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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탕수육 - 북디자이너의 마감식
김마리 지음 / 뉘앙스 / 2025년 9월
평점 :
휴가는 인생 마감 후에요, 라고 자조 섞인 농담을 할 정도로 바쁜 사람. 작업물이 곧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디자이너기에 "어떤 디자인도 다 하지만 아무 디자인이나 하진 않"는 사람. 김마리 디자이너의 첫 책 <어떤 탕수육>.
책에 관여하는 각자의 사정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출간일정. 책 만드는 일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질문들을 삼키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시간을 주체적으로 관리하기 어려운 특성을 가진 북디자이너로서 작가 김마리에게 마감은 홀가분한 마침표가 아니라 종종 마음을 옥죄어오는 또다른 마감이기도 했다. 그는 일부러 시간과 마음을 써 지난한 작업 끝에 고생한 나를 위한 행복한 식사를 하는 '마감식'으로 마감에 즐거운 기억을 덧입힌다. 그것은 언제나 찾을 수 있는 평범한 음식 '탕수육'이다. 미취학 아동기에 가족들과 처음으로 탕수육을 먹었던 그날. 지금도 기억의 끄트머리 어딘가에서 반짝이는 생애 첫 탕수육의 맛. 좋아하는 사람과 일부러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그 맛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은 어쩜, 사랑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작가는 묻는다.
이번 책에서 김마리 디자이너는 자주 발길이 닿는 곳과 일부러 찾아간 낯선 서른 곳의 중국집을 균형 있게 소개한다. 부어먹을까 고민하다가 오늘은 찍어먹기로 하는 이들을 위해, 부먹/찍먹/볶먹 여부와 가격대까지 친절히 알려준다. (그러나 정작 김마리 작가는 주는 대로 먹는다고 한다. 주방에서 가장 맛있는 방식대로 요리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깨닫는다. 탕수육의 이 복잡한 맛은 설탕이나 식초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생도 그렇다. 다양한 슬픔과 다양한 기쁨을 맛볼수록 우리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각자의 개성만 존재할 뿐 통일된 콘셉트나 스타일이 부재한 맥락 없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정돈된 색감을 선호하고 주로 다루지만 불협화음처럼 느껴지는 컬러 조합에 상쾌한 인상을 받기도 한다. 세련되지 않은 멋, 의도하지 않은 조화로움이 공간을 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작가는 알고 있는 것이다. 목소리가 조금 올라가도 괜찮고, 술잔 부딪치는 소리가 어울리는 공간. 경쾌하게 웍을 움직이는 소리와 기름진 음식이 어우러져 기분이 고양되고 하루의 피로도 사라지게 하는 곳. 작가에게 중국집은 그런 곳이다.
다른 시그니처 메뉴에 밀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너무나 잘 만들어졌지만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탕수육을 보며 느끼는 안쓰러움. 그런가 하면 정성을 들여 관리한 양념 용기 하나에 올라가는 신뢰도. 소스에 살포시 올라앉은 녹색의 작은 완두콩에 담긴 마음 씀씀이, 따뜻한 차와 시원한 생수를 같이 내어주는 세심함을 알아채는 눈을 가진 그다. 손님이 끝없이 줄지어 있는 반점 내부가 2인3각 같은 직원들의 합으로 고요하고도 정확하게 운영되는 것을 보며 10년을 한 출판사에서 일하며 공기와 숨결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하던 동료들의 감각을 떠올린다. 일하고 싶게 만드는 기분을 주었던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도.
맛집이 많기로 소문나 메인거리 이름이 '연희맛로'일 정도로 웬만한 맛이 아니면 살아남기 어려운 동네. 이곳을 오래 지켜봐온 사람으로서 작가는 어느 집의 탕수육이 바삭하고, 어느 집의 소스가 달콤쌉쌀한지 눈 감고도 말할 수 있다. 시절의 마음이 거리의 틈마다 여전히 묻어 있는 동네에서 긴 시절을 살았던 작가. 긴 시간 동안, 오늘 같은 하루를 얼마나 많이 쌓아왔을까 올려다보게 되는 중국집의 오래된 간판. 오래된 지역은 난개발로 사라지거나 허물리는 오늘, 작가는 이 식당이 지금의 자리에서 성실히 이어지기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한다.
한번 먹으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맛, 손에 닿기 쉬우면서 마음까지 닿는 맛.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한 군만두'와 오래 봐온 동네 중국집 사장님의 적당한 무관심과 적당한 기척에는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품격이 있다. 작가의 말대로 무심한 듯한 말투가 때론 따뜻함보다 더 강하게 마음을 녹이는 것이다. 잘 알던 맛, 그 익숙함이 지금의 나를 지켜줄 거 같을 때 그는 "아무 일도 없던 얼굴을 하고" 그곳에 앉아 탕수육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