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경계(境界)>
힘없는 나라의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인 것을...
내 아름다움이 이리도 화(禍)가 될 줄 몰랐다...
<문제적 인간 연산>, 폭군의 대명사격인 연산군은 비극적 가정사를 지닌 임금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을 '문제적 인간'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연산군의 할머니, <인수대비 한 씨>이다. 연산군이 직접 머리로 받을 만큼 증오했던, 그리하여 왕실의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행장조차 제대로 남지 않았던 인수대비 한 씨는 조선 초 명문가인 청주 한 씨, 한확(韓確)의 막내딸이었다.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조차 '난폭한 며느리'라는 뜻의 '폭빈(暴嬪)'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던 한 씨는 뛰어난 미모와는 달리 차가운 성격 때문에 '얼음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법도에 있어서 인정사정 보지 않는 냉철한 여인이었다. 죽은 세자의 둘째 아들에 불과한 성종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한명회와 결탁할 정도로 정치적이었고, 마음에 들지 않은 며느리에게 사약을 내릴 정도로 냉정한 여인이었다. 연산군의 어린 시절을 지배한 사람이 바로 <인수대비 한(韓) 씨>였다.
그렇다면 인수대비 한 씨는 어떤 집안에서 자랐기에 그렇게 강한 자아를 갖게 되었을까? 얼마나 당당한 집안의 여인이었기에 스스로 왕을 만들고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갖게 되었을까? 인수대비의 아버지 한확은 조선 초 명나라와의 관계에 큰 공을 세운 외교관이었다.
그날의 한 가지 사건이 있기 전까지...
당시, 그의 집안은 끼니 걱정을 하며 살았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몰락한 양반가의 집안이었을 뿐이었다. 그랬던 집안이 어떻게 단 몇 년 만에 왕가와 혼인을 맺을 정도로 대단한 명문가가 되었을까?
그 배경에는 조선 초, 명나라와의 굴욕적인 외교사가 숨어 있다. 바로 <'공녀(貢女)'> 문제.
인수대비의 고모이자 한확의 두 누이 한규란, 계란 자매는 당시 명나라에 바쳐진 공녀였으며, 그 집안의 번성은 바로 이 두 여인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한확의 누나인 <한규란>은 영락제(永樂帝)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여인이었다.
당시 명나라 환관들은 경복궁에서 공녀를 뽑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그들은 반드시 양반의 딸들을 데려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딸을 보내기 싫은 힘 있는 양반들은 명색만 남은 몰락한 양반의 딸들을 데려가게 했다. 만일 한확의 집안이 힘이나 권세가 있었다면, 그 누나나 동생이 공녀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똑똑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누이로 둔 덕에 한확은 조선 왕실에서 승승장구 하였다.
집안은 조선 제일의 명문가가 되었고, 모든 영화를 누렸다. 한확은 누이의 힘을 빌어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를 적당히 물리치는 등 외교에 큰 공을 세웠다. 영락제의 총애를 받은 누이에 힘입어 명나라 벼슬까지 한 그는 조선 왕실에서 일종의 ‘치외법권’의 권세까지 누렸다. 이후, 한확은 조선의 실세가 되고, 결국 왕자였던 수양대군의 맏아들에게 자신의 막내딸을 시집 보내게 된다. 그녀가 바로 인수대비이다.
세상, 가장 화려한 새장.
눈부시도록 화려했지만 그 살얼음 같던 삶.
지고의 아름다움이 화(禍)가 된 여인들.
그렇다면 그의 누이들도 행복했을까? 아니, 그때 끌려간 <공녀(貢女)>들은 행복했을까?
조선 왕실은 한확의 큰누이가 죽은 후 십여 년이 지날 때까지 공녀들의 생활에 무관심했다. 조카를 죽이고 황제에 오른 영락제는 포악하고 쉽게 남을 의심하는 성격이상자였다. 50세 이상 차이가 나는 포악한 황제를 모시는 일은 어린 나이의 조선의 여인에게는 하루 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일이었다.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현명하게 이겨냈지만, 한확의 누이는 영락제가 죽자 결국 24세의 나이로 산 채로 순장(殉葬)을 당한다. 정황상 한확은 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자세한 상황을 조선 왕실은 물론 집안에도 전혀 알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확은 영락제의 손자인 선덕제(宣德帝)가 즉위하자, 자신의 하나뿐인 여동생 <한계란>을 또다시 공녀로 보낸다.
이 여동생이 인수대비의 고모, 명나라 역사에도 이름이 남은 '한계란(韓桂蘭)'이다.
그녀가 공녀로 갈 즈음, 한확의 집안은 조선 제일의 명문가였다. 한계란도 어린 시절,
공녀로 간 언니 덕에 온갖 영화를 누렸다. 그녀는 공녀가 되는 것을 죽기로 거부했지만 한확은 끝내 여동생을 공녀로 보냈다. 죽음의 길을 가듯 공녀로 간 한계란은 선덕제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대부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다른 공녀들과는 달리 한계란은 공녀로서는 드물게 일흔이 넘도록 장수하였다.
본 소설이 공녀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인수대비의 고모가 황제의 총비(寵妃)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가 순장을 당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더욱 놀라웠던 점은 부귀와 영화, 그 어느 것 하나 모자람 없었던 한확이 자기 누이의 죽음의 진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여동생을 또다시 공녀로 보냈다는 것이었다.
힘이 없는 나라, 몰락한 가문.
가문에는 영광, 나라에는 수치.
그렇게 시작된 기획에서 국내에는 공녀에 대한 자료가 형편없이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들에 대한 '고국'의 무관심은 무서울 정도였다. 처음에는 비명에 떠난 여인들 때문에 가슴이 아팠고, 후에는 일흔 넘게 살았던 한계란의 고독에 공감했다.
그녀들은 고국을 위해 명나라 황제의 여자로만 살 수도 없었고,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기에 조선여인으로 살 수도 없었다. 그녀들은 <아슬아슬한 경계 위의 여인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가장 약한 존재들이 희생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이 소설을 옛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도 없었고, 희생에 대한 역사의 무관심에 소름이 돋았다.
본 소설에서나마 한계란(韓桂蘭)으로 하여금, 황제만이 열 수 있다는 중국 자금성의 오문(午門)을 열도록 하고 싶었다. 그녀의 삶은 자신의 불운을 넘어 공녀들의 한을 곱씹는 시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환상으로나마 그녀가 겪고 기억했을 공녀들 의 삶, 그 고독의 처절한 역사를 기록하고 싶었다.
본 소설에서 한계란과 공녀들은 끝내 묻는다. 봄과 경계에 대하여……
이유는 아마도 그녀들의 이야기가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들의 희생에 무관심한 역사에게 그녀의 일들을 싣고 가게 하고 싶다.
어쩌면 지금 경계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작가소개
조정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석사 졸업 ‘문학이론 전공’
* 수상경력: 2006년 문학수첩 작가상 <평균대 비행>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었을 때는 이미 밀레니엄, ‘문학은 죽었다’는 말이 상식처럼 들리던 때였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대량생산 시기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게 유일한 소통이 글쓰기였기에 멈출 수 없다는 것도 이유였다. 소설가의 삶은 여전히 쉽지 않고, 소설가로서도 매번 고통과 한계를 느낀다.
그래도 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므로...
2006년 장편소설 『평균대 비행』으로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았고, 음악 동화 『마에스트로 정명훈과 마법사의 사계절』,『로빈의 붉은 실내』를 썼다.
차례
序 …………………………………………………………………………………………………..……….… 012
1. 주인을 바꾼 날 - 종비(從婢) 장치자(張梔子) …………………………….……….…….… 028
2. 이름을 기다린 날 - 독녀(獨女) 기림 ………………………………………….….…………… 046
3. 제사를 베푼 날
-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 한영정(韓永矴)의 둘째딸 한계란(韓桂蘭) …….…….….… 060
4. 아비를 잃은 날
- 공조전서(工曹典書) 권집중(權執中)의 딸 권소옥(權小鈺) …………………….….….. 096
5. 낙인찍힌 날
- 시위사중령호군(侍衛司中領護軍) 여귀진(呂貴眞)의 딸 여진향(呂眞香) ……...... 118
6. 전생의 날
- 종부부령(宗簿副令) 황하신(黃河信)의 딸 황채주(黃彩珠) ……………………….…... 146
7. 용의 비늘에 오른 날
-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 한영정(韓永 )의 큰딸 한규란(韓槻蘭) ………….…….…... 168
8. 곡속의 날 - 태감(太監) 김복(金福) ………………………………………………….……….. 188
9. 누이를 판 날 - 종비(從婢) 목단(牧丹) ……………………………………………….……… 208
10.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날 - 종비(從婢) 김흑(金黑) ……………………………….…….. 232
11. 운명을 붙잡은 날 - 역관(譯官) 김저(金渚) ………………………………………….…... 254
12. 거울의 날 - 인수대비(仁粹大妃) 한 씨(韓 氏) ……………………………………….… 284
13. 여인을 버린 날 - 종비(從婢) 계아(桂兒) ………………………………………………..... 306
14. 사람을 찾은 날 - 폐비(廢妃) 윤 씨(尹 氏) …………………………………………… 334
15. 나의 날 - 유아(唯我) …………………………………………………………………………...... 350
終 ……………………………………………………………………………………………………………... 356
책 속으로
“예전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나는 자꾸 차오르는 숨을 간신히 삼키고 겨우 눈을 껌벅일 뿐이었다.
“십오 년 전, 낭랑께서는 딸을 얻으셨지요. 저는 그 딸을 이곳 가짜 석림에서 키웠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내가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계아는 단호한 말투로 내 말을 막았다.
“낭랑께서도 아시는 일입니다. 낭랑은 딸에게 살아갈 도리를 가르치겠다며 보내라 하셨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빼앗길 수 없었다는 것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숙이는 계아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담겨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여린 마음은 단단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계아의 눈빛에는 거짓이 없어 보였다.
- 21p. -
“고려와는 다른 나라를 만든다면서 어찌 다시 공녀를 보낸단 말인가?”
“딸자식은 낳지를 말아야지. 어여쁜 얼굴이 화가 되어 고향을 떠나니...
나라가 약해 딸들을 팔아먹는구나.”
통곡 속에 비분강개한 선비들의 목소리도 간혹 들렸다. 나는 애써 서러운 마음을 달래며 눈을 크게 뜨고 고국산천의 모습을 기억에 담았다. 통곡의 길은 길지 않았다.
- 98p. -
“몸을... 몸을 팔다니요?”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말에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라버니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그런 뜻이 아니니라.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끌려간 여인들이 능욕을 당한 것은 사실이 아니더냐?”
“그럼 황실에 끌려가는 것은 다르단 말씀입니까?”
“어허! 무엄하게...”
“집안과 나라를 위해 가라면서요? 전조의 공녀들 또한 같은 이유로 끌려가지 않았습니까? 오라버니 말씀대로 나라가 떠나보낸 여인들입니다. 능욕을 당한 것이 과연 그들의 잘못이란 말입니까? 누이동생에게 공녀로 떠나라 하시는 분이 어찌 그들을 욕할 수 있단 말씀입니까? 그러면서 어찌 이리도 당당하게 동생을 보내려 하십니까? 아버지의 핏줄을 받은 것은 오라버니와 저 둘 뿐입니다. 그런데 오라버니는 저를 보내고 대체 무엇을 지키시렵니까? 오라버니가 지켜야 할 집안은 무엇입니까? 지켜 주지는 못할망정 타국에 보낼 여인을 어찌 우리 임금이 직접 구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라버니는 입을 다물었다.
- 112~113p. -
“그예 온 것이냐? 이름은 무엇이냐? 조선에 정인(情人)은 있었느냐?”
나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흐린 기억 속에 떠오르는 얼굴, 반가의 여인이라면 없어야 할 그 얼굴. 나는 중얼거렸다.
“남들이 손가락질을 한 대도 상관없습니다. 정인만 있으면 다른 모든 것은 부질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여인이 불행하지요... 그때 화동(華童)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면, 저는 어찌 되었을까요? 적어도 아들을 잃지는 않았겠지요. 아니, 저 문을 볼 일도 없었을 터인데... 화동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듣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저를 부르던 날, 속치마에 피로 제 이름을 써 주며 울었지요. 남사당패를 쫓아다니던 아이라 그랬는지 재주가 남달랐답니다. 글씨도 얼굴처럼 꽃 같았지요. 황채주(黃彩珠), 제 이름을 그리 그윽하게 불러준 이가 화동 말고는 없었다. 제 이름이 진주처럼 곱게 빛났던 것도 그때뿐이었지요...
- 144p. -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지.”
“그건 또 무슨 말이래요?”
“중국의 왕소군(王昭君)76)이라는 미녀가 했던 말이니라. 봄은 왔으나 봄이 아니로구나.”
“봄이 왔으면 봄이지, 무슨 말을 그리 어렵게 한대요?”
“왕소군도 나처럼 억지로 오랑캐 나라에 시집을 갔단다.
그 마음에는 봄이 올래야 올 수 없었던 게지.”
“아... 그러니까 그 미녀도 임금님과 오라버니 때문에 억지로 쫓겨난 게로군요?
봄을 빼앗았으니 불한당이 아니라 불춘당이라 해야겠습니다.”
“불춘당? 하하하하...”
나는 아가씨 편을 드느라 생각하고 한 말인데, 아가씨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눈물이 날 때까지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 227p. -
“내게 정인이 있었다는 것을 아느냐?”
“예?”
순간 황 씨가 생각이 나 아찔해졌다. 하지만 광록시소경 대감을 모르지 않았다.
황 씨처럼 처녀가 아닌 채 명나라로 왔을 리가 없었다.
새파랗게 질린 내 얼굴을 보며 작은아가씨는 킥킥 웃어댔다.
“그걸 곧이 믿느냐? 나도 강가에서 아들을 낳았을까봐?
내 마 음에 혼자 두었던 분이 계셨다.
그분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사랑하는 마음도 미워하는 마음도 버리라 하셨다.
물처럼 담으면 담기고 흘리면 흐르라 하셨다. 그러면 살겠느냐?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하지만 어찌 금중에서 그리 사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게 말이다...
- 249~250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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