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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앤턴 - 살만 루슈디 자서전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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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아 쥐었던 순간, 그래 이 책과 비슷한 두께의 책이 집에도 한 권 있지. 있어. 라고 생각했다. 베개로 사용 했었거나, 베게로 이용 했었거나, 베개로 활용했었던... 그러니까 베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이제는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책장 어둑한 곳에 꽂혀져있는 바로 그 책 <구약성서>.  모태신앙이란 그런 법이다. 종교의 의미도, 종교의 필요도 느끼지 못한 채 부모로부터 강요당해 물려받은 신앙이란 성서를 베개로 사용하게 만들만큼 불경스럽고 얄팍하기 짝이 없는 그런 것이었다. 


조지프앤턴은 커녕, 살만 루슈디라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었다. 책을 좋아해서 열심히 읽기 시작한지 몇 해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한국 근대문학의 언저리에만 머물러 있는 수준이기 때문에 외국의 작가들의 이름이나 작품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자서전'을 성서의 두께만큼 써내려가는 건가 싶어서 책을 펴기도 전에 표지속의 루슈디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눈을 왜 그렇게 떠?" 아, 아니 이게 아니고. 그냥 이렇게 묻고 싶을 뿐이었다. 이 책을 보낸 사람에게. "알라딘, 저 맘에 안 들죠?" 아, 아니 아니. 이것도 아니고. 엣헴. 아무튼 그런저런 이유로 책의 볼륨에 압도당해서 쉽사리 시작하지 못했다. 서평 마감일이 코앞에 닥치고 나서야 어디 한번 읽어 볼까 하고 시작한 것이 지난 일요일 오전. 그리고 월, 화요일 내내 쉴 새 없이 다음페이지, 다음페이지를 허겁지겁 읽어 삼켰다. 재미있었다.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만큼 평범하지 않은, 재미있는 삶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그의 그 13년의 시간이 멀고 먼 작가의 고향보다 더 먼 동쪽나라의 한 사람에게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로 읽혀지게 되어서, 그런 '흥미로운 옛날이야기'가 되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하고 마음속으로 살만에게 말을 걸었다.



자기가 했던 말이나 썼던 글을 확신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자신의 작품과 사회적 위치에 만족감을 느낄 수만 있다면 미움 받는 일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중략) 이런 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교훈도 얻었다. 적을 알기는 쉽다. 그는 사상 때문에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사고방식과 싸우는 중이었다. 어떤 종교든 간에, 남의 생각을 제한하려 드는 태도와 싸우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도 분명히 알아야 했다. 표현의 자유, 상상의 자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유서 깊은 예술, 그리고 무신론. 불경, 불신, 풍자, 희극, 불손한 농담. 그런 것들을 지켜야 할 때 다시는 움츠리지 않으리라. 그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이 싸움에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네가 지키려 하는 것들이 정말 목숨을 걸 만큼 소중한가? 그는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다.


글, 이라는 것이 가진 힘을 믿는다. 글이 세상을 변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책 속에서 등장한 수많은 유명인사들 중에 유독 반가웠던 인물이 바로 '바츨라프 하벨' 체코 전 대통령이었다. 프라하 여행을 떠나기 위해 이 책 저 책 읽다가 알게 된 체코 반체제 인사들의 풍자와 농담, 해학의 힘으로 이루어낸, (물론 그 속에 수많은 피와 땀이 숨겨져 있겠지만) 체코의 벨벳혁명. 그 너무나도 멋진 역사의 한 페이지의 제일 앞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바츨라프 하벨의 생애에 감복하여 블타바 강변에 있는 하벨 대통령의 생가라고 알려진 건물 앞을 서성인 것이 바로 얼마 전이다. 바츨라프 하벨이라는 인물에게 빠져든 것도 다 '글' 때문이었다. '글'이 가진 힘을 믿기에, '글'이 가진 힘을 믿고 전력을 다해 앞을 향해 달려 나간, 혹은 있는 힘껏 자리를 버티어낸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벨이 그러했고, 살만 루슈디가 그러했다. 자기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 반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설과 관련 있다는 이유만으로 살해 위협을 당하고, 진짜로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는 현실 앞에서도 살만 루슈디는 자신의 글을 믿고, 싸워내었다.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걸을 자유, 아무렇지 않게 친구를 만날 자유,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할 자유, 아무렇지 않게,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자유. 13년간 그 당연한 자유를 빼앗기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싸움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진 800페이지. 처음에 두껍다고만 욕해서 미안해. 너는 의미 있는 조-흔 800페이지였어.



그러나 루슈디는 묻고 싶었다. 어떤 종교이든 간에 종교를 싫어하는 것이 언제부터 불합리한 일이 되었나? 누군가는 맹렬히 싫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언제부터 이성이 부조리로 탈바꿈했나? 언제부터 미신과 전설에 대한 비판이나 풍자가 금지되었나? 종교는 인종의 경우와 다르다. 종교는 사상이다. 비판을 이겨낼 만큼 강한 사상은 흥하기 마련이고 약한 사상은 망하기 마련이다. 비판을 금지하면서 애지중지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강한 사상은 오히려 반론을 반긴다. 에드먼드 버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적과 싸우는 동안 체력을 단련하고 기술을 연마한다. 적이 우리를 돕는다." 반대파를 외면하거나 욕하거나 해치려는 자는 나약한 자들과 독재자들 뿐이다.



<악마의 시>를 읽어보지 못했다. 물론 그의 다른 작품들 역시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그를 죽음의 압박으로 몰아넣었다는 그 작품들이 종교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설령 그의 글이 정말로 하나의 종교를, 그리고 그 종교를 믿는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모욕했다 하더라고 그것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글에는 글로, 정당하게 대응하면 될 일이었다. 종교를 가진다는 것 자체에 대한 반감은 없다. 철저히 개인의 자유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천주교 신자로 교적에 올라있지만 일년에 두어 번 가는 것이 고작이고, 기독교이든 불교이든 그로인해 평온함을, 만족을,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뭐든 좋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개인의 문제일 때, 종교의 유무나 종교의 종류같은건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어떤 '강요'를 하기 시작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천주교 신자임에도 천주교로인해 나의 '자유'에 문제가 생긴다면 나는 그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라도 자유와 보편적인 권리를 종교로부터 침해당한다면 그것을 거부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업악의 도구일수 없다고. 그것이 종교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런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한다면. 과연 그것이, 종교일수 있을까?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자행되어온 수많은 대학살의 역사를 떠올려본다. 신의 이름으로, 신을 위하여, 신이 바랐기 때문에? 아니. 신이라는 존재가 그러한 대학살을 바랐을 리가 없다. 모든 종교전쟁은 종교라는 그럴싸한 방패를 앞세워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인간들이 저지른 범죄이지 않을까. 반대파를 외면하거나 욕하거나 해치려는 자는 나약한 자들과 독재자들 뿐(P.449)이지 않은가.



이야기에 대한 통제권은 누가 가져야 옳은가? (중략) 그 권리는 만인의 것이며 마땅히 만인의 것이어야 한다. 누구나 자유롭게 거대서사를 비판하고 논쟁하고 풍자할 수 있어야 한다. 시대적 변화에 따라 거개서사도 변화하기를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거대서사에 대해 말하는 방식도 자유로워야 한다. 경건하든 불경스럽든, 열광적이든 냉소적이든, 그것은 열린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의 권리다. 우리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되풀이할 수 있을 때,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 사회가 정말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거대서사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논쟁 그 자체가 중요하다. 논쟁이 곧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닫힌 사회에서는 정치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든 그런 논쟁을 막으려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야기는 우리 몫이다. 설명도 우리 몫이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는 우리가 결정한다. 다른 이야기는 일절 금지한다. 우리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든다면 너는 국가의 적이거나 신앙을 저버린 자다. 그러므로 아무 권리도 없다. 각오해라! 기필코 너를 찾아 감히 우리를 거역한 대가를 치르게 하리니. 

자유를 수호하려면 우선 담론의 장을 수호해야 한다. 논쟁의 해결이 아니라 논쟁 그 자체가 자유다. 남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신념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있어야 참된 자유다. 그래서 자유로운 사회는 평온하지 않고 항상 소란스럽다. 진실로 자유로운 사회는 온갖 의견이 충돌하는 저잣거리 같은 곳이다.


실은, 20년 전 한 작가와 한 종교의 싸움의 과정을 읽는 동안 이상하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자꾸만 겹쳐졌다. 논쟁을 허하지 않는 사회. 일방적인 메세지만 전달하는 사회.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 무엇보다, '아무도 진실을 기억하지 않는, 거듭 부인하면 과거의 진실을 지우고 새로운 진실을 확립할 수 있는(P.567)'사회. 바로 2015년 대한민국이라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모습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짐한다. 그러니까, 잊지 말자고. 옳다고 믿는 모든 것을 위해 논쟁의 장으로 나서자고. '워낙에 참을성 없는 시대, 급격한 변화의 시대, 그래서 어떤 화제도 오래 주목받지 못하는 시대(P.442)'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말자고 말이다. 여기, 이렇게. 13년에 걸쳐 기억하고, 믿고, 논쟁의 장에 뛰어들어 결국 승리를 거머쥔 증인이 있으니까 말이다. 


'글'의 힘을 믿는다고 했었던가. 그와 동시에 나는 '유머'의 힘도 믿는다. '암담한 상황에서도 희극적 요소를 찾아야 하는 시절(P.267)'이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 '유머'야 말로 지지부진한 긴 싸움을, 지치지 않게 해 주는 한 줄기 빛이 되어 줄테니 우리는 아무리 암울한 상황일지라도 유머를 잃어서는 안 된다. '유머'가 힘이 되어주는 증거는 이 책에서도 찾을 수 있다. 800페이지의 길고 긴 이야기 곳곳에 담겨져 있는 영국식 유머의 향연이, 이 긴 (800페이지와의) 싸움에 지지 않도록 도와주었으니까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 말이다. 루슈디가 세계인권선언기념일에 컬럼비아 대학으로 연설을 하기 위해 뉴저지 티터보로 공항 활주로에 내려 아홉 대의 차량과 선도를 위한 모터사이클 행렬이 흰색 방탄 스트레치 리무진을 에워싸고 사이렌과 경광등, 많은 경찰관의 호위를 받게 되었을 때, 밥 경위에게 이건 너무 거창하지 않나 하고 묻는 장면에서 "선생님이 미국 대통령이었다면 이 길 전체를 봉쇄하고 건물 지붕마다 저격수를 배치했겠죠. 오늘은 그렇게까지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라던가, (이 부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하트 표시까지 했다.) 세계문화학회 모임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을 때 만난 움베르토 에코가 루슈디가 쓴 <푸코의 진자>에 대한 혹평에도 불구하고 "루슈디! 얼간이 에코가 여기 있소!"하며 다가와서 친해졌다는 장면 같은. 이런 유머야말로 경직된 관계를 말랑하게 해 주는 힘이 아닐까. 우리는 어쩌면 너무 진중한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유머'의 힘을 믿자. 그리고 확신이 담긴 '글'의 힘도. 그것은, 언제나 옳을 테니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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