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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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쨌거나 라면이라는 음식이 묘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된 데는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 배우가 내뱉은 대사가 한몫을 했다. 그리고 개그우먼 안영미가 패러디하면서 라면을 끓인다’, ‘라면 먹고 갈래?’라는 평범한 문장은 라면수프의 맛처럼 더욱 자극적으로 퍼져나갔다. 김훈의 에세이집의 제목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리고 보니 괜히 불경스러운 짓을 저지른 듯이 부끄러워졌지만...... 그러나 그래도 재미있다. 그의 글들이, 그리고 그 글을 모아놓은 제목부터가 상당히 친근하게 다가온 것이다. 작가로서 그의 이름은 멀고 높지만 뜨끈하고 입맛이 당기는 것이 마치 라면이 끓기를 기다리는 순간처럼, 커피나 국물이나 다른 것이 끓기를 기다리는 것과는 또 다른 세계로 초대하는 것 같다.

 

한 편의 에세이에 담긴 사유들은 그의 문체만큼이나 간결하고 다채롭다. 그는 죽변항을 거닐며 신석기부터 이곳에서 어업을 해왔을 모든 사내들에 대한 동료애를 느끼고, 가오리로부터 가자미, 물곰()... 등에 이르기까지 생물과 사물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다. 걸으면 걷는 대로, 멈추면 멈추는 대로 그가 바라보는 세상처럼 생각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작가는 그 속에서 이치를 보는 데 반해 내 사유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언제나 공회전에, 원상복귀를 반복하고 있었다.

 

는 그가 즐겨 먹는 음식만큼이나 담백한 것을 참 좋아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물이든 인공적 사물이든 각각에 깃든 역사를 빼놓지 않고 상기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찰나에 감동하기 이전에 이미 훨씬 더 멀리, 선사시대까지 이르러 내가 눈앞에 보고 있는 이 현상에 더 깊이 감동했다. () 이라는 한 글자를 가지고 고대 격구와 폴로부터 오늘날의 축구, 야구, 배구에 담긴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쉴 틈 없이 풀어낸다. 남태평양 어느 마을에선가 본 도마뱀들의 다리, 발톱, 갈퀴의 개수와 모양이 다른 것까지 발견할 정도라면 작가란, 정말 거의 모든 것에 대한 관찰자로서 또는 연구자로서 시선을 품고 있어야 하는 직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 가장 읽고 싶었던 글, 11’은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는 모든 이치와 심리학 이론를 부수고 감탄사를 내뱉게 했다. 기가 찰 정도로 쓰인 문장이라 헛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자신의 생명 속에서 스스로 밥을 빚어내는 나무는 얼마나 복 받은 존재인가. (우리는) 내 밥과 너의 밥이 뒤엉켜 있다. 핸드폰이 필요한 것이다. 엽록소가 없기 때문에 핸드폰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들 핸드폰을 한 개씩 차고 거리로 나아간다.’ (p.72. ‘1’ 중에서)

히 설화적인 가난을 겪어 왔다는 저자. 그의 일상과 가족과 과거에서 울 수 없는 슬픔과 이제는 울지 않는 슬픔을 이야기하는, 토막난 국수 가락 같은 문장이 이제는 더는 맛 볼 수 없는 우리 할머니의 음식을 기다리는 마음처럼 슬펐다. 그리고 무엇이든 써 내야 하는 잡감들차마 글로 풀어낼 수 없는 광경들사이를 오가는 그의 생활들이 작가로 수십 년째 밥벌이중인 삶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처럼 김훈의 책을 처음 보는 이에게도 김훈은 문장이 좋은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여러 회의 글쓰기 특강에서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나?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나는 책을 읽은 게 자랑스럽지 않다. 책 속에 길은 없다. 길은 세상에 있다. 그래서 글은 세상을 살면서 쓴다. 글은 삶에 대한 구체성으로 써야 한다. (출처: [티타임즈] 글쓰기 천재들의 글쓰기 비법 http://me2.do/xETn4Kcl)


을 쓰는 데영감을 받겠다고 자극을 얻겠다고 좋은 문장력을 가진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한 나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그들의 문장 속에는 감동은 있어도 내 글은 없었다. 내 글이 찾아갈 길도 없었다. 세상에 예민하지 못하고 대체로 무심하기까지한 내가 글을 잘 쓴다면 그것은 모사에 그치지 않을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다만, 그들의 속에서 그와 비슷한 나의 기억들을 살려낸다면 모를까......

 

가 집을 짓는 목수, 해양 심층과 생물을 연구하는 연구원들, 고기를 낚는 어부, 압록강 건너편의 북한 소년 보초병을 관찰하는 눈이 깊고 진지해질수록 자꾸만 저 말을 상기하게 된다. 세상을 저렇게 깊게 살아내야 하는구나. 지금도 내 앞에서 컴퓨터 모니터 한글프로그램 속에서 타이핑에 따라 사라져가는 여백과 타이핑에 따라 채워져가는 글자들, 이름 모를 인디밴드의 음악과 타이핑을 치는 손가락의 촉감, 오른쪽 뺨을 타고 내려오는 해질녘 그늘까지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겠구나. 이러고도 이내 나는 훨씬 더 무심해져 가는 나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때마다 다시 펴 봐야 할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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