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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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적'이라는 말이 인간 행위와 무관하다는 뜻이라면 핸디캡(handicap)은 '선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간 기능의 일부 영역(들)에 생긴 손상은 인간의 개입 없이도 있을 수 있지만, 사회가 이러한 손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다루는 경우에만 핸디캡이 된다.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에게는 장애가 있다. 죽을 운명이고, 시력이 나쁘며, 무릎이 약하고, 등과 목이 안 좋고 건망증이 있는 등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다수(또는 가장 강력한 집단)가 이러한 장애를 갖고 있을 때 사회는 여기에 맞춰서 적응한다. (-) 특정 사람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집중적인 훈련을 통해 특정한 성취를 이뤄내더라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성취를 '정상적'인 일반인들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4분에 1600여 미터를 달릴 수 있는 사람만 일하러 갈 수 있는 세상을 설계하지 않으며, 우리가 4분에 1600여 미터를 갈 수 있도록 돕는 인공 기관(자동차, 기차, 버스)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장애에 대해 맞추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지닌 손상이 일반적이지 않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걷거나 달리는 사람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기 위해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자신의 발로 불가능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자동차를 이용하는 사람 사이에 타고난 '선천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 경우 모두 인간이 갖고 있는 재주를 통해 개인이 할 수 없는 것을 보충한다. 차이가 있다면 차는 일반적이고 휠체어는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


(-) 유럽과 미국에서 유능한 성인이라는 허구를 점점 더 지지하면서, 이른바 "스스로 값을 지불"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비용을 공개적으로 규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애인교육법과 장애인법이 요구하는 특별한 지원 구조에 드는 비용이 '자연적'이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비용은 장애인과 이른바 비장애인 간의 사회 이전의 차이에서 생기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를 평균적인 사람, 즉 우리가 '정상'이라고 오도하여 부르는 사람에 맞게 세상을 설계해 왔기 때문에 생기는 비용이다. 우리는 완벽성이나 완전무결함이라는 나르시시즘적 허구로 정당화하면서, 사회 제도가 지배 집단의 필요에 의해 입각해 조직되어 온 결과 좀 더 큰 취약성을 안게 된 다수의 사람들이 지니는 세상 속에서 살아갈 권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_마사 너스바움_혐오와 수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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