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강간·강도 등 중범죄는 사형집행, 형량상승, 거세 등으로 근절될 수 있는가, 체벌은 학생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가, 성매매는 금지되어야 하는가, 혼인의 충실은 형벌권을 사용하여 지켜져야 하는가, 문학과 예술의 표현에 형벌권을 통해 개입하고 통제하는 것은 정당한가, 테러범에게 절차적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는 첨예한 사회적 논쟁사안이다. 검사 출신 변호사인 저자는 국내외의 사례와 문학작품을 소개하면서 이러한 난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문학청년’의 기질과 소양을 가진 저자가 쓴 책이기에 술술 읽히고 흥미만점이다.(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이란 칼럼으로 세상에 알려진 금태섭. 벌써 5년 전 일이다. 검사를 그만두고 더 바빠진 그는, <디케의 눈>이란 책으로 권위에 가려진 법의 속살을 대중에게 알려줬고, 여러 방송에서 진행자로 활동하며 법 영역을 넘어 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따뜻한 시선과 깊이 있는 안목을 보여주었다. 3년 만에 <확신의 함정>이란 책으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최후의 결정권을 가지고 사회 문제 해결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지는 '법'이 어떤 딜레마에 빠져 혼란스러워 하는지를 검사, 변호사 생활에서 겪은 생생한 사례를 바탕으로 펼쳐보인다. 과연 법과 정의는 '확신의 함정'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이 딜레마의 자장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떤 시선으로 법을 바라보고 평가해야 할까? '누구나 틀릴 수 있다'며 시작하는 이 책의 머리말을 소개한다.

  

 

누구나 틀릴 수 있다

스스로 항상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찰나의 순간이라도 절대적으로 옳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초임 검사 시절 특이한 피의자를 조사한 일이 있다. 범죄 내용은 간단했다. 길에 주차되어 있던 그랜저를 훔친 것이다. 단 한 가지 이상했던 점은 애초에 차 주인이 주차한 곳과 피의자가 차를 훔친 곳이 달랐다는 것이다.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닌데, 예를 들자면 차 주인은 문을 잠근 채 용산에 차를 세워두었는데 피의자는 서울역 앞에서 문이 잠기지 않은 차가 주차되어있던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탐이 나서 훔쳐갔다는 식이다.
  범행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고, 착각이거나 단순한 착오가 아닐까 싶었다. 중간에 다른 사람이 훔쳤을 수도 있고, 혹은 차 문이 잠기지 않았었다고 하면 가벼운 처벌을 받지 않을까 해서 피의자가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피의자 주장대로 하더라도 엄연히 절도죄는 성립하니까 큰 문제는 아니었다.

특이한 점은 범죄 내용이 아니라 피의자 본인의 사정이었다. 30대 초반이었던 그는 10대 후반에 교도소에 들어가서 12년을 꼬박 복역하고 30대가 되어서야 출소한 사람이었다. 나온 지 몇 달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길에 고급차가 서 있는 것을 보고 훔친 것이다.
  피의자가 흉악한 죄를 저질러서 12년이나 수감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10대 중반부터 이런저런 죄를 저질러서 교도소를 드나들다가 보호감호를 받아서 12년을 산 것이다. 그 시절에는 3회 이상 죄를 저질러서 실형을 받게 되면 7년의 보호감호에 처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보호감호는, 이름은 징역과 다르지만, 실제로는 징역보다 더 심한 처벌이다. 삼엄하기로 이름난 청송감호소에서 꼬박 7년을 살아야 한다.
  그 피의자는 19세에 징역 5년을 선고받았는데(징역 5년이 가벼운 형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큰 죄를 저지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거기다 보호감호 7년을 더해서 12년을 살고 31세에 출옥한 것이다. 내 앞에 온 피의자는 아무 말 없이 그야말로 하염없이 울었다. 나도 참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피의자는 당시 나보다 두세 살 많았는데 30여 년 인생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초범이 아니니 최소한 3년은 구형을 해야 했다. 그리고 보호감호 청구를 해야 했다. 법률상 반드시 보호감호 청구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그 이전에는 반드시 해야 하게 되어 있던 시절도 있었다), 보호감호 요건에 해당하는데 청구를 안 하면 감사에서 지적받을 수도 있었다. 이 사건의 경우 검사가 보호감호 청구를 하면 판사가 기각하기 어려웠다. 재범의 위험성이 있으면 보호감호를 선고해야 하는데, 12년을 갇혀 있다가 출소 몇 달 만에 다시 차를 훔치는 사람에 대해서 재범의 위험성이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징역 3년을 구형하면 법원에서는 아마도 1년 6월쯤 선고할 것이다. 보호감호 청구를 한 피고인을 집행유예로 풀어줄 수는 없다. 그러면 그 피의자는 징역 1년 6월 더하기 보호감호 7년, 도합 8년 6개월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10대에 감옥에 들어가서 30대에 나왔다가, 몇 달 후 다시 들어가서 마흔 살이 다 되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무슨 살인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하염없이 우는 심정이 이해가 갔다.
  변호인이 찾아왔다. “금 검사, 풀어달라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인간적으로 너무하지 않나. 보호감호 청구를 하면 꼼짝없이 또 10년 가까이 살아야 하는데.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잖아.”
  과거 전과를 찾아봤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다. 전산으로 죄명을 확인해봤는데 폭력, 절도 등 흔한 것이었다. 살인, 강간 등 엄청난 죄명은 없었다.
  나는 보호감호 청구를 안 하기로 했다. 원래부터 보호감호 제도에 대해서 위헌이거나 최소한 비합리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도 했지만(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특히 이 경우는 너무한다 싶었다. 무슨 장발장도 아니고, 12년을 살고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주차된 차 한 대 훔쳤다고 또 10년 가까이 살아야 하다니.
  부장님이나 차장님의 결재도 통과했는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하신 것인지, 혹은 보호감호 요건에 해당한다는 것을 놓치신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피의자의 변호인이 연세 많으시고 사람 좋으신 분이었는데 찾아와서 무척 고마워하던 기억이 난다. 나까지 기분이 좋았다. 스스로 인간적인 검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 후, 신문을 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차에서 데이트를 하는 남녀를 상대로 여러 차례 납치강도를 저지른 일당의 신원이 드러나서 그 중 몇 명은 경찰에 잡히고 남은 한 놈이 쫓기고 있다는 뉴스였는데, 도망 다니는 놈의 이름이 바로 그 피의자의 이름과 같았던 것이다. 특이한 이름이어서 틀림없었다.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니 보호감호를 받고 나오자마자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같이 범행을 저지른 공범들도 모두 보호감호소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다시 그 사건을 확인해봤다. 내가 보호감호를 청구하지 않자 판사도 그 친구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서 집행유예를 선고해줬다. 그는 그 길로 나가서 계속 납치 강도 행각을 벌인 것이다. 좀 더 자세히 확인해보니 그랜저를 훔친 것도 강도 행각을 위한 것이었다. 출소 직후부터 길에 주차된 차를 훔쳐서 데이트하는 남녀를 상대로 납치강도를 해오다가, 다시 똑같은 짓을 하려고 그랜저를 훔쳤는데 우연히 걸린 것이다. 그가(혹은 공범이) 훔친 차는 그 한 대가 아니었다. 과거의 수사 기록을 뒤져봤다. 폭행, 절도로만 생각했던 사건 내용을 자세히 보니 차를 훔쳐서 데이트하는 남녀를 상대로 폭행을 하고 돈을 빼앗은 것이었다. 범행 수법도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내 앞에서 말도 못 하고 하염없이 울던 피의자는 그런 놈이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후회와 죄책감을 느꼈다.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매뉴얼대로 보호감호를 청구했더라면 변호인은 꽉 막힌 놈이라고 욕을 했겠지만 더 이상의 피해자는 없었을 것 아닌가. 얼마 후 그 피의자가 결국 검거된 후에 기자한테 전화가 왔다. 범인이 구속이 되었는데 왜 풀어줬느냐는 것이었다. 풀어주다니 무슨 말이냐, 나는 구속기소했는데 판사가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이다, 라고 했다. 혀를 깨물고 싶었다.
  그 후 나는 가끔 만일 당시 부장님이나 차장님이 결재 과정에서 보호감호 청구를 하라고 지시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을 하곤 했다. 검사가 된 지 채 2년이 안된 내가 지시에 따르지 않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보호감호 청구를 하지 않으면 감사에 지적을 받는데 무작정 거부할 수도 없다. 그러면 그 친구는 9년 가까이 수감되어 있었을 것이고, 나는 영원히 그 친구가 그런 놈이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물론 그 후 몇 년 동안 “○○○ 부장 참 지독한 사람이야. 이러저러한 사건에서 끝까지 보호감호 청구를 하라고 하더라구”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인간적인(!)’ 후회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추가적인 피해자는 없었을 것이다.

좀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다시 그 사건 생각을 한다. 과연 내가 진짜 잘못한 것이 무엇일까. 무조건 매뉴얼대로 보호감호 청구를 해야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생각 자체가 진짜 내 잘못을 짐짓 외면하기 위한 위선적인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진짜 잘못한 것은,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성실하게 팩트를 확인하는 일을 게을리 했다는 것이다. 나는 좀 더 끈질기게 사실을 확인했어야 한다. 분명히 피해자는 차 문을 잠근 채 용산에 주차했다고 하는데, 어째서 피의자는 서울역 앞에서 문이 열린 채 서 있는 차를 타고 갔다고 했을까. 피의자가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모순을 파고들었다면 피의자의 행적을 밝힐 수 있었거나 공범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지 모른다.
  또한 만일 보호감호를 받고 12년을 살고 나온 피의자의 처지를 동정해서 풀어주고 싶었다면, 과연 청송감호소에서 나온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지, 왜 갑자기 길에 서있는 차를 타고 갔는지 좀 더 치밀하게 생각해 보았어야 한다. 사실 길에 서 있는 차를 보고 순간적으로 훔친다는 것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렇게 오래 수감생활을 했다면, 다시는 죄를 저지르지 않겠다, 교도소 근처는 쳐다보지도 않겠다는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은데 단순히 호기심이나 부러움으로 차를 훔쳤다고 한다면 한 번 더 생각해보았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뻔한 사연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과거에 피의자가 저질렀던 사건도 좀 더 확인해 봤어야 한다. 조금만 더 시간을 갖고 찾아봤다면, 피의자가 예전에도 차를 이용해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것을 알아냈을 것이고, 그렇다면 피의자가 그 그랜저를 훔친 진정한 동기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불쌍한 놈이 좋은 차를 타고 싶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이 사건을 겪고 나서, 나는 판단을 그르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선입견, 오만, 그리고 불성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7년간 보호감호를 받게 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선입견(물론 나쁜 것이다. 하지만 보호감호가 잘못된 제도라고 해서 그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팩트에 대한 판단을 게을리 하는데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척 보면 사건의 전말을 안다는 오만, 그리고 당연히 확인해야 할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게으름이 판단착오를 불러온 것이다.
  만일 내가 성실하게 수사를 해서 피의자가 당시 납치강도 행각을 벌이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면 보호감호 청구를 하지 않으면서도 피의자의 범행을 밝혀서 실형을 받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 소신을 지키면서도, 사건을 바르게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잘못을 했고 그 이후에 추가적인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지 못 했다. 나로 인한 피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지만, 내가 잘 했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틀릴 수 있다. 사건을 수사하거나 변론하다보면, 분명히 내 판단이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질 때가 있다. 의뢰인이 물론 가장 억울하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나도 너무 분해서 잠이 안 올 때가 있다. 그러나 누구라도, 자신의 판단이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저 사건을 처리할 때 나는 내가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는데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틀렸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이 책은 누구나 틀릴 수 있다는 전제에서, 다양한 문제를 여러 가지 방향에서 바라보고 쓴 글이다. 앞서 본 사건에서 나는 사실관계를 실제와 다르게 파악하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사실관계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에 판단해야 할 때도 똑같은 실수를 할 수 있다. 역시 잘못된 선입견이 개입하면 누구라도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때문에 우리는 어떤 문제의 답을 찾으려 할 때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결론이라도 일단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더욱이 해법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깊은 고민이 필요한 복잡한 문제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책에서 다루는 사형존폐론, 성매매를 둘러싼 논쟁, 교육현장에서의 체벌, 종교와 문화의 충돌, 과학의 영역에 대한 법과 윤리의 관여 등은 한 마디로 정답을 말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어떤 의견이 옳은지 쉽게 말할 수 없고 시간이 지나면 답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에서는 아직도 모든 문제에는 하나의 정답이 있고 모든 사람이 그 정답을 따라야 한다는 시각이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나는 그런 시각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다.
  상호 충돌하는 주장을 다양한 방향에서 분석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얄팍한 불가지론을 대안으로 내세우려는 것은 아니다. 분명 답은 있다. 그러나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려들거나 서두른다고 해서 답을 빨리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답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법률가로서 무엇이 옳은가, 어떤 것이 정의인가를 고민할 때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이론적인 해설이나 훈계조의 가르침이 아니라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였다. 소설이나 영화 혹은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면 아무리 간단해 보이는 일도 나름의 모순을 가지고 있고 그 해결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눈이 깊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책에서 말하려고 한 것을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서 늘어놓아 본 것도 그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에는 양면성이 있고 나름의 딜레마가 있다. 해결하기 어렵고 복잡한 모순 속에서 조금씩 진실에 접근하는 즐거움을 독자들과 나눌 수 있다면 글쓴이로서는 더 이상의 기쁨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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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da 2011-06-28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디케의 눈> 잘 읽었는데, 이번 책도 머리말만 읽고 기대되네요.

인문MD 바갈라딘 2011-06-28 17:48   좋아요 0 | URL
네, 본문은 단숨에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