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기 문학A조 마지막 도서 <퀴르발남작의 성>
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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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훈의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은 문학성 짙은 작품집답지 않게 읽는데 의욕을 불사르게 한다. 그의 소설이 다루고 있는 것이 지극히 가학적인 것들인 탓이다. 소설집 속 단편에서도 담겼듯이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을 법한 폭력적 또 다른 자아들에 대해서 혹은 그것들을 주저하고, 후회할 것이 분명한 또 또 다른 자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서 성선설 따위의 뒤편에 숨을 수 없는 치밀한 포위망을 갖춰놓고 있다.

모든 소설가의 단편들이 그러하듯이 최제훈의 단편집들도 따로 발표된 것들이지만 하나의 책에 묶으니 자연스럽게 장편처럼 내용(적어도 작가가 천착하는 사회의 폭력성에 대해서)들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지류의 물줄기들이 본류에 합류되면서 섞이게 되는 것처럼 최제훈 소설의 주인공들은 홍길동의 분신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하나로 모이는 것처럼 하나의 주제를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작가가 언급한데로 그의 괴물은 드라큐라나 퀴르발 남작같은 본래 그렇게 만들어진 것보다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처럼 이런 저런 조각들이 짜깁기된 것이다. 어쩌면 그 조각들 하나하나로는 결코 괴물이지 않은 것들이지만 그것들을 꿰매 놓으니 그 형상이 괴기스러워진 것처럼. 그런 작가의 커다란 구도는 다섯 번째에 실린 ‘마녀의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고찰 - 휘뚜루마뚜루 세계사1’에서는 더 이상 숨길 것이 뭐 있냐는 투로 직접화법을 이용하기도 한다.

세계사의 기록 속에 마녀사냥은 17세기에 그쳤다고 하지만 21세기 뉴스에는 여전히 마녀사냥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인용되고 있다. 그렇게 산 채로 사람을 태워 죽이는 일은 아니지만 불에 태워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고통을 주는 마녀사냥은, 솔직히 고백하자, 현재도 횡행하고 있다. 마녀사냥의 주체는 언제나 그렇듯이 누구라고 적시된 인물들이 아니라 죄없는 마녀들이 불에 타 죽는 동안에 방관자인 동시에 조력자, 공벙자였던 우리들에 대해서 작가는 매서운 질타를 쏟아 붓는다.

“자신의 친척이나 이웃이 눈앞에서 불태워져 잿가루로 흩날리지만, 그들을 동정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았어. 절대 그럴 수 없었지. 그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니까. 자신들이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뚝에 묶인 자가 진짜 마녀가 되어야 했으니까...사냥이 진행될수록 인간들은 형벌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는 거야”

영화 피셔 킹에서 주인공 잭 루퍼스의 애인은 이런 말을 한다. “신의 형상을 따라서 남자를 만들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오히려 잉태를 통해서 창조 역할을 잇는 여자가 신을 닮았다. 남자는 반대로 악마를 본 따 만든 것이다. 대체로 못된 짓은 남자가 다 하지 않는가?” 최제훈의 소설 속 조각 괴물에는 여자도 존재한다. 그러나 기록되거나 구전되는 역사 속 가해자 리스트에 여자 이름이 오른 경우는 별로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에서 괴물을 구성하는 많은 조각들은 아마도 남자 이름일 것이다.

아무튼 남자가 됐건 통틀어 인간이 됐건 괴물과 우리는 잠재되거나 억제된 본능임을 말하는데 묘하게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적어도 독자에게는 그 우리의 범주에서 살짝 빠져나올 수 있는 신비한 장치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최제훈의 소설은 인간 사회에 대한 뿌리 깊은 분노를 드러내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지만 정작 그들 속 하나가 분명할 독자에게는 묘한 면죄부를 주고 있다. 마치, 그의 소설이 악에서 구해줄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원인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우둔한 나로서는 도저히 분석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결론을 위해서 미완성이고 지극히 추측에 불과한 것이나마 말하자면, 그것은 앞서 인용한 글 속에 나온 것처럼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불태워져 잿가루로 흩날리는 마녀를 지켜보던 그 시대의 군중의 시선이 되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 대한 통렬한 질타에 아쉬움을 두지 않아야 하는 것은 그러지 않으면 내가 괴물이 되고 마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면죄부라 생각했던 것은 나의 착각일 따름일 뿐.

최제훈의 소설은 충격 그 자체였다. 현대의 아니 인류 역사의 가장 근원적 문제에 대해서 아주 사적인 영역에서 그 이유를 밝혀내려고 하고 충분히 설득력을 담보해내고 있다. 폭력에 대한 집요한 리포트인 소설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콧등이 시려진다. 그런 순간들 때문에 면죄부에 대한 착각을 갖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골 아픈 주제의 소설은 읽는 것 자체가 작가와의 싸움이 되거나 동조자가 되는 일인데, 그 과정을 통해 나는 그의 문장에 포로가 되어버린 듯하다. 그리고 15세기의 장작불에 비교할 수도 없는 더 강력하고 광범위한 인터넷을 갖고 노는 우리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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