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가 바뀌고 일년 남짓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민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시기를 겪고 있다. 안으로는 민주주의 개념 자체가 흔들리고 있고 밖으로는 미국발 세계공황의 여파로 더 이상 물러설 곳 마저 없는듯한 막막함 속에서 산다기 보단 견디어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는 화를 내고 누군가는 체념하고 또 누군가는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보복성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때는 냉철한 지식인이었고 또 한때는 국가를 이끄는 장관 혹은 의원이기도 했던 유시민, 그의 현실인식이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그는 지금 화내고 있을까 체념하고 있을까 아니면 원망하고 있을까..

[후불제 민주주의]를 읽으면서 적어도 나는 그의 원망이 읽힌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주인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주권자가 아닌 백성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쥐어 주기만을 기다리는 국민, 건전한 비판보다는 비난 일색이였던 여론과 지식인, 하물러 함께 한 동료에게까지 이르는 그의 비판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선택 받지 못한 정치인으로서 그를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현실은 충분한 값을 치르지 않고 주어진 민주주의라는 선물 앞에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어제 내린 눈 정도로 생각한 국민이 그 값을 치르는 과정이라는 그의 말은 분명 옳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전정부의 가치를 인식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아닐까 했던 것이다.

하지만 [후불제 민주주의]의 시작이 그의 몇 년간의 정치생활에 대한 정리이고,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라는 그의 이야기로 시작된 그와의 오늘 두시간 남짓한 시간은 선택 받지 못한 정치인 혹은 실패한 정치인 유시민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섣부른 것이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의 현실인식은 퇴보하는 민주주의의 현실 앞에서 지금의 상황을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었고, 값을 치르지 않았으니 당연히 올 일이 온 것이라는 체념이 아니라 그 값을 어떻게 치르고 어떻게 발전해 나갈 것인가를 찾는 답의 과정이었다.
현실 정치에 대한 실망과 체념 어린 여러 질문에 대해 그는 몇 번이고 지금의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다 거나 견딜만 하다라고 이야기했다. 그가 지금의 현실을 그리 나쁘지 않다라고 인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오랜 고민에 대한 그의 답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지금의 현실을 제도적 진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환경에의 부적응의 한 형태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러한 부적응의 시기를 견디고 나면 결국은 한 단계 진화된 사회로 발전할 것이라는 사회진화론적 믿음을 이야기했다. 때론 진화의 과정에서 역행하는 듯 보이는 역사도 결국은 진보할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어쩌면 민주화가 꿈에서나 존재할 것 같았던 80년대를 온 몸으로 겪어내고, 결국의 어두운 터널 끝 빛을 마주할 수 있었던 그의 삶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그런 성공의 경험은 지금 사회가 결코 옳다고 믿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옳은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자신감을 그에게 주었을지도 모른다.
삶이 흔들릴 때 어떤 책을 주로 읽느냐는 질문에 어떤 책도 흔들리는 자신을 잡아줄 수는 없다고, 결국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아 주는 것은 책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존감 혹은 자긍심이라는 그의 말은 이 시기를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에 대한 그의 답변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자신의 이익과 사회적 정의가 충돌하는 경험 속에서 우리의 선택은 결국 우리에게 맡겨진 숙제이다. 민주주의는 행복의 추구를 권리로 보장할 뿐이지 행복자체를 담보하지 않는다. 자신의 추구할 행복이 무엇인지 찾는 것도, 또 그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도 결국은 본인이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결국은 자신이 질 일이다. 다만 자신이 옳다고 믿어온 가치를 위해 싸우고 때론 승리하기도 하고 때론 실패하기도 하며 여전히 투쟁중인 유시민, 그 자신을 보는 것이 행복추구를 향한 우리의 질문에 조금쯤 답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언제가 읽은 책에서 헌법의 기본정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이라고 했다. 나와 같은 생각이어서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르지만 그래서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헌법이 가지는 핵심가치라는 말은 유시민이 꿈꾸는 대한민국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모나고 엉뚱하게 생긴 사람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긴데로 살아도 되는 나라 대한민국을 꿈꾸는 유시민. 그를 보면서 자신을 세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 우직한 자의 어리석음에 대한 글을 떠올린다. 우직한 어리석음이라는 제목의 그 글은 이렇게 끝은 맺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곧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고 내용입니다.] 아마도 세상에 대한 그의 우직함은 언제가 그가 꿈꾸는 대한민국을 현실로 만들어 보여줄 힘이 아닐까? 그의 우직함이 세상을 바꿀 그날을 기다려본다. 그리고 우직한 모습으로 내가 고민하고 찾아낸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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