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서가 맡던 역할의 일부분을 심리서가 이어받은 지난 몇 년. 이제(혹은 여전히) 철학도 이 역할을 해보려는 모양새다. 아직 이런 책들을 위한 분류는 없어 대개 인문 에세이나 교양 인문학으로 자리를 잡는데 어쩌면 치유 철학 정도의 소분류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철학 상담가를 자처하는 레베카 라인하르트의 저작 두 권이 연달아 한국에 소개되는데, 이번 책의 제목은 <방황의 기술>, 부제는 '불확실한 삶이 두려운 이들을 위한 철학 연습'이다. 눈치 빠른 분들은 여기에서 세 권의 책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편집자가 의도한 건 아닌 듯) 어쨌든 철학의 효용이 늘어간다는(발견이 적합할지도) 건 먹고사니즘과 관련해서도 반가운 소식이다. 이제 마음이 아프면 철학 상담소를 찾아가게 될까. 아차, 한국은 이미 수많은 철학원을 갖고 있는 이 분야의 프런티어 아니었던가. 아쉽게도 이에 대한 분석은 잠시 미뤄두고 <방황의 기술>을 만나보자. 철학자 강신주의 추천사와 저자의 프롤로그를 차례로 소개한다.

 

방황, 혹은 자발적 여행의 지혜

- 철학자 강신주 

얼마 전 출간된 내 책을 들고서 어느 독자가 수줍게 사인을 요청했다. 웃으면서 나는 그의 얼굴을 잠시 본다. 그러고는 펜을 잡고 책 앞면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었다. “여행과도 같은 삶을 살아내시기를 기원합니다.” 물론 그와 만난 장소와 시간, 그리고 내 사인을 병기하는 걸 잊지 않는다. 내 팬인지 그 독자는 사인을 받은 것으로 아이처럼 행복해한다. 나도 행복한 표정을 짓지만, 속으로는 안타깝다. 그는 내가 왜 ‘여행과도 같은 삶’을 이야기했는지 깊게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인 요청에 기계적으로 응하지 않고, 내가 독자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는 이유가 있다. 그들이 어떤 역사를 껴안고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어떤 아우라를 남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유심히 보지 않아도 상관은 없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된다. 그저 한 번의 느낌만으로 족하다. “여행과도 같은 삶을 살아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글귀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다. “당신은 안주하면서 살고 있군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 말을 나는 하고 싶었던 것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에는 내가 좋아하는 글귀가 실려 있다. 여행을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소크라테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나 보다. “아마도 그는 자기 자신을 짊어지고 갔다 온 모양일세.” 그렇다. 여행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낡은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것을 짊어지고 오는 것이다. 낡은 것이라니?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낡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내’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여행의 본질이다.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자신이 새롭게 된다는 것이 말이다.

낙관하지 말자. 새롭게 된다는 것이 반드시 더 바람직스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무서워하는 것이며, 심지어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라는 명언 아닌 명언도 만들어진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앙다물고 다시 배낭을 꾸려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항상 이미 그리고 앞으로도 여행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여행과도 같은 삶’은 사실 ‘삶다운 삶’을 말한다고 말이다. 

어머니 자궁으로부터 나와 낯선 부모를 만났을 때, 과연 우리는 자신이 어떤 어린이로 자랄지 예측할 수 있었을까? 이것도 여행이다. 훌륭한 부모를 만났다면, 우리는 유년 시절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미성숙한 부모를 만났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품고 살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변할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이것도 여행이다. 인간의 삶 자체를 저주할 수밖에 없는 사랑을 할 수도, 혹은 태어난 것이 행복하다는 느낌 속에서 사랑을 누릴 수도 있다. 모를 일이다.

여행을 포기하고 익숙한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가? 유지하고 싶으면 해보라. 불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세계는 여러분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주식 대폭락이나 금융 질서 붕괴와 경제 위기가 닥칠 수도 있고, 아니면 지진과 수해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날 수도 있다. 혹은 여러분의 애인이 여러분의 무미건조한 생활에 싫증을 내고 결별을 선언할 수도 있다. 본의 아니게 새로운 환경이 여러분을 덮칠 것이다. 그러니 싫든 좋든 여행을 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단순하다. 자발적인 여행을 할 것인가, 아니면 타율적인 여행을 할 것인가? 급류를 거슬러 수영을 할 것인가, 아니면 급류에 휩쓸려 내려갈 것인가? 어느 경우든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나’로 변할 것이다. 그렇지만 전자의 경우,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성장하는 자신을 확인할 테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갈수록 약해져만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사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지혜롭다면, 자발적 여행을 떠날 일이다.

지금 여러분이 들고 있는 책 《방황의 기술》의 저자 레베카 라인하르트는 자발적 여행을 ‘방황’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에게 인간은 왜 방황해야만 하는지, 왜 방황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방황이 인간에게 얼마나 커다란 선물을 줄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려고 한다. “낯선 것, 예측할 수 없는 것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이 세계에서 우리가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인간이라는 것과 인간성이라는 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방황이라는 여행이.   

아직도 방황에 주저하는 독자에게는 라인하르트가 인용한 노발리스의 말이 힘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삶이란 주어진 소설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소설이어야 한다.” 남들이나 환경이 만들어놓은 소설의 조연 노릇을 할 것인가, 아니면 남들과 만나고 새로운 환경에 머물면서 소설의 주인공이 될 것인가?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질 때, 다시 말해 삶을 마무리할 때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바로 그 순간, 엷은 미소를 띠면서 혼잣말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파란만장했고 순간순간 힘들었지만 돌아보면 흥미진진한 소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소설을 쓴 것 같다”라고.

한동안 독자들에게 친필 사인을 할 때 내게 덧붙일 말이 하나 생긴 것 같다. 라인하르트의 책을 한번 읽어보라고. 어쩌면 독자들은 여행과도 같은 삶을 살아내기를 기원하는 나의 마음을 더 쉽게 알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방황을 과감하게 선택하고 그것을 기꺼이 감내해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삶, 다시 말해 ‘나’이기 때문에 혹은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낼 수 있는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방황하는 기술이다

- 프롤로그 

불안의 시대에는 안전이 고가의 자산이다. 우리 모두는 안전한 직장과 보장된 연금, 믿을 수 있는 파트너를 원한다. 제아무리 사나운 변화의 폭풍이 몰아쳐도 모습이 변치 않는 것, 푹 믿고 기댈 수 있는 것. 하지만 변치 않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고 믿는 순간 문제는 다시 시작된다. 사랑스럽던 파트너가 갑자기 우울증 환자임이 밝혀진다. 그렇게 말 잘 듣던 아이는 질풍노도의 나이가 된다. 직장은 위태위태하다. 직장에서 잘리면 어쩌나? 혹시 암이라도 걸리면 어쩌나?

불안하다. 세상만사가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한다. 다시 붙들고 싶다. 불확실한 건 싫다. 실패할까 봐 겁난다. 궤도에서 이탈하고 싶지 않다. 망망대해를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착오와 실패는 계획에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을 제대로 하고 싶다. 일, 가정, 건강, 적당한 수입. 직선거리로,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목표를 이루고 싶다. 실험은 안 된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 비전과 꿈을 갖는 것이 낭만적이긴 하겠지만 그것으론 건질 것이 없다.

미래는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늘 이런저런 예기치 못한 문제와 씨름했듯 미래도 편안한 산책길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모험을 강행하여 미지의 땅을 정복하려 할 것이 아니라, 그저 조심 또 조심하는 편이 옳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극대화하고 완성하는 것으로 족하다. 지금보다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삶을 꾸려갈 것이며, 미심쩍은 불확실성은 애당초 차단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남는 시간이 있거든 여유 있게 즐기면 될 것 아닌가.

하지만 바로 이런 태도가 왜 우리가 여기에 있는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를 가로막는다. 남보다 뛰어난 시간 관리가 과연 인생의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손실을 최소로 줄이는 것이, 최대한 즐기는 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가 될 수 있을까? 그저 이 세상에 왔을 때보다 조금 더 똑똑해져서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철학자이기에 매일 이런 문제들과 만난다. 책에서도 만나지만, 내가 운영하는 상담소나 병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늘 이런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나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철학도 무가치하다고 생각한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아주 다양하고(아픈 사람, 건강한 사람, 젊은 사람, 늙은 사람, 공부를 많이 한 사람, 못 한 사람, 돈을 잘 버는 사람, 못 버는 사람) 인생 역정도 가지각색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면 결국 관심사는 다 거기서 거기다. 다들 행복이 무언지,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지 알고 싶어 한다.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새삼 확인하는 사실이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불확실한 상태에 있는 걸 못 견뎌 한다는 것이다. 집안일이든, 직장 업무든, 병이든 마찬가지다. 모든 문제에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니며, 어떤 땐 오히려 해결책이 없는 편이 더 낫다는 사실을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불확실한 상태에서 헤매는 것은 무조건 시간과 비용의 낭비라고 치부해버린다. 그리고 그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해방시켜주겠다는 전문가를 서둘러 찾아 나선다. 재미있는 건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는 원인이, 전문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결코 힘들었던 어린 시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원인은 해결 지향성이 지혜의 마지막 결론이라고 주장하는 이 시대, 어린 시절부터 효율과 효과를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예측 불가능한 것들을 체계적으로 차단시키려 애쓰는 이 시대와 훨씬 더 관련이 깊다.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예측 불가능한 것들을 차단시킬 수는 없다. 인생이란 그 자체가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예측 불가능이라는 매력이 사라진 우리의 삶은 상상만 해도 너무 황량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시대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나를 찾는 환자들을 통해 거듭 확인한다. 나아가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보다 포괄적인 철학적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다면 정말 못 견딜 것 같은 문제들도 갑자기 전혀 다른 성격을 띠게 된다. 불확실한 세상을 떠도는 방황이 죄나 벌이 아니라 기술로 보이는 그런 관점 말이다.

이 책은 미래를 두려워하고 해결을 지향하고 계산에 집착하는 이 시대에 더 많은 용기와 호기심을 갖자고 외치는 변론이다. 이 책은 고대 영웅 오디세우스를 모델로 삼아 일상적이지 않은 일, 낯선 일, 한계상황에 뛰어들라는 초대장이다. 자신의 불완전함이 드러날 일을, 심지어 실패할 줄 뻔히 아는 일을 감행해보라는 초대장. 이유가 뭘까? 우리는 절대 직접적으로는 우리 자신에게 다가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빙빙 돌아봐야, 삼천포로도 빠져봐야 자신에게 갈 수 있다. 낯선 것, 예측할 수 없는 것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이 세계에서 우리가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인간이라는 것과 인간성이라는 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 솔직히 말해 쉽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쉽게 정리가 안 되고 쉽게 내 손아귀에 안 들어오는 것이 더 매력적이고 더 스릴이 있는 법이다.

―헤매다
―헷갈리다
―착각하다
―혼란스럽다
―길을 잘못 들다
―길을 잃다

방황을 인생의 장애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와 다른 것, 쉽게 정체를 알 수 없는 것, 혼란스러운 것을 무시한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건 절대 아니다.

두려워 말자. 망설이지도 말자. 지평을 넓혀라. 방황을 기술로 생각하자. 방황의 기술을 배워 인생의 가장 흥미진진한 즉 예측 불가능한 측면들을 만나보자. 수동적인 자세에 신물이 났다면, 다시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싶다면, 현재의 상황이 참을 수 없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이 책은 당신의 멋진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습관으로 굳어버린 세계관을 버리고 불확실한 것에 다가갈 수 있는 용기와 호기심과 능력을, 숨어 있던 그 능력을 일깨우라고 재촉할 테니 말이다. 놀랄 만한 인생의 다양성, 일상의 근심 때문에 미처 보지 못했던 그 다양성을 새삼 깨닫게 해줄 테니 말이다. 더 용기를 내라고 외칠 것이고, 조금 더 참고 조금 더 인내하라고,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칠 테니 말이다. 공동체는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진정한 공동체는 ‘우리 것’과의 동일시를 넘어 남의 것, 낯선 것과 친구가 될 때 탄생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수많은 질문들의 해답을 찾아보길 바란다. 모든 경우에서 서둘러 (소위) 올바른 해답을 내기보다는 올바른 질문을 던질 줄 아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불확실성, 다의성, 모순을 ‘합리화로 제거하는 것’은 손실이 없을 수 없다. 철학에서도, 실제 삶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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