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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이]님 서재에서 퍼온 글입니다.

과천연구실의 박상현 선생이 발리바르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진태원선생이 번역한 『스피노자의 정치』에 관한 글입니다. 컴퓨터 문서함에 보니까 이런 글이 있더군요ㅎㅎ 내 컴퓨터에 별게 다 있네;;; 

 

에티엔 발리바르, 진태원 역, <스피노자와 정치>, 이제이북스, 2005  
 
약간의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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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1.
대다수 사람들에게 스피노자는 생소할 뿐만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철학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스피노자의 철학적 개념과 범주는 17세기의 철학적 지반1)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또한 그의 철학적 문제설정은 유사한 개념과 범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대다수 철학과도 구별된다. 그 결과 스피노자의 철학의 우리에게 이중의 노력, 즉 17세기 철학의 일반적 관심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스피노자의 이례성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요구한다.

현대정치의 기원에서 그 기초를 확립한 이른바 사회계약설 또는 '자연권' 사상에 관한 이해는 스피노자의 철학과 정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실마리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독특한 유물론의 전통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스피노자의 거울에 마르크스를 비추어 보는 동시에 마르크스의 거울에 스피노자를 비추어 보는 작업이다(이른바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

1960-70년대 이후 스피노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관심이 상당부분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알튀세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접근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3) 에띠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도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이 책은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한 훌륭한 해설서인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의 한계와 공백, 나아가 전화와 일반화라는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철학과 정치를 이해할 수 있는 지침이 된다. 

2.
발리바르는 그의 스승 알튀세르와 마찬가지로 '저작이 없는 철학자'다. 그는 철학에서의 유물론적 전통이 자기 완결적 철학체계―예컨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완성―의 확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학의 한계와 아포리아를 드러내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그는 언제나 특정한 정세―정세는 정치와 철학의 해후의 조건이다― 속에서 그것에 대한 개입으로서 유물론적인 철학적 실천을 수행해왔다.

이러한 철학적 작업에서 두 권의 교육학적 해설서는 예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마르크스의 철학}(1993)이고 다른 하나는 {스피노자와 정치}(1985)다. 두 저서는 유사한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의 정치}도 먼저 스피노자의 입장을 역사와 정세 속에 위치시키고(1장), 그 다음에 시기적 순서에 따라 문제설정의 변화와 단절을 분석하면서 저작들(2장의 {신학-정치론}, 3장의 {정치론}, 4장의 {윤리학})이 재해석된다.4)

그러나 마르크스의 경우 그의 철학이 문제가 되는 반면, 스피노자의 경우는 그의 정치가 문제가 된다. 즉, 마르크스의 '역사과학'에서 유물론적 철학의 실천을 검출할 수 있다면, 스피노자의 철학에서는 독특한 정치를 검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스피노자 해석에서 독자적 위치로 귀결된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포함하여 모든) 철학은 궁극적으로 정치(공동체)에 개입해서 특정한 정치적 효과를 산출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이다.5) 스피노자 해석에서 오랜 논쟁으로 남아 있던 형이상학과 인간학, 그리고 정치와 윤리의 관계를 둘러싼 문제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재구성될 수 있다.6)  

3.
스피노자의 철학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는 오랜 이론적 공백으로서 '이데올로기'에 관한 대안적 이론을 발견할 수 있다.7) 여기서 정치와 대중,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주제가 부각된다. 특히 사회운동이 언제나 '대중운동'을 지향해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리고 세계화라는 조건에서 국가와 당, 그리고 대중운동의 모순을 새롭게 지양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스피노자와 정치}에서 제기되는 대중과 민주주의의 문제는 특별한 주목을 필요로 한다.

저자는 대중이라는 문제 또는 역사에서 대중의 결정적 역할이라는 문제는 마르크스와 스피노자의 공통적인 이론적·철학적 대상을 이룬다고 지적한다. 마르크스가 대중의 사회경제적 조건들에 대해 연구하고 그 내에서 특수한 형태의 모순을 발견한다면, 스피노자는 대중의 심리적·정신적 조건들 연구하고 그 내에서 특수한 형태의 모순을 발견한다.8)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대중은 일종의 선(先)주체적 범주로서 정치를 사고하는 데 필수적인 역동적 질료를 이룬다. 대중의 역동성은 그 고유한 모순에서 비롯되는데, 발리바르는 이를 대중들(masses)의 양면성 또는 양가성(ambivalence)이라고 지칭한다.

대중―지배자와 피지배자, 대표자와 피대표자 모두를 포괄하는―의 능동성과 수동성, 정념적 동일화에 따른 예속의 경향과 이성적 교통에 따른 (자기)해방의 경향에 대한 동시적 이해는 대중의 '가상(상상)의 생산성'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여타의 스피노자 해석과 쟁점을 형성한다.9) 이러한 관점은 역사와 정치에서 대중의 민주주의적 운동뿐만 아니라 대중의 '도착'―예컨대, 파시즘이나 인민주의(populism)의 사례에서 드러나는―도 동시에 설명한다. 대중의 역능은 결코 선험적으로 보증되지 않는다.

대중의 양가성은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의미를 갖는다. 스피노자에게서 민주주의는 일련의 기관들이나 법률적 장치와 같은 정태적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기존의 교통관계를 변형시켜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조건을 구축하려는 집합적 노력의 과정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과정, 즉 공통의 인식에 기초해서 공동의 봉기적 권리를 확립하고 요구하는 일련의 과정, 민주화의 영속적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도 문제는 언제나 대중의 내적 조건으로 귀결된다. 대중들 내부에서 대중들 스스로 극단적 폭력에 대응하고 집합적 인식을 조직하려는 노력을 강화한다는 정치적 전망은 오늘의 사회운동에게 풍부한 통찰을 제공해 줄 것이다.

1) 발리바르는 17세기의 철학과 '현대철학' 사이에는 거대한 단절이 존재하며, 17세기의 철학자들―데카르트를 포함하여―은 '주체의 철학자'가 아니라 '실체의 철학자'라고 주장한다. 특이하게도 그는 로크의 (정치)철학 내에서 현대철학으로의 결정적 단절을 발견한다. tienne Balibar, "What Is 'Man' in Seventeenth-Century Philosophy? Subject, Individual, Citizen", in Janet Coleman, ed., The Individual in Political Theory and Practice, Clarendon Press, 1996. 그는 혁명 또는 봉기와 철학 또는 철학적 개념의 탄생 및 변형이라는 연구주제를 발전시키면서 봉기에 내장된 공산주의적 요소―이른바 평등-자유 명제―에 대한 대응으로 관념론적 철학의 개념과 범주들이 변형·발전되는 역사적 과정을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분석에서 도출된 부르주아 공산주의의 요소, 즉 평등-자유 명제를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정에서 수평파와 공유파(Diggers)의 봉기에도 적용한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철학적 대응으로 칸트가 주체(Subjekt) 개념을 발전시켰다면, 영국 혁명에 대한 철학적 대응으로 로크는 양심(conscience)과 구별되는 의식(consciousness) 개념을 발전시켰다. 혁명과 '공산주의'의 계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tienne Balibar, "Quel communisme apr s le communism?", in Eustache Kouvelakis, dir., Marx 2000, PUF, 2000 (국역: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소련 사회주의}, 공감, 2002에 수록). 그리고 '의식' 개념의 발견에 이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tienne Balibar, "A Note on 'Consciousness/Conscience' in the Ethics", Studia Spinozana, Vol. 8., 1992. 본문으로 

2) 이 경우 홉즈, 로크, 루소의 정치·사회사상과 스피노자의 철학을 대조시킴으로써 그의 독창성을 이해하는 동시에 현대정치의 기초를 이루는 '자연적 권리'의 구체적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홉즈와 로크의 사회철학을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한 멕퍼슨의 작업은 자연권 사상의 한계를 인식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Macpherson, C. B., The Political Theory of Possessive Individualism: Hobbes to Locke, Oxford University Press, 1962 (국역: 박영사, 1990). 그러나 스피노자에 대한 발리바르의 해석은 홉즈와 로크의 '소유적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3)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수용―종종은 왜곡된 형태의―과 프랑스 내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출현, 그리고 여기서 알튀세르의 역할 등에 관해서는 Andre Tosel, "La Marxisme au miroir de Spinoza", Du mat rialisme de spinoza, Kim , 1994(국역: "스피노자라는 거울에 비친 맑스주의", 트랜스 토리아, 2005, 상반기)를 참조할 수 있다. 특히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철학과 정치를 결합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이에 대해서는 Andre Tosel, "La philosophie politique au miroir de Spinoza", Y a-t-il une pens e unique en philosophie politique?, PUF, 2000을 참조할 수 있다. 본문으로

4) {스피노자와 정치}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발리바르의 저작을 완역한 것이고, 2부는 스피노자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번역자의 해제와 용어해설이 추가된다. 본문으로 

5) 그런 면에서 '정치철학'은 다만 학제적 구분에 불과할 뿐이며, 철학의 모든 개념과 범주는 고유한 의미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재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때 '정치'는 결코 일의적이지 않다. 발리바르는 현대의 정치관념을 자율성과 타율성, 그리고 타율성의 타율성으로 구분하는데, 이는 {스피노자와 정치}에서 스피노자, 루소, 마르크스의 정치 관념을 비교하는 글에서 잘 드러난다. 본문으로 

6) 자세한 것은 번역자의 해설을 참조할 수 있다. 본문으로 

7) 마르크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의 동요와 공백에 대해서는 tienne Balibar, "The Vacillation of Ideology in Marxism" in Masses, Classes, Ideas: Studies on Politics and Philosophy Before and After Marx, Routledge, 1994. (국역: "이데올로기의 동요", 서관모 편역, {역사유물론의 전화}, 민맥, 1993)을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스피노자로부터 영감을 얻은 이데올로기 개념의 재구성에 대해서는 The Philosophy of Marx, Verso, 1995. (국역: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문화과학, 1995에 수록)의 3장을 참조할 수 있다. 본문으로 

8) tienne Balibar, "Preface", Masses, Classes, Ideas: Studies on Politics and Philosophy Before and After Marx, Routledge, 1994. 동일한 내용이 {스피노자의 정치} 2부에 "스피노자, 루소, 마르크스"에서도 발견된다. 본문으로

9) 대중의 가상의 생산성은 사실 공포, 즉 주권적 권력 앞에선 대중의 공포인 동시에 대중에 대한 주권적 권력의 공포의 생산성이다. Andre Tosel, "La philosophie politique au miroir de Spinoza", Y a-t-il une pens e unique en philosophie politique?, PUF, 200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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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쟈님 서재에서 퍼온다.  

지젝에 대한 관심은 있어도 난해해서 읽기 어렵기만 하던데...로쟈님 서재를 열심히 뒤져서 지젝과 좀 친해져야 겠다....근데 열심히 뒤진다고 친해질 수 있는 문제인지....  사실 이 글도 잘 이해되진 않는 부분이 많으니...ㅎㅎ

중앙대 대학원신문(260호) '冊과 담론' 코너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을 다루고 있다. '한겨레21'에도 서평을 실은 바 있어서 청탁을 받고 주저했지만 초점을 다른 쪽에 맞춰달라고 해서 결국은 수락했다. 하긴 그렇게 초점을 달리하면, 서평은 몇 편 더 쓸 수도 있겠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9. 05. 07) 저항의 교착상태는 어떻게 돌파해야 하나

슬라보예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은 철학과 과학, 그리고 현실 정치에 대한 그의 이론적 개입이자 그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 이후 이제까지 제시해온 담론의 중간결산이기도 하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지도 새롭게 더하지도 않으며 다만 ‘시차(視差, parallax)’라는 개념을 빌려 지금까지 다룬 문제들을 재정의하고, 자신의 작업을 재구성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지젝의 모든 것’이라 할 만하며 그의 공언대로 ‘주저’라는 말에 값한다. 

시차적 관점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건
‘시차’란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곳에서 보았을 때 서로 다른 위치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시차적 관점’이라는 아이디어는 원래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 (2001)에서 얻어온 것이지만, 이론적 전거로 삼는 가라타니와는 달리 헤겔-라캉주의자로서 지젝은 칸트주의를 헤겔적 사유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접목시킨다.  



그는 이미 <이라크>(2004)에서도 ‘시차’란 개념을 사용하여 이라크전쟁의 ‘진리’를 설명한 바 있다. 곧 “민주주의는 인류에 대한 신의 선물”이라는 부시의 말이 집약해주고 있는 바 서구민주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믿음이 이 전쟁의 첫 번째 이유요(상상계), 새로운 세계질서 안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주장하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라면(상징계),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이라는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세 번째 이유(실재계)라는 것이다.

요점은 여기서 어느 하나가 나머지의 ‘진리’라는 게 아니라, ‘진리’란 관점의 이동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것이 말하자면 시차적 관점에서의 진리다. 이 경우 한 가지 관점에서의 진리 주장은 그것이 타당한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오류를 면치 못한다. 사태는 이데올로기적이면서 정치적이고, 또 동시에 경제적이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춘 방책은 일면적인 해결책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차적 관점의 도입을 통해서 지젝은 궁극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건하고자 한다. 그가 보기에 시차란 개념은 변증법적 사유의 장애물이 아니라 그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하도록 해주는 열쇠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철학의 교착상태뿐만 아니라 ‘저항’의 교착상태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지젝은 알랭 바디우를 따라서 시스템이 더욱 부드럽게 작동하게끔 만들어주는 국지적 행동에 참여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진정한 위협은 수동성이 아니라 유사-행동이며, ‘능동적’이고 ‘참여적’이 되려는 이 충동은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개입하여 ‘뭔가’를 하고, 학자들은 무의미한 ‘논쟁’에 참여한다. 가령 자유주의적 좌파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들도 혁명을 말하지만, 그들은 혁명을 위해 치러야 할 실제적 대가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해나갈 따름이다. 자신들의 학술적 특권이 전혀 위협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거나 급진적인 담론을 쏟아내는 데 열중하는 ‘강단좌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발언을 뒷받침하고 있는 발언 위치, 곧 물적토대와 시스템 자체는 건드리지 않으며 결코 위험에 빠뜨리지도 않는다.  



사실 한때 ‘급진적’이었던 과거 전력만큼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공동체에 합류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없다.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의 상당수가 젊은 시절 트로츠키주의자였다는 사실이 그 일례다. 가까이에서 예를 찾자면, 주사파의 대부였다가 전향하여 극우 이데올로그로 활동한다거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열혈분자였다가 수구정당의 ‘강성파’로 활약하는 정치인들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사후적인 주장이 되겠지만, 이들의 ‘저항’이야말로 체계의 재생산에 기여한 흔한 사례가 아닐까. 

혁명은 당위가 아니라 필연의 문제
지역적 층위의 국지적 저항으로 자본주의 세계화에 맞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지젝은 시차적 관점에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한 주장은 우리가 국가로부터 언제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며, 이것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국가기계를 운용하는 책무를 떠맡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의존한다. 즉 국가라는 마당을 너무 쉽게 ‘적’에게 내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결국 정치적인 것보다는 윤리적인 것을 더 강조하게 되며, 혁명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으로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서 간주한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 진정한 혁명은 다르게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즉 그것은 ‘당위’가 아니라 ‘필연’이다. 때문에 지젝은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영속적이지 않을까라거나 혁명은 결국 안 일어나지 않을까라는 좌파의 우려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 오류는 혁명을 도덕적 의무로 사고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사-행동에 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물러나는 것, 후퇴하는 것이다. 비판적인 참여와 행동을 통해서 권력을 쥔 자들과 ‘대화’에 나서기보다는 ‘불길한 수동성’으로 퇴각하는 것이 오히려 진정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지젝의 시각이다. 그러한 수동성이 새로운 혁명적 주체와는 어떻게 관련되는가?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클럽>(1999)이 암시가 될 수 있을까? 영화에서 주인공은 일을 하지 않아도 월급을 내놓아야 한다면서 상사를 협박하기 위해 스스로를 피가 나도록 때린다. 지젝에 따르면, 이러한 급진적인 자기비하를 통해서만 ‘순수한 주체’는 나타나게 된다. 자신을 직접 구타하는 것은 더 이상 주인이 불필요하다는 주장이면서 주인에게 집착하는 내 안의 어떤 것을 이겨내는 일이다. 그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위가 아닐까.  

09. 05.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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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님 서재에서 퍼옵니다...

- 이재원씨 블로그에서 퍼옵니다. 지젝에 관한 좋은 소개글.   
 


이 글은 민예총 산하 인터넷잡지 <컬쳐뉴스>(2007년 4월 24일자 문화일반 코너)에 실렸다. 기록차원에서 블로그에 올려놓는다. 

. 따라서 그의 이력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젝을 읽기 위해서는 피해야 할 선입견이 있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가야 된다. 그의 글은 이해하기 쉽다는 선입견이 바로 그것이다.


현대사상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이름이 있다. 프로이트와 라캉을 뒤이어 정신분석학의 힘을 가장 야심차게 (재)확장해놓은 슬라보예 지젝(1949~  )이 바로 그 이름이다



 아마도 이 선입견은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라는 강단 철학자들의 비아냥거림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지젝이 자신의 논의를 설명하기 위해 대중문화의 예(특히 할리우드 영화, 심지어는 <타이타닉> 같은 블록버스트까지!)를 많이 들기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다른 현대사상가들에 ‘비해’, 즉 ‘상대적으로’ 그러한 뿐이다.




이 점은 “칸트, 헤겔,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부제가 달린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를 읽을 때에도 똑같이 해당된다. 이 책에서도 지젝은 <토탈 리콜>, <엔젤 하트>, <블레이드 러너>, <더티 해리> 같은 할리우드 영화 얘기를 곳곳에서 하지만, 그보다 백배는 더 많은 지면을 칸트와 헤겔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한정된 지면에 이 책의 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수는 없고, 이 책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6장 「당신의 민족을 당신 자신처럼 즐겨라!」를 중심으로 몇 마디 하고자 한다.

6장의 핵심 테마는 “어떤 주어진 공동체를 묶는 요소는 상징적 동일화의 지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 구성원들을 한데 연결하는 끈은 언제나 어떤 사물을 향한, 체화된 향유를 향한 공유된 관계를 함축한다”이다. 이 테마는 이 책의 부제에도 포함된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압축해 놓고 있으며, “기존의 지배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모든 비판이론의 궁극적 테마와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지젝은 통상적인 이데올로기론, 즉 “이데올로기는 거짓 의식”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이론은 철저히 ‘재현적’이라고 비판한다. 즉, 통상적인 이데올로기론은 어떤 사회적 내용(가령 현실의 지배구조)을 왜곡하여 잘못 재현한 것이 곧 이데올로기라고 본다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이데올로기가 정의되면, 우리가 기존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어떤 사회적 내용을 왜곡하지 않고 제대로 재현하는 것이 된다(한때 우리는 이 과정을 ‘의식화’로, 그 결과물을 ‘대항-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젝에 따르면 “어떤 정치적 견지는 그 객관적 내용과 관련해서 아주 정확한(‘참된’) 것이면서도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역도 참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재현의 문제틀로서는 이데올로기의 힘을 이해할 수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도 없다. “어떤 주어진 공동체를 묶는 요소는 상징적 동일화(곧 이데올로기)의 지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지젝의 말은 이를 뜻한다.

그렇다면 어떤 주어진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한데 연결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지젝은 ‘체화된 향유’로서의 ‘어떤 사물’이 바로 그런 요소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이데올로기의 작동원리를 의식의 차원에서 무의식의 차원으로 끌고 내려가 설명하는데, 이때 그가 기대는 것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다(아니, 오히려 지젝 식으로 해석된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라고 해야 정확할 듯하다).

라캉에 따르면 ‘향유’(juissance/enjoyment)란 쾌락(plaisir/pleasure)이 아니다. 향유와 쾌락을 동의어로 쓰곤 했던 프로이트와 달리(가령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라캉은 욕구(besoin/need)와 요구(demande/demand)를 구분하며 각각의 개념에 쾌락과 향유를 대입한다. 가령 어머니의 젖을 빠는 아기의 경우 배고픔이라는 생체적 욕구가 충족되면 더 이상 ‘식욕의 빨기’(succion)가 아니라 ‘쾌감의 빨기’(suçotement)를 한다. 이렇듯 욕구가 충족된 이후에도 추구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향유는 쾌락의 초과, 위반, 잉여이다. 또한 과도한 쾌락은 불쾌(고통)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쾌락 이상을 추구하는 향유는 도착적이기도 하다.

쾌감의 빨기는 아기가 어머니와 일체감을 느끼곤 하는 행위이기도 한데 이 행위는 곧 중단된다. 즉 젓 떼기를 하는 것이다. 아기는 잃어버린 일체감을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쾌감의 빨기’를 반복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고, 이제 어머니의 젖꼭지는 “기다려 보지만 항상 결핍된 것”, 즉 충족되지 않은 욕망의 대상이 된다. 라캉은 이를 ‘대상 a’(objet petit a/object little-a)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지젝이 말하는 바의 ‘사물’(La Chose/the Thing)이다.

따라서 “어떤 사물을 향한, 체화된 향유를 향한 공유된 관계”가 어떤 주어진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한데 연결한다는 지젝의 말은 “잃어버린 대상을 찾으려고 하는 반복의 고통 속에서 느끼는 쾌락”(즉 향유)이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시켜 준다는 말인데, 그에 따라 지젝에게서는 이데올로기의 위상 자체도 변한다. 즉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어떤 사회적 내용을 왜곡하여 잘못 재현한” 담론구성체가 아니라 우리가 왜 그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서도 ‘사물’(대상 a)을 얻지 못하는가를 설명해 주는 상상적 답변이다. 그래서 지젝의 이데올로기는 환상(fantasy)의 구성물에 가깝다.

지젝은 프로이트와 라캉을 경유한 이런 정신분석학의 설명틀을 확장해 정신분석학을 정치학으로 탈바꿈시킨다. 가령 한 사회는 그만의 ‘대상 a’(사물)를 갖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일수도, 민족일수도, 계급일수도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고 자부하는 나라들, 요컨대 영국이나 미국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불리는 보통선거권이 인정받은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와서라는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족이나 계급의 경계가 생각보다 그리 뚜렷하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고 있다. 즉 민주주의, 민족, 계급은 아직 우리가 결코 완벽하게 소유한 적이 없는 ‘대상 a’(사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난 20세기 동안 결코 완벽히 소유한 적 없는 민주주의, 민족, 계급의 이름으로 대규모 전쟁(내전이든 국제전이든)을 해오지 않았는가? 지젝이 “향유의 도둑질”의 역설, 즉 우리의 사물이 타자에게 접근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간주(왜냐하면 우리의 사물은 타자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이기에 우리와 타자를 구분해 주는 것이므로)되는 동시에, 타자에 의해 위협당하는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우리도 갖고 있지 않은 사물을 타자가 위협한다)는 역설을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바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염두에 둔다면, 의식화나 대항-이데올로기의 창출을 통해 기존의 지배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지젝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대상 a’(사물)라는 것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혹은 절대 충족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거나, 향유가 충족되지 않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상상적인 환상(판타지)을 찢어발기거나. 파시즘의 반유대주의에 맞서 건국의 아버지 모세가 이집트인임을, 즉 유대인의 기원이 잡종이라는 것을 입증하려 했던 프로이트의 시도(「인간 모세와 유일신교」)가 전자의 경우라면, 지젝의 작업이 바로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것은 “예외된 한 사람”(homme moins un)이 되는 것일 게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거세 신화를 설명한 「토템과 터부」를 다시 읽으면서, 거세 위협에 복종한 아들들로 구성된 집단이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논리적으로 복종하지 않은 아들이 ‘적어도 한 사람’(au moins un)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라캉은 발음상의 유사성에 착안해 “이 적어도 한 사람”을 “예외된 한 사람”(오모엥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오모엥젱들이 연대할 때 기존의 지배질서는 비로소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이 오모엥젱들을 묶어줄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 지젝은 아직 이 질문에 답을 해주진 않고 있으나 여하튼 계속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지젝의 최근 작업은 혁명가들을 다시 읽는 ‘혁명’ 시리즈, 그리고 “모든 이데올로기가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포스트모던한 오늘날, 동시대의 이론이 저지르고 있는 오류와 대결하며 기발한 해결책을 제안한다”고 예고된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이다). 우리가 아직 지젝과 지저거리며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끝)




[출처] 지젝과 지저거리며 함께 머물기|작성자 난장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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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aladin.co.kr/balmas/904248 
 
무화과나무님 서재에서 퍼온다.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Ⅰ.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전통적 해석: 범신론  


다른 모든 철학들과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의 철학 역시 해석의 역사, 그 영향의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그 해석의 역사, 영향사 안에서만 식별되고 존립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연구, 더욱이 그의 체계를 포괄적으로 재구성해보려고 시도하는 연구는 반드시 그 해석의 역사에 대한 재해석과 평가를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연구가 주장하는 관점의 독자성은 사실은 주관적인 오해와 착각에 머무르거나 아니면 이전에 제시되었던 이러저러한 해석을 진부하게 되풀이하는 함정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이 논문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을 제안하면서, 범신론적 해석과 역량론적 해석이라는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두 가지 주요한 해석의 흐름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우리 논문의 본질적인 일부로 삼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통적으로 스피노자의 철학은 범신론 철학으로 알려져 왔다. 곧 스피노자는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볼 수 있는 인격적인 초월신 개념을 거부하고 그 대신 자연 중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과 신을 동일시하는 철학 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범신론pantheism”이라는 용어를 고안하고 스피노자 철학을 범신론 철학으로 규정한 것은 18세기 초 영국의 종교개혁가였던 존 톨랜드John Toland였지만1), 이러한 규정은 레싱이 스피노자주의자인지 아닌지를 둘러싸고 전개된 프리트리히 하인리히 야코비Friedrich Heinrich Jacobi와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의 논쟁을 통해 철학사적 영향력을 획득하게 된다.2) 야코비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철학 일반과 동일시하고 다시 이를 기계론적 숙명론/허무주의/무신론과 동일시함으로써, 구원을 위해서는 철학이 아닌 신앙에 의지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철학을 활용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야코비의 저서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독일 철학의 중심부로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야코비가 규정한 스피노자의 범신론과의 대결은 이후 독일 관념론의 중심 화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형성된 범신론으로서의 스피노자 철학이라는 관점은 독일 관념론의 영향력에 편승하여 19세기 이래 서양 철학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3)

범신론적 해석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스피노자 연구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그 이론적 영향을 상당히 상실했다. 범신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내재적이고 엄밀한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기보다는 헤겔을 비롯한 몇몇 대가들의 (얼마간 편파적인) 독해에서 발원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영향력의 쇠퇴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이 여전히 대중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데다가 우리가 뒤에서 살펴볼 역량론적 관점은 전체적으로 볼 때 범신론적 해석과의 대결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형성해왔기 때문에, 역량론적 해석의 이론적 입장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범신론적 해석의 주요 특징을 검토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범신론적 해석은 세 가지의 이론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실체의 부동성

범신론적 해석은 스피노자의 실체를 철학사에서 보기 드문 절대자에 대한 사변적 표현으로 간주한다. 곧 자신과 다른 타자들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생산되지 않고 자기 자신에 의해 산출되는 자기원인으로서 스피노자의 실체는 순수한 실정성positivity의 개념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처럼 실체를 절대적으로 실정적인 존재자로 제시함으로써 동시에 그 대가로, 실체를 아무런 운동도 인과작용도 수행하지 않는 정태적 존재자로 간주하게 된다. 운동은 변화를 상정하며 변화는 타자성과 부정성을 전제하고 있는 데 반해, 이러한 실체는 절대적으로 실정적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아무런 타자성과 부정성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이는 결국 실체를 정태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절대적으로 실정적이면서도 아무런 운동, 아무런 변화도 수행할 수 없는 부동적이고 불활성적인 존재자라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4)  



 
2. 유출론적 체계인 스피노자 철학

범신론적 해석은 이처럼 실체가 태초에 정립된 부동적인 절대자이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은 또한 유출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간주한다. 이미 절대적으로 완성되고 충만한 실체가 존재하므로 남은 것은 이러한 실체로부터 내려오는 존재론적 하강의 운동뿐이라는 것이다. 가령 헤겔은 󰡔윤리학󰡕 서두에 나오는 실체(자기원인), 속성, 양태들에 대한 정의는 이러한 하강의 운동이 이루어지는 순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곧 자기원인인 실체가 절대적으로 충만한 존재자를 가리킨다면,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주관적 관점(따라서 이미 실체에 대해 외재적이고 부차적인 관점)을 지칭하고, 양태들은 다시 이것들보다 훨씬 더 존재론적인 실재성을 결여한, 사실은 거의 아무런 실재성도 지니지 않는 존재자들을 나타낸다.  



3. 양태의 비실재성과 주체성의 부재

이처럼 양태들이 존재론적 실재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에는 아무런 주체성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을 비롯한 개별 존재자들은 자유는커녕 실재성을 박탈당하고 만다. 스피노자 철학에는 이중적인 측면에서 주체성이 부재한다. 우선 실체는 내적 부정성의 계기를 결여한 부동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주체로 간주될 수 없다. 또한 인간들은 자연의 필연적 질서의 일부에 불과하므로 자유의 가능성을 부정당하고 주체성도 결여하게 된다.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은 데카르트의 사유와 연장,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을 실체의 일원론을 통해 극복하려는 이론적 시도의 산물이지만, 데카르트가 확립해 놓은 주관성의 철학을 거부한 대가로 능동성과 자유의 여지를 전혀 남겨놓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5) 

  

Ⅱ. 범신론에서 역량론으로: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한 경향  


스피노자 연구의 역사에서 20세기 후반은 매우 뜻깊은 시기로 평가할 만하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스피노자 저작의 고증본 전집들이 출간되면서6) 왕성하게 전개되었다가 2차 대전을 거치면서 거의 고사 직전에 이르렀던 스피노자 연구는 1960년대 이후 양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이는 일차적으로 마르샬 게루Martial Gueroult나 질 들뢰즈, 알렉상드르 마트롱Alexandre Matheron 같은 스피노자 연구의 대가들이 1968년-69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잇달아 스피노자 연구에서 한 획을 긋는 대작들을 출간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이들은 각자 상이한 이론적 스타일을 지니고 있고 연구 주제에서도 차이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7), 󰡔윤리학󰡕을 비롯한 󰡔신학정치론󰡕과 󰡔정치론󰡕같은 성숙기의 대표작들을 중심으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엄밀한 학문적 독해의 전통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선구적인 작업은 1980년대 이래 좀더 심화된 문헌학적ㆍ분석적 연구들로 계승되었고 더 나아가 새로운 스피노자 고증본 전집의 출간8)의 이론적 촉매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범신론과 대비해 볼 때 이들의 이론적 특징은 다음과 같이 집약될 수 있다.  


1. 역동적 원인인 실체

우선 이 관점은 스피노자의 신 또는 실체를 부동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범신론과 달리, 실체는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는 󰡔윤리학󰡕이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잘 드러난다. 더욱이 신은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생산한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는 1부 정리 16이나 신의 본질과 신의 역량을 동일시하는 1부 정리 34에서 신 또는 실체의 동역학적 본성은 좀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범신론적 해석은 관념론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역동적인 실체의 철학인 스피노자 철학의 잠재력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의 발로이자 체계적인 왜곡이라는 것이 이들의 평가다.9) 
 


2. 유한 양태들의 존재론적 근거인 실체의 역량

그러나 이러한 신의 절대적 역량 때문에 양태들, 특히 독특한 실재들로서의 유한 양태들은 아무런 내재적 역량이나 능동성을 지닐 수 없는 것 아닌가? 범신론적 해석은 이런 이유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유출론 철학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들뢰즈, 마트롱, 마슈레 등과 같은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의 대표자들은 이러한 해석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를 유출론의 철학자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실체와 속성, 양태 사이에 상호 외재적인 관계가 성립해야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곧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며, 그런 한에서 실체와 외재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양태들은 실체 안에 존재하며, 바로 그런 이유로 실체에 대해 외재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들은 실체가 절대적인 인과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유한 양태들의 능동성이나 인과적 역량을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의 존재론적 기초를 제공해준다고 주장한다. 가령 우리가 이 논문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다루게 될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표현주의”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옹호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실체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 원초적이고 절대적인 역량을 아무런 제약 없이 표현하는 것이며, 각각의 양태들은 이러한 실체의 본질을 양태의 수준에서 이어받아 다시 표현한다. 곧 양태들은 각자 원인으로서 어떤 결과들을 생산해낸다(E I, p.36). 양태들이 지닌 이러한 능동성, 원인으로서의 역량은 그것들이 실체의 절대적인 역량을 표현한다는 사실에 존재론적으로 의거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실체의 절대적 역량, 원초적인 자기 표현은 양태들의 능동성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 들뢰즈를 비롯한 역량론적 주석가들의 관점이다. 
 


3. 윤리적ㆍ정치적 실천의 기초로서 역량

유한 양태에 속하는 인간의 윤리적ㆍ정치적 실천 역시 이러한 실체의 절대적 역량에 근거를 두고 있다. 범신론적 해석가들이 지적하듯이 스피노자에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개별 실재들은 유한한 양태라는 지위를 부여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유한) 양태는 다른 것 안에 존재하고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된다는 점에서(E I D5) 존재론적으로 비자립적이다. 하지만 범신론적 해석에서 생각하듯이 존재론적 비자립성이 실존과 행위의 차원에서 양태들의 자율성과 능동성의 여지를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존재론적 비자립성, 의존성은 양태들의 역량의 원천 자체가 된다.

들뢰즈와 마트롱을 비롯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연구자들은 스피노자의 저작, 특히 󰡔윤리학󰡕 3, 4, 5부 및 󰡔신학정치론󰡕과 󰡔정치론󰡕 등에 대한 세심한 분석을 통해 이 문제에 체계적으로 답변하려고 시도했다. 이들의 논의의 요점은 인간은 자연적인 실존 조건 속에서는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원초적으로 부여받은 본질, 곧 자기 보존의 역량(스피노자의 “평행론” 또는 심신 동일성론에 따를 경우 이는 신체의 행위역량이면서 동시에 정신의 인식역량이다)에 의거하여 이러한 조건을 개선해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 주석가들은 우리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는 기쁨이라는 정서와 이러한 역량을 능동적인 역량으로 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공통 통념notio communis”이라는 개념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1960년대 말 이후 새롭게 전개된 스피노자 연구는 이전의 범신론적 해석에 맞서 스피노자는 범신론 철학자가 아니라 “역량의 철학자philosophe de la puissance”10)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우리는 이들의 입장을 “역량론puissantialisme”으로 부르고자 한다. 역량론이라는 명칭은 우리가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자인 앙드레 토젤André Tosel이 최근 한 논문에서 사용한 것이다. 그는 근대 초기 신학-정치론의 구도를 소묘하고 이러한 구도에서 스피노자의 입장이 지닌 독창성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입장을 역량론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역량론은 신인동형론에 기초를 둔 인격신 개념을 해체하면서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자기원인으로서의 실체 개념을 이론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11) 토젤은 역량론을 스피노자 자신의 철학적 입장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은 1960년대 말 이후 전개된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역량론적 해석은 지난 30여년 동안 스피노자 철학 전반에 걸쳐 매우 탁월한 이론적 성과를 배출했다. 게루와 들뢰즈, 마트롱 같은 역량론적 해석의 창시자들 이외에도 피에르 마슈레, 에티엔 발리바르, 모로, 안토니오 네그리12) 같은 후배 연구자들이 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이들의 작업을 좀더 정교하게 가다듬고 확장해왔으며13), 90년대 이후에도 재능 있는 신세대 연구자들이 계속 이들의 연구를 이어받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역량론적 해석은 스피노자주의의 역사에서 새로운 단계를 열어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14)

 


Ⅲ. 역량론적 해석의 난점들 



하지만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역량론적 해석은 몇 가지 중요한 이론적 난점들을 지니고 있으며, 바로 이 때문에 자신이 공언하고 있는 것과 달리 스피노자 철학의 고유성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여기서는 세 가지 측면에서 간략하게 지적해두겠다.  

 


1. 초월성의 위험

역량론의 첫 번째 문제점은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에 대한 해석에서 볼 수 있다. 역량론은 범신론에 맞서 실체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실체는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생산하는 절대적인 역량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정리 16). 따라서 역량론이 󰡔윤리학󰡕 1부에서 자기원인(정의 1),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정의 6과 정리 11), 실체의 역량(정리 16과 정리 34) 등에 주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자. 자기원인에서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원인이 된다고 할 때, 이 자기는 어떻게 성립하는가? 이러한 자기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제어하는 존재자인가? 그러나 그렇다면 자기원인인 실체의 행위가 자의적이지 않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스피노자가 강조하는 실체의 행위의 필연성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실체의 본질을 절대적 역량에서 찾을수록 더욱더 심각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실체가 절대적인 역량이라면, 따라서 실체가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것이라면, 실체의 행위는 그만큼 자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체는 역량론적 해석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일종의 초월적 존재자가 아닌가? 스피노자의 실체, 스피노자의 신은 외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월적인 신이 아닌가? 이러한 신은 유대-기독교 전통의 신 또는 데카르트의 신과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질문에 정확히 답변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피노자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의미와 기능이 무엇인지, 그것의 용법이 스콜라철학과 데카르트의 자기원인 개념의 용법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해명되어야 한다. 하지만 역량론적 해석가들은 실체의 역동성, 실체의 절대적 역량에 너무 주목한 나머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실체와 속성들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역량론자들은 속성에 대한 주관적 해석가들과 달리 속성의 객관적 실재성을 긍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표현과 구성의 관계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스피노자는 한편으로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실체를 구성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표현과 구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속성은 어떻게 실체를 구성하면서 또한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가? 들뢰즈나 마트롱 같은 역량론적 해석가들은 실체의 표현성, 곧 실체의 역동성을 구성적 측면보다 더 중시한다. 그러나 이 경우 실체의 자의성, 실체의 초월성이라는 문제가 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다.

 


2. 스피노자에게 인과관계는 이중적인가?

실체 개념에 대해 제기되는 이러한 의문은 실체와 양태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제기될 수 있다. 역량론자들은 실체에 대한 양태들의 존재론적 의존성이야말로 양태들이 지닌 능동성, 원인으로서의 역량의 근거를 이룬다고 강조한다. 1부 정리 18(“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이나 정리 25의 따름정리(“신은 자기원인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또한 만물의 원인이라고 말해야 한다”) 또는 정리 36(“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등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태들이 실체에 의존하는 존재론적 양상은 어떤 것인가? 어떤 관계,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 양태들의 존재론적 의존성이 양태들의 실천적 역량을 낳는 근거가 되는가? 이 문제에 대해 역량론자들은 상당히 모호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들은 1부 정리 18에 나오는 두 가지 원인 개념, 곧 내재적 원인과 타동적 원인 개념에 의지하여 스피노자의 인과성 개념을 이중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먼저 신과 양태의 본질 사이에 존재하는 내재적 인과성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 양태들 사이에, 양태들의 실존 사이에서 성립하는 타동적 인과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후자가 양태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동적, 갈등적, 예속적 관계의 존재론적 뿌리를 이룬다면, 전자는 이러한 수동성에서 벗어나 능동성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존재론적 기초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한편으로 너무 편의적인 해석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우선 이 경우 스피노자의 내재적 인과성과 데카르트의 인과성 사이의 차이점이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데카르트 역시 피조물들의 행위의 제일 원인은 신이며 피조물들은 신의 역량에 의해서만 운동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스피노자와 달리 물체들의 내재적인 인과 역량을 부정하고, 이를 오직 신에게만 돌리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스피노자의 양태들, 특히 연장에 속하는 물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인과 역량을 지닐 수 있는가? 신과 양태적 본질들 사이에는 내적 인과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답변은 순환논법 그 이상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재적 인과성과 타동적 인과성(곧 양태들 사이의 작용 인과성)을 구분하고 양태들의 본질과 실존을 분리하는 역량론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답변을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해석은 스피노자의 철학과 갈릴레이-뉴턴이 확립한 근대 물리학과의 이론적 관계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운동의 상대성은 순전히 타동적인 인과성을 구현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에 기초를 둘 경우 운동의 동역학적 원인을 사고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철학원리󰡕나 󰡔윤리학󰡕 2부 정리 13 이하에 나오는 자연학에 관한 논의를 꼼꼼히 검토해보면, 스피노자는 정확히 운동의 상대성 개념에 기초를 둔 동역학적 인과성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내재적 인과성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자연학과 단절하는 운동의 상대성 또는 외재적 인과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전제할 경우에만 가능한 것임에도, 역량론적 관점은 이 두 가지 개념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난점은 개체의 개체성에 대한 관점에서도 나타난다. 가령 들뢰즈는 개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 이외에 또다른 본질인 “역량의 정도”(신의 본질의 양태적 표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곧 전자가 본질의 양적 측면을 나타낸다면 후자는 질적 측면을 (또는 전자와 후자는 각각 외연량과 내포량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양자 사이에는 정확히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가? 들뢰즈는 “양태의 본질은 하나의 관계 속에서 영원하게 표현된다” (Deleuze 1969, p.191)고 말하고 있을 뿐, 어떻게 본질과 관계 사이에 서로 상응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3.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실체 개념에 대해, 또한 실체와 양태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역량론이 보여주는 모호성은 인간학과 윤리학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는 두 가지 점만 지적해두자.

첫째, 역량론적 해석은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를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역량론은 이러한 이행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 역량의 증대를 나타내는 기쁨이라는 정서와 적합한 인식의 일종인 “공통 통념”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점이다. 문제는 그보다 좀더 기초적인 데서 생겨난다. 우선 역량론적 해석가들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능동과 수동 개념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스피노자에서 능동과 수동은 각각 적합한/전체적 원인과 부적합한/부분적 원인으로 정의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원인의 두 양상 내지 두 측면을 가리키며, 유한 양태들은 외부 물체와 맺고 있는 변용하기/변용되기의 관계를 통해 역량을 획득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는 수동=변용되기, 능동=변용하기가 아니며, 능동과 수동은 변용을 조직하는 두 가지 관계의 양상들이다.

하지만 역량론자들의 가정에 따르면 양태들은 수동력과 능동력이라는 별개의 힘을 갖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인과성을 내재적 인과성과 타동적 인과성으로 분리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귀결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수동력은 우리의 능동적 힘 자체의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긍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곧 그들이 변용=수동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변용되기=수동이라는 생각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렇다면 능동은 외부 실재들과 아무런 변용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 또는 외부 실재들로부터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다만 우리만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외부의 규정 없이 자기 스스로 원인이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실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러나 이 경우 능동성은 자연적 인과관계에서 벗어남 또는 그것을 초월함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능동성은 스피노자가 가상 중의 가상으로 간주하는 “자유의 가상”과 어떻게 다른가? 이처럼 능동과 수동 개념에 대한 정확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에서도 불명료함과 애매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둘째, 또한 이 때문에 역량론은 왜 스피노자에게 자유는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역량론적 해석에 따르면 각각의 개인들은 관계와 독립적인 본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원칙적으로 개인들의 자유 역시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독립적으로 얻어질 수 있다. 물론 각 개인의 자유가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양립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촉진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자유가 각 개인의 자유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정리 59의 주석에서 “굳건함animositas”과 “관대함generositas”을 정신의 힘, 곧 정신의 능동성의 본질적인 요소로 제기한 이래, 각 개인의 자유와 지복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지복을 수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역량론적 관점에서는 왜 자유와 지복이 이러한 관계적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지 충분히 해명하기 어렵다. 

  

Ⅳ. 관계론적 해석의 요소들  


이처럼 역량론적 해석은 그것이 이룩한 업적과 여러 가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또한 여러 가지 해석상의 난점들을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난점들은 단지 이런저런 이론적 보충이나 정정을 통해 해소할 수 있는 것들이라기보다는 스피노자 철학 전체를 해석하는 관점으로서 역량론이 지닌 내적 한계와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역량론이 이룩한 이론적 성과를 보존하면서 그것이 지닌 난점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역량론과 또다른 해석의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 논문에서 이러한 관점을 관계론이라는 명칭 아래 제시해보려고 시도했다. 우리가 제시한 논점들은 다음과 같이 집약될 수 있다.  


1.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우선 관계론적 해석은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존재론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듯이 실체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원인과 실체, 속성, 양태 및 인과성과 개체성 같은 스피노자 존재론의 주요 개념들이 어떻게 관계론적으로 해석될 수 있고, 또 해석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려고 했다.

 


(1) 스피노자 존재론의 탈실체론적 성격: 자기원인, 실체, 속성

스피노자에서 존재하는 것은 신이라는 유일한 실체일 뿐이며 나머지 모든 것은 이 유일한 실체의 양태들에 불과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스피노자를 실체론의 철학자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정반대로 이는 근본적인 탈실체론적 (반실체론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테제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신만이 유일한 실체이며, 오직 실체만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실체는 하나의 존재자로 간주될 수 없으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데카르트 또는 라이프니츠에 이르는 실체론의 공통적인 논점, 곧 존재하는 모든 것(그것이 개체이든, 유한한 실재이든)은 실체들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성립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기원인은 스피노자 철학의 이러한 탈실체론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전통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의 실체론적 성격을 대표하는 상징처럼 간주되어 왔다. 범신론적 해석은 이 개념이야말로 스피노자의 실체가 부동적이고 실정적인 절대적 일자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간주한 반면, 역량론적 해석은 여기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역동성의 근거를 발견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입장은 자기원인을 궁극적인 근거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윤리학󰡕의 텍스트를 꼼꼼히 검토해보면 이 개념은 스콜라철학이나 데카르트의 경우와는 달리 비신학적인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자연의 인과 작용을 “자기”의 재귀적 구조와 분리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기원인은 초월적이거나 외재적인 근거를 요구하지 않는 자연의 자립성을 넘어 있음 그 자체로서의 자연의 익명적인 인과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 역시 탈실체론적이며 비재귀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실체에 대한 해석의 근본 쟁점은 실체와 속성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다. 속성의 주관성과 실체의 단순성을 주장하는 범신론과 달리 역량론은 속성들의 실재성을 긍정하며, 속성들을 실체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역량론(특히 게루와 들뢰즈)은 속성들과 실체 사이에 존재론적 위계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여전히 실체를 속성들을 통합하는 일종의 기체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실체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이라면, 이러한 실체의 내재성은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에서 성립한다. 곧 신 또는 실체는 속성들의 집합, 속성들의 관계 전체와 다르지 않으며, 속성들보다 존재론적으로 상위의 실재가 아니다. 신 또는 실체는 속성들 전체와 다르지 않다는 스피노자의 주장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실체가 함축하는 이러한 구성적 성격 또는 관계론적 특성을 간과할 경우, 역량론이 강조하는 실체의 절대적인 역량, 실체의 자기원인적 특성은 실체의 초월성 또는 적어도 실체의 재귀성(再歸性)(따라서 실체의 주체성)의 이론적 알리바이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이 내재론적이라면, 이는 그것이 관계론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2) 실체와 양태의 관계: 변용과 연관의 인과이론

실체와 양태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관계론적 특성은 관철된다. 스피노자에서 실체-양태 관계는 일의적으로 인과관계로 표현되며, 따라서 이 관계에 대한 해석의 쟁점은 인과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내재적 인과성과 타동적 인과성을 분리하는 역량론적 해석과 달리 관계론적 해석은 내재적 인과성과 타동적 인과성을 대립시키거나 분리해서는 안되며, 양자 사이에는 이론적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스피노자의 인과이론은 갈릴레이가 정초한 운동의 상대성 개념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를 양태들의 인과 역량과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동역학을 위한 형이상학적 토대를 제공해준다.

스피노자의 인과이론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가지 핵심 개념은 “연관”(connexio 또는 concatenatio)과 “변용affectio”이라는 개념이다. “연관”은 스피노자 저작에서 널리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연구자들에게 별로 주목받지 못한 개념이지만, 스피노자 인과이론의 관계론적 특성을 해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개념이다. “연관”은 스피노자의 인과성은 고립된 개체들 사이의 관계에 기초를 둔 인과성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른 실재들과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는 개체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인과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곧 인과계열의 최초의 항을 전제하고 있는 목적론이나 기계론과 달리 스피노자의 인과성은 항상 이미 다수의 항들을 전제하고 있다.

“변용” 개념은 (유한) 양태들 일반을 가리키는 존재론적 명칭이면서 (유한) 양태들이 실존하고 작용하는 방식들을 가리키는 행위론적 개념이기도 하다. “변용”은 유한 양태들이 지닌 인과 역량은 “변용하기afficere”의 역량의 표현이며, 변용하기의 역량은 “변용되기affici”의 능력을 전제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인과이론에서 변용 개념의 중요성은 역량론적 관점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유한 양태들의 인과 역량은 관계와 독립적인 개체들의 내적 본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양태들이 다른 양태들과 맺고 있는 관계들로부터 비로소 형성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연관과 변용 또는 변용의 연관이라는 개념은 역량론적 해석에 비해 스피노자의 인과성 개념이 지닌 일의성을 좀더 정확히 보여준다.

 


(3) 관계로서의 개체

스피노자의 개체론 역시 관계론적 해석이 지닌 이론적 우월성을 잘 보여준다. 스피노자의 개체 개념 및 개체화 이론의 가장 큰 특징은 (“개체”의 어원의 함축과 달리) 개체를 분할될 수 없는 원초적인 실재로 간주하지 않고 관계를 통해 성립하는 합성체로 간주한다는 점에 있다.

역량론적 주석가들은 스피노자의 개체 개념의 이러한 특성을 비교적 충실하게 이해하고 있으나, 인과이론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게루나 마트롱, 들뢰즈 또는 마슈레 같은 역량론의 대표자들은 한편으로 스피노자에서 개체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통해 구성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단순한 물체들”을 일종의 원자와 같은 실재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개체의 본질은 양적 측면(곧 “관계”)만이 아니라 또한 질적 측면(“역량의 정도”)을 지니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역량론적 주석가들은 인과성만이 아니라 개체에 대한 해석에서도 개념의 일의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스피노자에서 개체들은 부분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개체들은 이러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 이외의 다른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 코나투스 내지 욕망으로 표현되는 인간 개인들의 본질 역시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을 비롯한 유한 양태들은 다른 양태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개별성, 자신의 본질을 얻으며,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실존한다.

개체들을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의 관계 및 개체들이 다른 개체들과 맺는 관계 이외에 별도의 개체의 본질을 설정하게 되면, 스피노자의 인과론과 개체론 사이의 내적 연관성이 제대로 해명되지 않을뿐더러 개체들이 지닌 실존과 행위 역량의 원천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이행하는 데서 실천적 동력으로 작용하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인간학, 윤리학 사이의 이론적 일관성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체를 관계론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2. 스피노자의 인간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1부에서 전개된 이러한 논의는 자기원인과 실체에서 개체에 이르는 스피노자의 존재론이 일관되게 관계론적 관점에 입각해 있음을 잘 보여준다. 2부에서 우리는 어떻게 관계론이 인간학의 영역에서도 관철되고 있는지 해명하려고 했다.

 


(1) 상상적 관계: 스피노자 인간학의 모체

상상적 관계라는 개념은 2부 전체의 논의에 대해 이론적 모체를 제공해준다. 스피노자의 인간학은 상상적 관계 또는 (라캉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상상계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의 윤리적 기획의 핵심을 이루는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은 상상적 관계의 양면성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인간학의 가능성에 주목하지 못한 범신론적 해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간학에 관한 논의에서 역량론적 해석의 맹점 중 하나는 스피노자에서 상상 개념이 지닌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은 동시대의 철학자들과 비교해볼 때, 인간의 삶 전체의 외연을 설정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 특징과 독창성을 찾을 수 있다. 곧 스피노자에게 상상은 단순히 인식론적인 기능(그것도 부정적인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자연 안에서 인간의 고유한 세계를 형성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에게 상상은 특정한 인지적 능력facultas을 형성하기 이전에 집합적인 관계의 의미, 곧 상상계의 의미를 가진다.

집합적인 관계로서 상상계는 이중적인 특징을 지닌다. 이는 한편으로 인간의 삶의 자연적 조건을 구성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목적론적 편견과 미신의 인간학적 뿌리를 이룬다. 상상의 자연성은 그것이 우리의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조건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반면 상상의 가상성은 자신의 욕구는 의식하되 그러한 욕구를 산출한 원인들에는 알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무지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상상이 인간의 자연적 조건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가상성은 단순히 오류로 치부할 수는 없으며,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의 조건 및 정서적 구조를 개조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스피노자의 윤리적 실천의 핵심 목표가 된다.

 


(2) 인식과 정서: 수동에서 능동으로

이러한 상상의 양면성 위에서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윤리학에 대한 논의가 진행된다. 스피노자에게 관념과 정서는 인간의 심리적인 활동의 두 축을 구성하며, 이는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이라는 윤리적 기획에 따라 진행된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에서 독립적인 인식론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그릇된 시도다. 스피노자에서 인식의 문제는 부적합한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이라는 과제, 곧 능동화라는 윤리적 기획의 일부로서만 존재한다.

이러한 이행의 핵심 계기를 공통 통념들의 형성에서 발견한다는 점에 들뢰즈를 비롯한 역량론 주석가들의 공적이 있다. 하지만 들뢰즈의 논의는 이중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우선 그는 상상과 이성의 관계, 또는 1종의 인식에서 2종의 인식으로의 이행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공통 통념들은 상상적인 지각 능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통 통념들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실재들을 동시에 지각할 수 있는 상상의 능력에 기반하여 자연의 통상적 질서에서 벗어나 실재들 사이의 일치와 대립,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둘째, 들뢰즈는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에 대한 설명에서도 난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가 기쁜 정념의 역할을 강조할 뿐, 사람들을 수동적인 상태 속에 고착되게 만드는 정념적 구조에 주목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놀람이라는 데카르트의 개념을 변형시켜 이러한 고착이 일어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들뢰즈 해석의 한계는 궁극적으로 그가 스피노자의 수동과 능동 개념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스피노자에서 수동은 변용 그 자체와 동일시될 수 없으며, 또한 능동은 외부 물체들에 의한 변용으로부터의 탈출로 간주될 수도 없다. 수동과 능동은 모두 일종의 원인이며, 문제는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원인인 수동의 상태에서 전체적이고 유기적인 원인인 능동으로 이행하는 데 있다.

 


(3) 자유 개념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신을 향한 사랑과 신의 지적 사랑

이렇게 해서 우리는 스피노자 철학의 궁극적인 주제인 윤리적 문제에 도달한다. 자신의 필생의 저작에 󰡔윤리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스피노자에서 윤리의 문제는 부차적인 주제가 아니라 철학적 기획 전체의 방향을 규정하는 쟁점이다. 특히 자유는   󰡔윤리학󰡕 5부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윤리적 실천의 중핵을 이룬다는 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이 해명해야 할 주요 개념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의 근본적인 윤리적 지향을 강조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해명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역량론적 해석의 중요성과 강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들뢰즈나 마슈레 같은 역량론 해석가들은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을 정확히 해석하지 못하고 있으며, 2종의 인식과 3종의 인식의 관계, 신을 향한 사랑과 신의 지적 사랑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은 개인의 주체적인 행위라는 관점으로는 충실히 설명될 수 없다. 각각의 개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개체는 자신의 부분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 및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성립한다는 그의 존재론적 원리에서 일관되게 따라 나오는 결과이자, 자유를 저해하고 인간을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조건에 묶어두는 가상적 조건들이 상호 개인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인간학적 조건의 귀결이기도 하다.

자유를 향한 스피노자의 윤리적 기획은 이중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우선 2종의 인식을 통해 각각의 개인들의 실존과 행위를 제약하는 상상적인 조건들을 해체하고 이를 신을 향한 사랑으로 대체하려는 운동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원인으로서의 신과 인간 사이의 분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충분치 못한 활동이다. 윤리적 기획이 온전히 완수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개인의 윤리적 주체화의 활동을 다른 개인들과의 관계 맺음의 활동과 내적으로 연결시켜 주는 3종의 인식 및 신의 지적 사랑이 필수적이다. 신의 지적 사랑은 전통적인 신비주의 신학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이러한 개인화와 사회화, 또는 주체화와 탈주체화의 이중적인 운동이다. 

  

Ⅴ. 논문의 실천적 함의

 


마지막으로 우리 논문의 실천적 함의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해두기로 하자. 범신론적 해석과 역량론적 해석의 차이점은 단순히 이러저러한 주제들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로 환원되지 않으며, 스피노자 철학의 전체적인 성격 및 지향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함축하고 있다. 범신론적 스피노자 해석이 윤리적 실천이나 사회적 문제들에 무관심한 사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스피노자 상을 만들어냈다면, 반대로 역량론적 해석은 스피노자를 (마르크스 또는 그 이외의 다른 몇몇 이단적인 철학자들과 더불어) 가장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철학자들 중 하나로 제시한다. 이 점에서는 특히 안토니오 네그리가 가장 일관적이고 철저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지만,15) 사실 그 이전에 이미 알튀세르나 들뢰즈 또는 알렉상드르 마트롱 등과 같은 철학자들 역시 스피노자 철학을 혁명적인 철학으로 제시했다. 곧 스피노자는 철학사에서 보기드문 이론적 혁명을 수행한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혁명적 실천에 영감과 동력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도 혁명적이라는 것이다.16)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마슈레가 스피노자 사후 3세기에 걸친 스피노자주의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20세기의 스피노자주의를 “정치적 스피노자주의”라고 부른 것은 일리가 있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17)

우리가 이 논문에서 제시한 관계론적 해석 역시 그 나름대로의 실천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물론 관계론은 역량론이 제시하는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스피노자의 상을 거부하지 않으며, 그것을 온전히 긍정하고 수용한다. 다만 관계론은 역량론적 해석이 함축하는 막연한 낙관주의와 그것이 자칫 빠져들기 쉬운 이론적 인간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할 뿐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이 현재의 이론적 작업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이는 스피노자가 자율적인 지적ㆍ정치적 역량을 갖춘 혁명적인 주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든가 욕망과 기쁨의 무조건적 긍정성을 주장했다든가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실체나 주체, 인과성, 개체, 상상, 합리성과 비합리성, 능동과 수동, 자유 등과 같은 근대 철학의 주요 범주들과 더불어 이러한 범주들에 기초를 두고 있는 국가, 사회계약, 주권, 대표, 복종, 지배와 예속, 시민, 민주주의 등과 같은 정치학의 개념들을 쇄신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 곧 관계론적 관점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독창성과 현재성을 찾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소묘해본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은 지난 1960년대 이래 좌파의 이론적 작업과 정치적 방향설정에 많은 영향을 끼쳐온 역량론적 해석에 대한 자기비판과 자기쇄신을 위한 이론적 모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관계론이 함축하는 실천적 의미들 중 몇 가지 주요 측면만을 지적해두기로 하겠다.  


(1) 관계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사회적 관계에 대한 설명을 위한 한 가지 이론적 모델을 발견한다. 지난 1960년대 이래 알튀세르나 들뢰즈, 또는 네그리 같은 철학자들은 이미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하여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 독창적인 이론적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 이러한 작업은 많은 이론적 성과를 배출했고 현재에도 사회과학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관계론적 해석은 이들의 작업을 계승하되, 이를 좀더 일관된 관계론의 기초 위에서 정정하고 확장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줄 수 있다. 가령 알튀세르의 구조 인과성 개념은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존재론의 범주들에 직접 의지하고 있는 개념이며, 󰡔자본론󰡕에 대한 이해나 자본주의의 구조에 대한 분석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Althusser et al. 1996 참조). 하지만 이 개념은 전체와 부분 또는 구조와 요소들 또는 구조와 정세 같은 구조주의적인 통념들에 많이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과성 자체에 대한 이해에서도 상당한 모호성을 보여주고 있다. 관계론적 관점에서 이 개념을 다시 해석하고 정련한다면, 구조인과성 개념이 지닌 이론적 잠재력을 좀더 풍부하게 드러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조주의 철학의 이론적 핵심을 새롭게 사고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2) 현대 스피노자주의의 주요 경향 중 하나는 욕망을 결핍으로 간주하는 관점에 맞서 스피노자를 긍정적인 욕망의 옹호자로 동원하는 데 있다. 특히 들뢰즈(ㆍ가타리)나 네그리 계열의 이론가들에서 볼 수 있는 이런 경향은 스피노자 철학을 역량론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이론적으로 충분치 못하며 생산적이지도 못하다. 무엇보다도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또다른 주체의 철학, 관념론적 전통이나 라캉 계열의 정신분석학적 전통에 맞설 수 있는 유물론적 주체의 철학으로 간주하게 될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스피노자 철학을 일종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를 위한 이론적 전거로 활용하려는 시도를 낳을 뿐이다.

스피노자가 욕망의 긍정성을 옹호했다면, 이는 원리나 전제로서가 아니라 과정이나 결과로서 그런 것이다. 곧 스피노자가 옹호하는 욕망의 긍정성이나 능동 정서는 인간, 더욱이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는 실제 개인 주체일 수도 있고 집단적인 개인 주체일 수도 있다)이 선험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본질이 아니라, 개인적인 실천과 집합적인 투쟁의 상호 관계 속에서 형성하고 획득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피노자의 윤리적 실천에 고유한 특징인 개성화와 사회화의 이중운동이 지닌 한 가지 형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욕망이나 정서의 긍정성 또는 능동 정서의 가능성에 대한 옹호는 욕망이나 정서 일반에 대한 관계론적 인식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관계론적 관점에서 욕망과 정서 개념을 이해할 경우에만, 심리적인 범주들을 개인의 차원에 한정하지 않고 구체적인 제도적 관행이나 상호개인적(또는 “관개체적(貫個體的)transindividual”) 행위의 차원과 결합하여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도 역량론은 관계론으로 대체되거나 적어도 보충되어야 한다. 

 

(3) 정치철학적인 관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의 의미는 반계약론적 정치철학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으로 표현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사회계약론을 국가를 사고하기 위한 이론적 모델로 받아들이지 않은, 서양 근현대 정치철학 전통에서 매우 드문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이는 그의 철학의 관계론적 특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는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에서 모두 나타나는 경향이지만, 특히 󰡔윤리학󰡕의 이론적 성과를 반영하고 있는 󰡔정치론󰡕에서 좀더 원숙하게 표현되어 있다.18)

네그리는 이런 점에 주목하여 스피노자를 (마키아벨리와 더불어) 반자유주의적인 정치이론을 위한 이론적 지주로 삼고자 했으며, 이를 대표하는 것이 유명한 “다중multitudo”이라는 개념이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다중 개념은 독특하고 자율적인 개인들의 연합 또는 공통의 연관망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제국에 맞서 해방의 정치, 혁명의 정치를 사고하기 위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신학정치론󰡕의 정치적 분석이 잘 보여주듯이 스피노자는 혁명적 정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치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주체(개인적 주체이든 집단적 주체이든)라는 범주를 알지 못했다. “다중” 또는 “대중들”19)이라는 개념 역시 집합적 주체를 가리킨다기보다는 국가의 법적 구성의 존재론적 한계를 가리키거나 또는 정치적으로 양가성을 지닌 국가의 자연적인 기초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관계론적 관점에서 볼 때 스피노자 정치학의 의미는 그가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제시했다거나 국가 바깥에 존재하는 혁명적인 정치적 실천의 공간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스피노자 정치학의 중요성은 계약론에 의거하고 있는 자유주의적인 정치나 반계약론적이되 혁명적인 주체의 가능성에 의지하고 있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법적 이데올로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계약론적 모델에 맞서 관계론적 문제설정을 제안하고 있는 미셸 푸코의 몇몇 저작20)이나 알튀세르의 몇 가지 지적들은 스피노자 철학의 반계약론적 성격을 현대 사회에 대한 분석에 원용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들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좀더 보완하고 발전시킬 만한 가치가 있는 작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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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c, Sylvain(1989), Spinoza en Allemagne, Klincksi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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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톨랜드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는 Champion 2003 참조.

2) “범신론 논쟁Pantheismusstreit”이라고 불리는 이 논쟁의 주요 텍스트들을 묶은 선집으로는 Scholz & Müller 2004(초판은 1916)를 참조. 이에 관한 주석으로는 Zac 1989를 참조할 수 있다.

3) 헤겔을 비롯한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 스피노자 수용에 대한 상세한 연구로는 Vaysse 1994; Macherey 2004 등을 참조할 수 있다.

4) 독일 관념론에서 스피노자 수용이 물론 이러한 범신론적 해석으로 모두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셸링은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스피노자 철학, 특히 실체 개념을 중심으로 한 그의 존재론에 대해 훨씬 호의적이었고, 또한 훨씬 세심한 독해자였다. 이러한 경향은 초기 저작인 󰡔철학의 원리로서 자아󰡕에서부터 말년의 저작인 󰡔계시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관철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셸링의 스피노자 해석은 우리가 뒤에서 말할 역량론적 해석의 이론적 원천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셸링과 역량론적 해석 사이의 이론적 연관성에 대한 검토는 매우 흥미있는 주제이지만, 이는 별도의 논의에서 다루어볼 생각이다. 셸링의 스피노자 해석에 대해서는 특히 Vaysse 1994를 참조할 수 있다.

5) 한편 관념론적인 입장과 달리 유물론의 노선에서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은폐된 유물론” 내지 무신론의 한 형태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유물론자들은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서 나타나는 민주주의적인 경향을 높이 평가했다. 유물론의 역사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평가에 대한 고찰로는 Tosel 2005 참조.

6) Van Vloten & Land. ed., Benedict de Spinoza Opera quotquot reperta sunt. La Haye, 1883-1884; Carl Gebhardt ed., Spinoza Opera. Heidelberg, 1925.

7) 게루는 󰡔윤리학󰡕 1부와 2부에 대한 매우 정밀하고 풍부한 주석서 두 권을 남겼으며, 철학사 연구의 학문적 규범에 가장 충실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반면 들뢰즈는 스피노자 철학의 문자에 충실하면서도 매우 독창적인 입장(“표현주의”로서 스피노자 철학)에 따라 체계 전체를 재구성하고 있다. 마트롱은 두 사람과 달리 스피노자의 정치학에 대한 “구조주의적” 독해를 통해 스피노자의 정치학과 철학 체계 전체의 관계를 엄밀하게 연역해내고 있다.

8) Pierre-François Moreau의 감수 아래 간행되고 있는 새로운 스피노자 전집은 8권으로 기획되었으며, 2005년 현재 󰡔신학정치론󰡕과 󰡔정치론󰡕 2권이 출간되었다(PUF 출판사).

9)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Macherey 2004 참조.

10) 이 표현은 피에르-프랑수아 모로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지만(Moreau 1975), 이들의 공통적인 지향을 표현하는 데 적절한 용어라고 볼 수 있다.

11) Tosel 2001 참조.

12) 네그리는 이탈리아 출신의 이론가지만, 프랑스 주석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또한 그 자신이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역으로 프랑스 연구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른 프랑스 주석가들과 한데 묶어도 무방할 것이다.

13) 물론 이들의 작업을 “역량론”이라는 명칭으로 모두 포괄하는 것은 무리다. 이들이 매우 다양한 관심과 입장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중 일부 주석가들은 역량론적 관점을 비판하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이론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역량론적 관점과 관계론적 관점이 갈등 상태에서 혼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14) 20세기 후반 프랑스 스피노자 연구의 동향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1; 2004a를 참조하기 바란다.

15) 이는 네그리의 주요 스피노자 연구서의 제목들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유럽의 스피노자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그의 주저의 제목은 󰡔야생의 별종L'Anomalia selvaggia󰡕(1981)이었으며, 그 이후에 출간된 또다른 스피노자 연구서의 제목은 󰡔전복적 스피노자Spinoza sovversivo󰡕(1992)였다.

16) 알튀세르는 󰡔“자본”을 읽자󰡕(1965)에서 스피노자를 “철학사에서 전례없는 이론적 혁명”을 이룩한 철학자이며, “마르크스의 직접적인 선조”로 간주될 수 있는 유일한 철학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는 이러한 주장을 증명하기 위한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 또한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뒷면 소개글에서 스피노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철학에 대한 통상적인 정의들은 스피노자에게 제대로 적용되지 못한다. 그는 루크레티우스나 그 이후의 니체 말고는 견줄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철학을 근본적인 해방과 탈신비화의 기획으로 인식했으며, 파문과 증오를 불러일으킨 고독한 사상가였다.” 마트롱은 󰡔스피노자에서 개인과 공동체󰡕에서 제 3종의 인식에 의해 가능해진 지적ㆍ윤리적 공동체를 “현자들의 공산주의”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17) Macherey 1992 참조.

18) 스피노자 정치학의 반계약론적 입장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4b; 2005 참조.

19) 이는 “multitudo” 개념에 대한 두 가지 가능한 번역어들이다. 네그리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multitudo” 개념을 “다중”이라고 번역해서 사용하는 반면, 발리바르는 이 개념의 가장 좋은 불어번역어로 “masses,” 곧 “대중들”이라는 용어를 제시한 바 있다.

20)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특히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가 중요한 작업이다. 또한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 1권󰡕의 몇몇 언급들도 시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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