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 출간이 임박했습니다. 예약구매하신 분들께서는 다음 주 화요일에 사인본을 받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지난 북엠바고에서 짧은 서문만 보여드려서(저도 그 부분만 읽게되어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차례를 보고는 프롤로그를 보여달라고 할 걸 하며 뒤늦은 후회도 했습니다. 물론 며칠 기다리면 그만인데 큰 상관 있냐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철학의 내용'을 정리하고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철학의 쓸모'를 삶에 녹여내는 이런 책은 결국 글을 읽어봐야 판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이번에는 과감하게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공개합니다. 일부러 이미지를 넣지 않으니 글에 집중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출판계의 어산지'는 이만 퇴청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프롤로그]

고통을 치유하는 인문정신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 라캉, 『정신분석의 다른 측면』

1.
시인을 만났다. 방송국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패널로 방송국에 왔던 나는 스튜디오에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다행히 따로 만날 약속을 잡았다. 만나기로 약속한 토요일 1시가 되었고, 나는 약속 장소에 일찌감치 도착했다. 우리는 광화문에 있는 유명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1시 10분 전에 도착한 나는 시인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1시 30분이 되어도, 2시가 되어도 시인은 오지 않는다. 혹시 약속 시간이 2시가 아닐까 해서 나는 계속 기다리기로 했다. 나의 기다림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시인은 2시 30분이 되어도, 3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전화기를 꺼내 들고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강신주인데요. 저랑 1시에 광화문에서 만나기로 하지 않았나요.” 그러자 시인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런데 오늘은 별로 시내에 나가고 싶지 않네요. 다음에 보도록 하지요.”
너무나 당혹스러웠고, 한편으로는 화도 치밀어 올랐다. 나를 하찮게 보지 않았다면, 그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커피를 한 잔 더 시켰다. 쓰디쓴 커피를 마시다 문득 조그만 깨달음이 내게 찾아왔다. 그건 바로 솔직함과 정직함에 관한 것이었다. 분명 방송국에서 만났을 때 시인은 나와 이야기하는 것에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중에 사적으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이때 분명 시인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시내에 나오고 싶지 않다는 시인의 말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시인이 나오고 싶지 않은 것은 물론 나란 사람이 싫어서는 아닐 것이다. 단지 시인은 다른 이유로 나와 만날 마음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보았다. 만약 약속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시인이 나왔다면, 그는 우울함을 억누르고 유쾌한 척 대화에 임했을 것이다.   

누구든지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친구와 전화 통화를 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이때 전화로 부족한 듯해서 다음 날 친구를 직접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렇지만 통화를 마치자마자 자신의 마음이 한결 좋아진 것을 느끼며, 괜히 만날 약속을 잡았다고 후회할 수도 있다. 감정이 정리되자 내일 해야 할 일들이 떠오른 것이다. 만나기로 한 친구가 정말로 소중한 친구라면, 대부분의 사람은 약속 장소에 나가서 친구를 만나 어제처럼 우울한 척하며 그와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내 친구는 나의 우울함을 달래주려고 나왔으니까 말이다. 과연 이것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모습일까? 아니다. 자, 돌아보도록 하자.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자신의 속내에 정직하고 솔직한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시인에게 바람을 맞던 날, 나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나는 시인이 나를 편안하고 유쾌하게 만날 수 있을 때 나오기를 원한다. 나는 시인이 약속 때문에 억지로 나와서 내 앞에 앉아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건 껍데기와 앉아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시인과의 만남은 이루어졌다. 물론 그날의 만남은 아주 행복했다. 시인은 정말 나와 만나고 싶을 때 나왔기 때문이다.


2.
솔직함과 정직함은 내가 만난 시인을 포함한 모든 인문정신의 핵심에 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수영金洙暎, 1921-1968 시인은 위대했던 것이다. 자신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솔직함으로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사회를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 일부를 보자.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위대한 시인의 시라고 하기에는 조금 허접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 김수영이 시인으로서 갖는 위대함의 비밀이 있다. 대부분의 지식인이 민주투사인 척했을 때, 김수영은 자신의 소시민적 나약함에 정직하게 직면했고, 그것을 숨기지 않고 노래했던 것이다. 그래서 김수영은 위대하다. 그것은 자신을 치장하던 가면을 벗어던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시인처럼 우리도 자신의 삶과 감정에 직면하도록 하자. 분명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처, 즉 관습, 자본, 그리고 권력이 만든 피고름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를 희망할 수 있고, 우리의 뒤에 올 사람들이 더 이상 우리와 같은 상처를 받지 않을 사회를 꿈꿀 수 있게 될 것이다. 철학자를 포함한 모든 인문학자, 혹은 시인을 포함한 모든 작가는 정직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시, 소설, 영화, 그리고 철학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정직하게 치부를 털어놓는 친구 앞에서는 자신도 정직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시를, 그리고 철학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처럼 정직하기 위해서 말이다.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쉽게 풀어보도록 하자. 여러분은 누구나 자신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나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라캉에 따르면 불행히도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은 일치하지 않는다. 전자가 페르소나persona라면, 후자는 맨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페르소나를 찢어버리고 맨얼굴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연기가 아니라, 삶으로서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우리에게 페르소나를 벗고 맨얼굴로 자신과 세계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주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거짓된 인문학은 여러분에게 더 두텁고 화려한 페르소나를 약속할 것이다. 거짓된 인문학은 진통제를 주는 데 만족하지만, 참다운 인문학적 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나가르주나, 이지, 마르크스, 들뢰즈 등등 솔직한 인문정신이 우리에게 가하는 고통을 견딜 수 있겠는가? 아니 우리는 견뎌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에게는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작은 희망이라도 생길 수 있을 테니까.


3.
거짓된 인문정신과 참다운 인문정신! 자기 위로와 자기 최면의 방법을 알려주는 인문학과 솔직함에 이르도록 만드는 인문학!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남편이 오늘도 어김없이 아내를 때렸다. 거짓된 인문정신은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좋은 생각’을 하라고 이야기한다. “오늘 남편이 한 대만 때렸어. 어제까지는 두 대 이상 때렸는데 말이야. 오늘은 운이 좋은데.” 혹은 “남편이 나를 때릴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라. 아직 그가 나를 때릴 정도로 건강하다는 증거니까 말이지.” 반면 참다운 인문정신은 아내의 귀에 다음과 같이 속삭일 것이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남편에게 자신의 삶이 있는 만큼, 나도 나의 삶을 돌보아야 할 권리, 아니 의무가 있기 때문이야.” 만약 그녀가 남편에게 참다운 인문정신이 가르쳐준 ‘나쁜 생각’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어떻게 될까? 더 심한 폭력이 발생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남편의 반성을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정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순간, 아내는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혹은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만약 불행히도 전자라면, 그녀는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후자라면, 그녀는 남편과 함께 불행한 관계를 개선하도록 노력하면 될 것이다. 간혹 인간이 겪는 고통의 양은 불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단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을 일시불로 갚느냐, 아니면 할부로 갚느냐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정직하고 솔직하다는 것은 일시불로 고통을 겪어내는 것이다. 반면 자기 최면과 위로에 빠진다는 것은 할부로 고통을 겪어내는 것이다. 할부로 고통을 겪는다면, 할부가 끝날 때까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도 사라진다. 일시불로 정직하고 솔직하게 고통을 겪어내자. 그러면 남은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이 우리에게 덤으로 남겨질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참다운 인문정신, 그리고 그 솔직한 목소리를 모으려고 노력했다. 모아보니 48가지의 목소리가 되었다. 그 가운데 애써 미봉했던 여러분의 상처를 다시 후벼 파는 목소리가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여러분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눈을 돌리고 말았던 살풍경을 다시 응시하도록 만드는 목소리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것 하나도 편하게 여러분의 삶을 위로하지 않을 것이다. 독자들이 읽기 편하도록 48가지의 목소리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보았다. 첫 번째는 나 자신의 삶과 내면과 관련된 것들이고, 두 번째는 나와 타자의 관계와 관련된 것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나와 타자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 혹은 환경과 관련된 것들이다. 순서대로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관심사에 따라 세 부분 중 어느 부분을 먼저 읽어도 좋고, 책의 구성과 무관하게 마음 가는 대로 읽어도 상관이 없을 듯하다. 그렇지만 어떤 식으로 읽든지 잊지 말도록 하자. 정직한 인문정신이 건네는 불편한 목소리를 견디어낼수록, 우리는 자신의 삶에 더 직면할 수 있고, 나아가 소망스러운 삶에 대한 꿈도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에필로그]

독서라는 여행을 위하여

여행을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아마도 그는 자기 자신을 짊어지고 갔다 온 모양일세.” 
 - 몽테뉴, 『수상록』

1.
사람들은 여행을 좋아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여행을 제대로 다녀온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일상생활이 바빠서인지, 그들은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이 여행지를 다녀온다. 그러나 과연 이것은 제대로 된 여행일까? 참다운 여행은 배움의 과정이어야 한다. 여행으로부터의 배움은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첫 번째 배움은 여행지와 그곳 사람들의 삶을 배우는 것이다. 처음에는 말도 음식도 그들의 행동도 모두 낯설게 느껴질 테지만, 애정을 갖고 그들과 살을 부대끼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그들 곁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행으로부터 배우는 두 번째 배움은 첫 번째 것보다 더 심오하다. 여행지에서 삶이 충분히 편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자신이 떠나온 일상이 낯설게 다가올 것이다.  

처음으로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간 사람은 누구나 극심한 뱃멀미를 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조금만 참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 어느 순간 바다의 리듬에 익숙해지면, 더 이상 뱃멀미로 속을 끓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바다로부터 첫 번째 배움을 완수한 것이다. 언제 돌아올지 몰라 애타게 떠났던 항구로 배가 들어오면 우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배에서 내려 육지에 받을 처음 딛는 순간, 어지러움을 호소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바다의 리듬에 적응했던 우리 몸은 리듬이 없이 고정된 육지가 낯설게 느껴진 것이다. 육지 멀미가 시작된 것이다. 항구 어느 구석진 자리에 앉아 멀미를 진정시키며,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았던 육지가 얼마나 낯선 곳인지 뼈저리게 알게 될 것이다. 바다는 우리에게 두 번째 배움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진정한 여행을 떠난 사람은 자신이 도착한 낯선 곳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 같은 말이지만 자신이 떠나온 일상생활이 까마득한 옛이야기처럼 느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여행을 했어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차이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낯선 여행지와 익숙한 일상 사이의 차이, 혹은 이제는 익숙해진 여행지와 낯설게 느껴지는 일상 사이의 차이. 이 두 가지 차이를 동시에 겪어내야만, 여행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여행을 가는 일과 유사하다. 여행과 마찬가지로 독서를 통해 이중적인 배움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책의 내용과 저자의 속내가 어렵고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차츰 책과 저자에게 충분히 익숙해진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차이에 대한 감각을 얻게 될 것이다.


2.
아무것도 배울 수 없는 수박 겉 핥기와 같은 여행도 있을 수 있고, 타자와 자신에 대해 깊게 성찰할 수 있는 여행도 가능하다. 그래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여행을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소크라테스는 그가 자기 자신을 짊어지고 갔다 온 것 아니냐고 조롱했다. 여행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한 사람은 여행지와 그곳 사람들로부터 배우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이다. 만약 배워서 무엇인가를 얻었다면, 그는 자기 자신이란 짐 대신 배운 것을 등에 짊어지고 돌아왔을 테니까 말이다. 여행뿐만 아니라 독서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닐까? 진정으로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는 독서도 있을 수 있고, 자신의 삶까지 변화시킬 정도로 강력한 배움의 경험을 제공하는 독서도 있을 수 있다.  

영민하고 섬세한 철학자 들뢰즈가 이 점을 놓칠 리가 없다. 그는 두 가지 종류의 독서법이 있다고 전제하며, 첫 번째 독서법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선 책이란 속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자라고 생각하고서,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보든가 혹은 썩고 타락한 사람들이라면 어휘들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읽는 책은 전번 상자에 담긴 상자, 혹은 그것을 담는 상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석을 달고, 해석을 하고, 설명을 요구하고, 결국 책에 대한 책을 쓰게 되고, 같은 식으로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대담Pourparlers』

들뢰즈가 말한 첫 번째 독서법은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하던 친구가 책을 읽던 방식이다. 개인적으로 대학원 시절 석사 논문과 박사 논문을 쓰면서 내가 했던 독서법이기도 하다. 당연히 이 독서법은 즐겁고 유쾌한 여행이 될 수가 없다. 업무 때문에 이루어진 여행이 어떻게 즐거움을 주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 독서법은 놀이보다는 노동에 가까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책을 읽는다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상급 학교 진학이나 논문 통과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책을 읽을 때 저자가 말하려는 속내를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첫 번째 독서법에 매몰되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에 들어 있는 새로운 개념이나 어휘를 발견하여 그것을 남에게 떠벌리려는 타락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짐작하겠지만 전문 학술서나 연구서는 바로 이런 식으로 쓰인 것들이다.


3.
돌아보면 참고서나 문제집을 주로 풀던 학창 시절, 몰래 참고서 밑에 자신이 좋아하던 작가의 글을 숨겨놓고 읽으며 즐거워했던 적이 있다. 이때 읽은 책은 참고서나 문제집과는 달리 노동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었다. 그 책들은 나를 슬프게 했고, 나를 미소짓게 했으며, 어느 때는 내게 삶의 전망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아무런 목적 없이 떠나는 여행과도 같았다. 선생님이 성적에 도움이 된다고 권해준 책도 아니다. 마치 여행지에서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볼 수 없는 진귀한 물건을 발견하는 것처럼, 서점에서 나는 숨겨진 보물을 만난 것처럼 그 책들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 책을 읽은 뒤 나는 어떻게 변할까? 이런 설레는 마음으로 나는 책을 샀고, 또 읽었다. 들뢰즈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가 들려주는 두 번째 독서법을 보니 말이다.

책을 읽는 또 다른 방식은 책을 어휘나 의미를 찾는 것과는 무관한 하나의 기계machine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작용을 하는가, 어떻게 작용을 하는가?”하는 것만이 문제가 된다.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는가? 만일 작용이 없으면, 감응이 없으면, 그럼 다른 책을 집어 들면 된다. 바로 이것이 강렬한 독서이다. 무엇인가 발생하든가 아니면 아니든가, 그뿐이다. 아무런 설명할 것도, 이해할 것도, 해석할 것도 없다.
-『대담』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이 좋다는 말을 듣고 그곳 명승지를 하나하나 둘러보며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럴 때 안달루시아와 감응하고 있는가? 만약 안달루시아가 우리에게 작용을 한다면, 우리는 그곳에 머물면 된다. 반면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안달루시아가 어떤 작용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감히 그곳을 떠나야 한다. 안달루시아로부터 삶의 변화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안달루시아를 갔어도 가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의 삶을 흔들어버리는 책이 있다. 나의 허영을 부수고 내 맨얼굴을 보도록 만드는 책이다. 혹은 내가 고뇌하는 것의 실체를 때로는 절망적으로, 때로는 희망적으로 보여주는 책일 것이다. 이런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노동하는 독서가 아니라 감응하는 독서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말한 “강렬한 독서”법이다.  

지금까지 48가지의 목소리를 여러분에게 들려주었다. 물론 내가 여러분에게 들려준 목소리들은 나의 강렬한 독서 경험의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연히 이 48가지의 목소리에 들어가야 하는데 빠진 것도 있을 수 있다. 내가 별다른 감응을 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아예 접하지도 못했던 책들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가보지도 않았던 곳, 혹은 가보았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감응을 느끼지 못했던 곳을 소개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 삶을 낯설게 성찰하기에 충분한 중요한 목소리는 어느 정도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48가지의 목소리들 중 여러분의 삶을 뒤흔들어놓은 한두 가지 목소리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아니 있었으면 좋겠다. 그 목소리가 여러분의 마음에 울리는 순간이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새롭게 성찰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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