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여인들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7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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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세계관이랄까 철학이랄까 이런 걸 생각해보면 뭐랄까 이름을 지어서 갖다 붙이자면 이건 참 일본식 실존주의다. 일본식이라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딱히 뭐라 얘기하기도 이상하고 사실 그런 게 있는 지도 잘 모르겠지만. 얇고 현세적인 실존주의랄까. 시오노 나나미의 애정을 얻은 인물들은 고뇌하지도 성찰하지도 회의하지도 않는다. 현실은 그런 사치스런 내적 침잠의 겨를을 허용치도 않을 만큼 언제나 치열한 격전의 현장이기 때문에. 황소처럼 날뛰는 성난 파도 위에 올라타 먼곳을 응시하며 매섭게 질주하는 서핑 선수처럼, 온 힘을 다해 기민하게 시시각각을 살아가는 것- 시오노 나나미는 아마도 이런 걸 '관능'이라고 말하겠지. 매혹적이다. 분명 매혹적인데, 글쎄, 이 일본식 실존주의가 품은 묘한 불편의 정체는 무엇일까. "비좁은 정신주의의 껍데기 속에 틀어박히지 않는 대담한 영혼과 냉철한 합리적 정신"(70)을 미처 내면화하지 못한, "감상적인 휴머니즘" 따위의 "값싼 사고방식"(311)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애송이의 군소리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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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심리학 - 남자아이는 어떻게 성장하고 무엇이 필요한가
마이클 거리언 지음, 안진희 옮김 / 위고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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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만하고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지며 공격성과 영웅심리가 강한 남아에게는 여아의 경우보다 좀 더 의도적으로 삶에 대한 목적의식(=역할과 사명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개인화된 양육방식에서 벗어나 주양육자 외에도 다방면의 멘토들을 아이에게 연결해줘야 한다는 (유대가 강한 부족 중심 농경사회라면 모를까, 하, 다소 현실성 희박해 보이는) 내용. 이 책에서 저자는 성역할에 대한 억압적 편견을 부추긴다는 여성주의자들의 추궁을 면하고자 '역할'이라는 단어 대신 '목적'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더 많이 채택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차라리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목적'을 '역할'로 쓰는 편이 내용의 명확한 전달을 위해선 낫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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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머의 힘 - 시각적 설득의 기술
버지니아 포스트렐 지음, 이순희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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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재밌게 읽은 책. 이 책이 말하는 ‘글래머’는 정확히 라캉의 ‘대상 a’ 개념과 합치한다. 라캉의 ‘대상 a’가 역사와 예술과 문학에서, 종교와 정치에서, 사회와 대중매체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현되고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탁월한 분석서라 해도 맞춤하겠다. 글래머란 무엇인가. 단지 번쩍이는 광채와 화려함만은 아니다. 그것은 언어 대신 이미지와 개념과 상징을 통해 설득의 효과를 갖는다는 점에서 “상대를 매혹시키는 비언어적 수사학”이다. 수수께끼 놀음을 더 이어보자면- 패리스 힐튼에게는 없지만 그레이스 켈리한테는 있는 것이며, “투명도 불투명도 아닌 반투명”이고, “머리로는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진실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환상”이다. “품위가 넘치는 무심한 태도”와 “공들이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움”에서 묻어나는 어떤 것이다.

 

저자는 글래머가 '품위', '신비감', '도피와 변신에 대한 약속' 등을 그 핵심적 조건으로 갖는다면서 풍부한 자료들을 통해 이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해나간다. 글래머의 성격에 대해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거나 개인적으로 인상깊게 받아들인 것 몇 가지를 적어보면 첫째, 글래머는 가치중립적이다. 결코 허무와 불신을 조장하는 속임수 같은 게 아니며, 쓰이기 나름이라는 것. 좋게 보자면 글래머야말로 어쩌면 문명 그 자체일 수도 있다.(44쪽) 글래머는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내는 꿈과 환상이며, 바로 그런 점에서 문명을 추동하는 근간이자 문명의 훌륭한 업적이기도 하다. 글래머가 여성운동과 흑인운동에 어떤 식으로 기여했는지에 대한 사례(116~118쪽) 또한 글래머의 긍정적 효용으로서 주목할 만 하다.

 

둘째, 글래머는 근현대에 이르러 상업주의의 범람 및 대중매체의 발달과 함께 융성하게 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결코 이 시대만의 특이적 현상은 아니며 유구한 역사성을 갖는다. 이 책에서는 글래머의 문학적 시조로서 트로이 전쟁을 몰고 온 헬레네를 꼽고 있다. 셋째, 글래머는 대상 안에 내재하는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과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타나며, 자극에 대한 적극적이고 우호적인 수용 의지를 가진 관객이 주관적으로 감지해내는 어떤 것이다. 글래머가 심리적인 현상이자 수사학 도구라는 점에서 유머와 통한다는 통찰 또한 신선하다. 글래머의 성격을 로맨스 혹은 스펙터클과 대조하거나(154~157쪽), 카리스마와 대조하는 대목(215~220쪽), 시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글래머에 대해 통시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후반부 역시 흥미롭게 읽힌다.

 

글래머의 실체가 비록 실현될 수 없는 언어도단의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또한 그것이 불만스런 현실과 결핍에 대한 전도된 반영에 불과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글래머에서 영감을 얻고 삶의 희망과 이상과 의미와 목적을 발견한다. 글래머야말로 현실적 실천을 고무하고 구체적 변화를 야기하는 촉매에 다름 아니며 그런 점에 있어서 결국 글래머는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동력이기도 하다. 어쩌면 글래머야말로 수학에 있어서 복소수 같은 것인지도.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체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결코 빠져서는 안 될 필수요소라는 점에서. 체계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허구라는 점에서.

 

글래머가 갖는 효용과 위력은 분명하다. 그것은 유용하기에 유의미하다. “위험을 안고 있다 해도 글래머는 중요한 기술이다. 우리는 글래머가 순간적으로 제공하는 즐거움뿐 아니라 그것이 제공하는 영감과 통찰력을 소중하게 여긴다. 글래머는 환상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갈망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바에 대한 진실을 드러내 보여 준다.”(45쪽) 마지막으로, 현재보다 더 만족스럽고 질적으로 향상된 삶을 향해 전진해가는 데 있어서 글래머를 완벽한 목표가 아닌 이정표나 길잡이로 사용하는 지혜가 요청된다는 저자의 마지막 당부를 새겨둘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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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새로운 길 - 종교적 키치, 예술적 키치, 그리고 구원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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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의 또 다른 책 <키치, 달콤한 독약>과 짝패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독서의 완결성을 위해서는 이 둘을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하겠다. <키치, 달콤한 독약>이 주로 키치에 대한 정의와 분석적 통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면, 이 책은 그 적용 범주를 예술 뿐만 아니라 신앙, 윤리, 원리주의, 민족주의, 지성의 영역 전반으로 확장하면서 키치가 출현하게 된 철학사적 맥락과 역사적 배경을 소상히 짚어낸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한편으로는 ‘한 권으로 읽는 서구 문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르주아의 이념적 반동 심리와 졸부 근성에 기원을 둔 키치가 그 어떤 시대보다도 거대서사가 붕괴한 우리 시대에 만연해 있는 병리적 특질이라고 진단한다면, 키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포괄적 조망은 필연적이리라. "우리가 현대를 궁극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과거의 모든 시대들과의 차연의 종합으로서"(156)이기에.

 

쏟아내는 이야기의 규모는 방대하고 그 종합적 해석과 통찰은 날카롭다. 정치, 종교, 사회, 철학, 문학, 예술, 수학, 과학 등등 온갖 방면을 종횡무진하며 흩뿌려놓은 보석 같은 조각들을 하나씩 꿰맞춰 나가다 보면 거대한 그림이 보이는 듯하다. 그동안 밤하늘에 둥둥 뜬 별들을 멀뚱히 올려다보고만 있다가 갑자기 별자리가 만들어지는 현란한 광경을 목도하게 된 것과도 같은 상황이랄까. 넋이 나갈밖에. 때로는 너무나 무리한 주장이 아닌가 저어되기도 하지만, 아마도 저자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별자리는 "확정된 사실도 아니고, 항구적이거나 보편적이거나 필연적인 사실도 아니"(170)라고, 이 또한 인간 상상력의 소산일 뿐이며 "오류일 수도 있는 전제"(169)를 필히 가정해야 한다고.

 

행간에 면면히 흐르는 지적 치열함, 당대의 세태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한 어떤 절박성 같은 것들을 떠올리면 결코 이 책을 이렇게 읽어선 안 될 것 같은데, 풍성한 지식의 향연 앞에서 마냥 황홀한 독서 체험이고 말았다. 이 책을 대단히 키치적으로 소화했다는 방증이겠다. 키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개진하고 있는 이 책을, 이거야말로 한 권의 훌륭한 교양서가 아닌가 감탄하며 키치적으로 읽다니 자조할 만한 역설이다. 어쩌겠나. 교양(으로 간주되는 것)을 황홀하게 소비하는 것- 이것이 바로 키치적 태도에 단단히 매몰된 딜레탕트의 한계인 것을.

 

의미의 죽음에 대한 상세하고도 냉엄한 전언이자 그러한 죽음에 대한 안일한 대응으로서의 키치를 고발하고 있는 이 책을 힘겹게 덮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면, 밤하늘은 여전히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하다. 의문이 들 수밖에. 모든 의미가 소멸한 이 시대에, 과거의 실재론 또는 합리론 계열의 철학자를 좇는 일은 과연 "병든 행복"(240)에 잠기는 일인가? 의미를 재건하고자 하는 이 시대 철학자들의 시도는 "어리석음이며 위선"(192)에 불과한가? 어차피 우리 모두 새장에 갇힌 신세라면, 실재에 대해 그 누구도 닿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 누구도 진리의 담지자가 아니라면, 결국 어느 산에 오르느냐 하는 선택도, 어떤 산을 건설하느냐 하는 결심도 모두 그저 개인의 기질에 따른 심미적 취향의 문제 즉 "마음의 경향"(275)에 의해 좌우되는 문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이 화단을 휩쓸던 6-70년대에 인물 초상을 고수했던 신사실주의 계열의 화가 앨리스 닐은 "추상은 인간을 외면한다. 나는 여전히 휴머니즘을 지향한다."며 주류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한다. 자기인식적 시대착오는 더 이상 시대착오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키치도 아둔함도 아니며, 다만 또 하나의 결의이다. 책장에 꽂힌 채 어느덧 기약 없는 숙원사업이 되어버린 나의 <존재와 시간>이, 이 책의 매서운 전언에도 아랑곳 않고 여전히 내 마음 속에선 꺼지지 않는 온기와 빛을 발하며 살아있다. "순진한 자부심"(291)인가? 그럴 지도. 그러나 이 또한 "단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내적 요구"(283)일 뿐이다. 결국 나는 이 책을 다소간은 키치적으로, 다소간은 우이독경으로 소화한 셈이 되고 말았다.

 

*

 

사족- 책에도 운명 같은 게 있을까. 그렇다면 이 책의 운명은 험난해 보인다.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워서 외면할 테고, 책을 읽는 소수의 일부는 지적 포만감에 취해 키치적으로 읽을 것이며(그리함으로써 키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개진하고 있는 이 책이 결과적으로는 한 권의 훌륭한 교양서로서 키치적 향락의 대상이 되는 역설에 처할 것이며), 나머지 일부는 그 누구보다 근대 교육 과정을 착실하게 이수한 전형적인 근대인으로서 이 책이 말하는 죽음을 끝내 인정하기 어려울 테니까. 오탈자와 몇몇 불편한 문장이 눈에 띈다. 개정판이 나올 때 다듬었으면.


156쪽: 전제군주만이 시민을 어둠 속에 가두지 않는다. → 전제군주만 시민을 어둠 속에 가두는 것은 아니다.

205쪽: 사실주의 예술과 인상주의 예술에 대한 부르주아 계층의 반발은 기득권 계층의 이념은 언제나 지성과 의미 속에 고형화되기 때문이다. → 사실주의 예술과 인상주의 예술에 대한 부르주아 계층의 반발은 기득권 계층의 이념이 언제나 지성과 의미 속에 고형화되는 까닭이다. (제안)
236쪽: 박에 → 박애
304쪽 밑에서 4번째 줄: 만약 그가 새로운 세계에 창조하여 → 만약 그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여
315쪽 밑에서 5번째 줄: 작품을 상품이나 부르고 → 작품을 상품이라 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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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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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으로 김지은의 입장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당시의 사건이 어떤 맥락과 토대와 문화 속에서 불거져 나온 것이었는지 짐작해보게 한다. 사건이 개연성을 갖출 수 있는 배경이 되는, 저자가 몸담았던 조직의 현주소가 책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예비 군주를 추앙하는 충성심 강한 중세 봉건 집단과도 같은, 젠더 감수성은 부재하면서 동시에 절대적인 복종심으로 단결한, 엄격한 위계를 갖춘 신앙 공동체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이 조직의 성격에 눈길 가지 않을 수 없다. 비난과 선동은 인터넷 댓글 한 줄이면 충분하나 해명을 위해서는 책 한 권이 필요하다. 이 책을 읽는 것으로 부디 작은 위로를 보탤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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