다. 누나의 결혼은 파혼으로 끝났다. 전과자라는 낙인과 주위의 시선으로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일용직으로 산다. 그 사이 친구들과는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생겼고... 결국 어울릴 수 있는 건 같은 신세의 전과자들뿐이다. 하루아침에 아내를 잃은 노리와 후미히사는 사설탐정을 고용해 마가키 쇼타를 조사한다. 90에 가까운 노인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다짐하지만, 고령으로 기억력과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있다.

"앞으로 만날 일이 없을 테니 지금 말할게. 우리 가족은 너 때문에 불행해졌어. 그런데 가장 불행한 건 우리도, 더욱이 너도 아니야."(p.225)

저쪽에 가면 더 편해지지 않을까.

자신이 저지른 죄를 반성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하는 편이 훨씬 살기 편할지도 모른다.(p.295-296)

젊은 날 실수라고 하기에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고, 그 대가는 아주 혹독하다. 그날 이후 피해자는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에 시달린다. 그렇다면 범죄자는...? 불행은 당사자만 아니라 가족 전체로 확산하고, 어쩌면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남은 평생 속죄하며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범죄 소굴로 들어갈 것인지... 살기가 녹록지 않다. 속죄와 용서, 인간성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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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용을 보여 주는 거울 - 첫사랑을 위한 테라피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15
마르탱 파주 지음, 배형은 옮김 / 내인생의책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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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탱 파주, 배형은 역, [숨은 용을 보여주는 거울], 내인생의책, 2013.

Martin Page, [TRAITE SUR LES MIROIRS POUR FAIRE APPARAITRE LES DRAGONS], 2009.

살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어서 크게 고민한 때가 있었다. 5년 전 엄마의 죽음으로 심리 치료 상담을 해야 하고, 아침에는 기르던 개가 죽었다. 의사인 아버지는 정신이 나갔는지 잠옷 차림으로 진료를 하고, 무엇보다 첫사랑의 실연은 열네 살 소년의 마음을 괴롭힌다. 마르탱에게 몰아친 상실의 아픔이다. 지금은 첫사랑이 언제? 누구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나이에 첫사랑을 위한 테라피... 마르탱 파주의 [숨은 용을 보여주는 거울]을 읽었다.

[숨은 용을 보여주는 거울에 대하여]는 다니엘 아리스가 [회화의 역사]에서 인용한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학자 파올로 토스카넬리가 쓴 신비서의 제목이다...(p.4)

책을 읽을 때마다 제목에 집중한다. 작가는 조금 특이한 제목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솔직히 그 의미를 모르겠다. 이탈리아의 어느 신비서에서 인용했다는 것, 아름다우나 제대로 해석하기 어렵다는 것, 용과 거울은 등장하지 않고 은유적 표현이라는 것... 우울한 위트가 넘치는 짧은 소설이다.

마리가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 애에 대해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마리의 머리칼은 다른 여자애들의 머리와는 조금 다르다. 그 애의 몸짓은 조금 느리거나 조금 빠르다. 고양이 눈을 가진 마리에겐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어도 절대 그 속에 섞여 들지 않는다.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한 방울의 피처럼 주위로부터 도드라져 보인다. 마리가 나타나면 온 세상이 한발 뒤로 물러서는 것처럼 보인다. 나무의 초록빛이 가시고 하늘의 푸른빛은 바래며 비도 촉촉함을 잃는다. 마리는 특별한 동시에 자연스럽기 그지없다.(p.15)

주인공 마르탱은 작가의 이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경험을 기록한 자전적인 소설은 아니라고 한다. 전부 상상이고, 단지 그 시절의 감정이라고 한다. 아무튼, 마르탱의 삶에 고양이 눈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 마리가 들어온다. 같은 반, 함께 있는 순간순간이 소중하다. 도서관에서 마리가 먼저 사귀자는 말을 한다. 가장 듣고 싶은 말이지만, 당황과 충격... 서투른 사랑은 60분을 넘기지 못한다.

"있잖아, 우리는 아무래도 친한 친구로 지내는 게 더 나은 것 같아."

테이블 위에 펼쳐진 책 속의 원자 폭탄이 하나하나 차례로 터지며 나를 가루로 만들었다. 내가 말했다.

"아."

마리는 가 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다. 이것이 내 첫 번째 러브 스토리다. 이게 마지막이면 좋으련만.(p.19-20)

(나도 제일 듣기 싫었던 말...) 친한 친구로 지내는 게 더 나은 것 같아... 마리는 60분 만에 사랑 고백을 철회하고 떠나간다. 마르탱의 이별, 아픔, 위로와 성장에 관해서이다.

우리 개는 활기차고 충직했으며 행복한 삶을 누렸다. 오늘 아침 개가 죽은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서 눈물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개 때문만이 아니라 사라져 버린 마리의 사랑 때문에, 엄마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 때문에, 썩어가는 이 집 때문에, 살짝 제정신이 아닌 아빠와 쉽지 않은 게 분명한 미래 때문에.(p.28)

"내가 나비라면 마리와 사귄 시간이 진짜 멋졌을 텐데."

나는 펄럭펄럭 날갯짓을 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역시나 내 개그는 실패였다.

내가 노렸던 포인트를 바카리가 이해하고 다른 애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나비의 수명은 종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몇 시간에서 며칠 정도야. 그러니까 만약 마르탱이 나비였다면 마리와 사귄 시간은 정상 범위에 들어갈 거라는 얘기지."(p.49)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떠돌아다녔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라진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자주 궁금해하곤 했다. 엄마는 돌아가셨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엄마는 언제나 나를 지켜 준다. 엄마는 늘 곁에 있다. 엄마가 살아 있다면, 이렇게 말했을 텐데 라든가 이렇게 했을 텐데 하는 것들이 나에게 용기를 준다. 하지만 엄마의 자리가 비어 있는 건 사실이다. 그 빈자리는 절대 사라지지 않고 나와 함께할 것이다.

마리가 내 인생에서 사라진 일은 좀 다르다. 마리가 남긴 빈자리는 계속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사라짐, 사라지고 말 사라짐이니까. 몇 주, 몇 달 뒤면 내 사랑의 슬픔은 다 나을 것이다(설사 그때를 오늘은 떠올리기 어렵다고 해도).(p.74-75)

엄마를 잃었고, 개를 잃었고, 마리를 잃고... 언젠가는 아빠도, 친구들도 잃게 되겠지... 이별과 상실의 아픔, 그리움... 후회와 원망, 슬픔... 그리고 이런 게 모여서 나를 만드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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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밟기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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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히데오, 최고은 역, [그림자밟기], 검은숲, 2015.

Yokoyama Hideo, [KAGEFUMI], 2003.

최근에 읽다가 중간에서 멈춘 책이 몇 권 있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끝을 볼 수 있는 일본소설을 찾았다. 오랜만에 만난 요코야마 히데오의 소설은 진중한데, 빠르게 읽을 수 있어서 매우 만족이다. 신문기자 출신으로 경찰 소설의 대가라는 수식어는 늘 기대하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밤털이 도둑을 주인공으로 (물론 경찰 세계를 풍자)하는 7개의 단편 모음이다. 범죄, 추리의 옷을 입고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식, 각인, 포옹, 업화, 사도, 유언, 행방

과거의 사건은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 마카베 슈이치는 '철벽의 마카베'로 불리는 밤털이 전문이다.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한때 법학을 전공하며 사법시험을 노릴 정도로 똑똑했다. 하지만 쌍둥이 동생 게이지가 빈집털이를 하다가 경찰에 쫓기고, 이것을 비관한 어머니는 집에 불을 질러 가족 모두가 죽는다. 홀로 남은 마카베는 남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고,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가는 생활을 한다.

그럴 법도 했다. 게이지가 세상을 떠난 지 이제 곧 15년이다. 친어머니의 손에 타 죽은 영혼에게 갈 곳은 없었던 것인지, 게이지는 달리 길을 찾지 못하고 하나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 형제에게 되돌아왔다......(p.22)

혼자가 되었다는 건 외톨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잃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승에 미련이 남은 게이지가 마카베의 마음에서 떠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마카베가 불러들인 것이다. 동생을 아무 데도 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림자가 없는 어둠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그래서 게이지의 영혼을 불러들여 자기 안에 붙잡아둔 것이다. 그날부터 지금까지......(p.135)

특이한 것은,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정신적인 문제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마카베에게 게이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미드 <덱스터> 시리즈에서 주인공의 곁에 죽은 아버지와 여동생이 나타나듯이, 마카베의 마음에는 게이지가 함께하고 있다. 게이지는 마카베의 내면을 반영하는 거울이고, 반사된 그림자이다.

도시의 이면에는 평범하지 않은 삶이 있다. 기구한 팔자의 여인, 부패한 형사, 친구의 질투, 비정한 야쿠자, 부모를 잃은 소녀, 아들을 기다리는 노인 그리고 사랑하지만 함께하지 못한 연인이다. 마카베는 음지에서 해결사 역할을 하는데... 2년 전 자신이 감옥에 가게 된 과정을 알아내고, 형사의 죽임을 파헤치고, 소중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내고, 도둑 사냥에 나선 야쿠자와 담판을 짓고, 산타클로스의 역할을 대행하고, 잠시 스친 인연으로 유언을 전달하고, 사랑하는 이를 보호한다.

죽은 쌍둥이 동생의 영혼이 붙어있는 밤털이 도둑의 활약은 아주 매력 있다. 때로는 냉혹하고 때로는 자비롭게, 번뜩이는 재치와 뛰어난 통찰력,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동생과의 갈등 심리, 경찰과 관료 사회의 불신... 안타까운 가족사는 방황하는 인생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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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 모노클 시리즈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민경욱 옮김 / 노블마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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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시모치 아사미, 민경욱 역,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 노블마인, 2018.

Ishimochi Asami, [KOROSHI-YA, YATTEMASU], 2017.

책 읽기 좋은 계절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바쁨과 복잡함으로 심오한 메시지의 글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일본소설을 찾았다. 소설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는 블랙 유머, 심리 서스펜스, 휴머니즘이 담긴 일상의 미스터리로 작가만의 특별한 색채를 구현하고 있다. 7개의 연작 단편 모음인데... 가능한 경우의 수를 이야기로 펼쳐놓아 짜임새가 있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논리적 서술이 돋보인다. 그리고 등장하는 주요 인물의 성격은 명확하다.

검은 물통의 여자

종이기저귀를 사는 남자

동반자

우유부단한 의뢰인

흡혈귀가 노리고 있다

표적은 어느 쪽

표적이 된 살인청부업자

인물의 성격과 청부살인의 규칙이 매우 흥미롭다. 도미자와 마쓰루는 중소기업을 상대로 경영 컨설팅 연구소를 운영하지만, 부업(주업?)으로 청부살인을 한다. 의뢰가 들어오면 사흘 이내로 답을 하고, 계약이 성사되면 2주 안에 일을 처리해야 한다. 선수금으로 300만 엔, 완료하면 잔금으로 350만 엔을 받는다. 옵션-특별한 주문을 요청하면 수수료가 붙는다. 일에 실패하면 선수금 반환과 함께 거액의 위약금을 물어줘야 한다. 위법한 일이나 신용은 절대적이다.

선수금과 잔금을 합쳐 650만 엔이라는 금액 설정에는 이유가 있다. 도쿄 증시 일부상장기업의 사원 평균 연봉이 대체로 그 정도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 사원이 1년간 열심히 벌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상대를 망자로 만들고 싶은가. 의뢰인에게 그 각오를 묻는 것이다.

어쩌면 의뢰인은 대부호라 650만 엔 정도는 아이 용돈 정도로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다. 왜냐면 나는 의뢰인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다.(p.13)

쓰카하라 슈운스케는 구청에서 일하는 지방공무원이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이고, 청부살인의 연락책이다. 이세도노 아쿠타가와는 잘나가는 치과 병원장이다. 도미자와하고 접점은 없고, 비밀 의뢰를 받는다. 일의 절차는 의뢰인의 보험증으로 신원을 확인하고, 살해 대상을 쓰카하라에게 전달한다. 이때 의뢰인의 정보와 살해 동기는 알려주지 않는다. 쓰카하라는 이것을 도미자와에게 전달하고... 그래서 의뢰인과 청부업자는 서로를 알지 못한다. 이들은 건당 50만 엔의 수수료를 받는다. 이와이 유키나는 만화가이고, 도미자와의 연인으로 가끔 청부살인의 조력자 역할을 한다.

"응. 사람은 왜 청부살인업자에게 살해를 의뢰할까?"

...

"나는 의뢰인과 접촉하지 않아. 동기도 모르지. 그래도 여러 명을 죽이다 보면 그냥 알게 되는 게 있어. 인간은 원한이나 증오만으로는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하지 않아. 그런 동기라면 직접 손을 대지.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하기 위한 조건은 내 생각으로는 상대가 살아 있으면 명확하고 구체적인 불이익이 생기는 경우야... 원한이나 증오는 상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없어지지 않아. 어떻게 해서든 상대를 죽이려고 들겠지. 이 경우는 죽이는 것 자체가 목적이니까. 하지만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하는 이유는 달라. 명확하고 구체적인 불이익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죽일 필요가 없지."(p.132-133)

청부살인은 철저한 비즈니스이다. 따라서 선과 악의 구별은 무의미하고, 살해 동기는 자칫 감정을 개입시켜 일을 그르칠 수 있으므로 비밀이다. 살해 동기와 이유, 도대체 누가? 왜? 이것은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해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으로 작용한다. 퇴근하고 매일 밤 놀이터 수돗가에서 검은 물통을 비우는 여자가 있다. 주말이면 마트에서 종이기저귀를 사는 독신남이 있다. 이들은 표적이 되어 쓰러지는데... 검은 물통의 정체와 종이기저귀를 사는 이유가 궁금하다.

모자(母子) 사이라고 밝힌 중년 여자와 젊은 남자는 결혼 사기를 당했다고 하면서 일을 의뢰하지만, 정작 둘의 관계가 의심스럽다. 청부업자는 일하는 도중에 갑작스러운 중지 명령을 받고, 한 달이 지나서 재의뢰를 받는다. 목덜미에 바늘을 찔러 흡혈귀의 이빨 자국을 남겨 달라는 옵션 의뢰가 들어오고, 표적을 따라가 보니 한 집에 같은 이름으로 두 여자가 살고 있다. 하나하나 세세한 내막이 궁금하다. 그리고 의뢰인과 청부업자는 서로를 알지 못하기에 벌어진 뜻밖의 상황... 도미자와에게 도미자와를 죽이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살인 청부의 규칙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한 경우의 수를 펼쳐놓고,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따지며 살해 동기와 이유를 유추하는 과정은 아주 기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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