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김이의 글에서....

"두 권으로 된 <<꿀벌의 우화>>에서 이번에 옮김 것은 제 1권의 절반가량이다. 풍자시 <투덜대는 벌집: 또는, 정직해진 악당들 Grumbling Hive: Or, Knaves Tunr’d Honesst>과 그에 따른 <머리말 The Preface>, 22개 <주석 Remark>가운데 특히 경제와 관련 있는 (L), (Q), (Y)의 세 개 …….. <자선과 자선학교 An Essay on Charity and Charity-Schools>는  글이 길어서 중요한 부분만 골라 옮겼다." (329)


그러니까.. 이 책은 발췌 번역본이었던거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제2회 블로거 문학 대상 한국소설 5위]

박민규 지음 / 예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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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었다. 첫 장을 읽어 나가는 순간부터 소설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비록 어색한 쉼표, 사소한 사실 관계들이 미심 적었지만 (가령 80년대와 요가는 쉽게 매치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심혈을 기울여 책을 읽어나갔다. 얼마 만에 읽는 한국 소설인가. 족히 반년은 넘었으리라. 모국어로 쓰여진 소설을 읽는 일은, 사전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편리함이 주는 그 이상의 즐거움을 던져준다.
 
아마도 반쯤 읽었을 때, 깨닳았으리라.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는 건, 박민규를 좋아해서 혹은 이 소설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이 작품에서 하루키의 그늘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라는 걸.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비틀즈, 그리고 밥 딜런을 들으며, 맥주를 마시는 20대 청춘이란 나에게 하루키의 주인공들이다. 조금, 아니 많이 불공평하지만, 하루키는 이러한 청춘들에게 강력한 저작권을 걸어 두었다. 적어도 나의 기억과 추억의 자장 안에선 말이다.

작품을 다 읽었을 때엔, 약간의 실망이 떠올랐다. 이때 떠오르는 사람은 마루야마 겐지와 존 가드너였다. 겐지가 떠올랐던 건, 단순히 엇박자 비스듬하게 문단을 나누는 방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차라리 소설가의 각오에서 그가 말하던, “소설이 너무 많이 팔려도 문제이지만, 너무 안팔려도 문제이다” 혹은 그와 비슷한 문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박민규의 소설은 당연히 전자일 것이다. 너무 많이 팔린 소설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당연히 추녀를 사랑하는 미남이라는 문제적인 설정이 문제이리라. 소설 속의 소설의 편집자가 말하듯이, 추녀를 사랑하는 설정이란, 있어 본적이 없다. 작가는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자본의 흐름보다도 더 강력한 거의 초역사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미/아름다움에 과감히 도전한다. 박민규는 이렇게 언제나 용감하고 무모하다.


허나 그 도전방식은 어떠하였는가? 작품에서 추녀는 배경들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추녀에 대한 묘사는 어디에도 없다. 미추란 실상, 텅 빈 기표, 가공된 혹은 조작된 의미란 것을 보여주는 것은 좋지만, 이건, 미추에 대해서 끊임없이 토를 다는, 그로 인해 미추를 실체화 하는 일상의 경험과 습속에 반한다. 우리는 미와 추에 대해서 너무나도 깔끔한 정의와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


그로 인해 주인공은 추녀를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추녀를 사랑하지 않는 역설에 빠지게 된다. 이 역설이 추녀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 그렇기에 팔리지 않을 이야기, 편집자도 출판을 포기하는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게 한 힘이다. 추녀가 추녀가 아닌 공백이 되었기에, 그리고 그 추녀를 사랑이란 아름다움으로 포장하였기에, 이 소설은 결코 아름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가드너를 떠올린 건, 작품 구성의 문제인데, 우리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 작품이 1) 요한에 의해 쓰어진 소설일 수도 있고, 2) 이름 없는 화자에 의해서 씌어진 소설일 수 도 있고, 3) 그 모두를 포함하는 소설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단 소설 안에 소설, 액자소설이란 구조 때문에 주인공의 교통 사고, <평범한 기적>, 과 해피앤딩이란 입에 담기도 싫은 구태의연한 극적 장치와 결론이 용납이 될 수 도 있으리라. 즉 소설 속의 소설은 박민규와는 다른, 재능 없는 작가(요한이나 주인공)에 의해서 쓰여진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문제는 그러한 구성을 마지막에 Writer’s Cut에서 밝히는 것인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깐깐한 글쓰기 선생인 가드너나라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를 작가는 무슨 권리로, 심지어 작품 속에도 집어 넣지 않고, 끝까지 감추다, Writer’s Cut이란 “보충”의 형태로 들어 내었는가라고 질문하지 않았을까? 작가는 자신도 쑥스러워 하는 “해피앤딩”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무마 시키고자 하였던 것일까.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 거울에 반사되지 않는, 표상되지 않는, 다른 삶의 방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들어오면 소설의 주인공은 더 옹색해진다. 백화점 주창장 알바로 근무하면서도 매일 같이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신다는 건, 누군가가 이미 집세와 밥값을 해결해 주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군만두는 자기에 대해서 투자를 한다는 명목으로 과소비를 정당화한다. 요한과 주인공들의 과소비(?)는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사실 그들은 자신의 과소비를 정당화하려고 하지도 않고, 사실 이에 대한 아무런 자각도 없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맨날 맥주를 마시는 주인공들이 나오면서도, 그들이 한 번도 술 값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을 때, 난 질투와 화가 난다.)


물론 그런 한가한, 나긋나긋한 삶 역시, 미친 경쟁 시대에선 삶의 다른 방식이 될 수 는 있겠다. 허나 밥 벌이의 어려움은 언제나 부모나 주변인의 환대에 의해서 해결되고, 그러한 비굴한 삶의 연속은 어느 날, 글쓰기의 어려움도 없이, <평범한 기적>으로 해결 된다.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으리라, 꼼꼼히 자신의 원고를 읽으면서, 문장 부호나, 맞춤법을 체크하던 사람이라면,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말을 했을 뿐이리라. 그러나, 도대체 왜 항상 그런 식인가. 다른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의 삶이란 건, 사실 주변인의 은덕, 정부나 기관의 펀드로 유지되다, 어느 날 문득 대박을 터트리는 삶이란 건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국 로또란 말인가. 


 
 
Joule 2011-07-17 20:49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회전목마의 데드 히트>에 나오는 '지금은 죽은 왕녀를 위한'을 안 그래도 오늘 아침 눈 뜨자 마자 읽었더랬는데 우연이 반가워서 일단 댓글.

잘은 모르겠지만 하루키 같으려면 매정해야 해요.
 

귀국한 후, 마치 습관인 것처럼 한국 소설들을 찾아 읽었다. 무엇부터 읽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김연수를 시작으로 하였던가. 김영하였던가. 그도 아니면 황석영이었나.

그래도 처음으로 완독한 소설은 기억이 나는데, 그건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였다. 삼미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 초창기 하루키를 연상시키는 문체여서 조금은 당혹스럽게 읽기 시작했지만, 글의 자연스러움과 평화로움에 고요히 빠져들며, 한편으론 주인공의 애잔함에 몸을 떨었다. 더군다나 대상만 바꼈을 뿐이지 모든 건 결국 박민규 아니던가.















그는 항상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 하고만 싸움을 하는데, 이 번 소설에선 자본주의 보다도 역사가 오래된 “미”와 싸운다. 이길 턱이 있나. 그는 항상 질 수 밖에 없는 작가이다. 하지만 결코 포기하는 줄 모르는 작가이기 때문에, 세상과 삶에 대한 그의 싸움은 진행 중이다.  앞으로도 이 위대한 바보가 어떤 작품을 쓸지 기대된다. 그의 단편집 카스트라 또한 얼마 전에 흥미롭게 읽었으나, 한 호흡으로 읽다가 숨이 막혀 버렸다. 주의 하시길, 급하게 달리면, 놓치는 게 너무 많은 작품이다.
















김영하의 글은 너무너무 잘 읽힌다. 아랑은 왜 도 좋고, 오빠가 돌아왔다고 좋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는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 랄랄라 같은 잡문도 좋다. 나에겐 이 정도가 딱 좋은 대한민국의 멋쟁이 우파이다. 적당한 마초 가족주의. 적절히 돈을 바른 쿨한 감각. 넘쳐흐르는 교양에서 우러나는 양심. 이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 개같이 돈을 벌어도 되지 않는 진정 가진 자의 여유. 내 삶을 내 뜻대로 사는 게 당연한 “우리”의 넉넉함이다.  딴나라당이여 제발 이 정도는 읽자. 여기에 당신들의 구원의 빛이 있도다.
















김사과의 미나는 충격이었다. 그 몰락하는 개인의 반비극적 서사야 말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여고괴담이었다. 그러나 단편 영이에 이르러서는 너무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다. 들뢰즈도 말했듯이, 모든 분열증이나 탈주가 전부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여전히 이제는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세대의 감성과 목소리를 엿보는 건, 아스케키마냥 두근거린다. 그런데 도대체 당사자들은 김사과를 어떻게 읽을지 알 수 없다. 김사과의 미나를 과연 분당의 입시반 아이들이 읽기나 할까? 만약 읽으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런 질문은 김이설의 환영을 읽으면서도 동일하게 떠오른다. 결코 읽지 않을 사람들을 위한, 사람들에 대한 소설이 아닌가. 그렇기에 그녀의 소설은 진정 환영이리라. 이 환영을 깨기 위한 당사자운동이라도 필요한 것인가? 김이설의 소설 환영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소설은 소설이고, 소설가는 소설가이다.
















황석영의 강남몽을 읽으면서, 도대체 작가란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했다. 벤야민의 유명한 에세이 이야기꾼과 소설가를 도식적으로 작용한다면 황석영은 소설가라기 보다는 이야기꾼이리라. 그리고 한 시대를 넘어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함께 하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삶은 그가 죽는 날까지 이어지리라. 그런데 그 다음은? 우리는 또 다른 황석영을 가질 수 있을까?
















그의 개밥바라기 별을 읽으면서, 드디어 우리에게도 케루악의 길 위에서와 함께 읽을 소설이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소설은 20여년 전 읽은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 이 후, 항상 읽지 않을 수 없는 장르가 되어 버렸다. 아직도 성장소설이 고픈걸 보면, 나는 지금도 성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낯익은 세상을 읽으면선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어버린 삶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외국어로 번역되기 좋은 주제를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세계문학이 되기 좋은 책이라 할까. 노벨상 후보작가로 거론되는 황석영에게 딱 어울리는 작품이다. 또 누가 아나, 이 소설이 그를 몇 년 후 노벨상 수상 작가로 만들어 줄지.

한 두 달 동안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책들을 읽었다. 다 좋은 작품들이고, 글들이다. 작가들에게, 그리고 힘들어 책을 만든 출판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다락방 2011-07-16 16:28   댓글달기 | URL
[미나]읽고 저도 꽤 충격적이었어요. 고양이 괴롭히는 것도 그렇고 결국엔 결말까지.
이 책들을 읽고 계시느라 그동안 알라딘에 뜸하셨습니까?

잘 지내고 계신가 봅니다. 비도 오는데. 많은 책을 읽으시면서 말이죠.
:)

apouge 2011-07-17 18:34   URL
락방님도 잘 계시죠?
 

“인구 천만이 넘는, 활력이란 면에선 세계 어디에 내두어도 뒤쳐지지 않을 서울이지만, 이곳은 나에게 죽음의 도시이다.” 이것이 남산을 지나 강남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바라본 서울에 대한 나의 오래된 첫인상이었다. 창 밖을 통해서 본 서울의 풍경은, 스모그 가득한 죽음의 도시였다. 이곳에서 어떻게 살았었을까? 물론 익숙해지면, 괜찮다. 아토피도, 호흡기 질환도, 익숙해지면, 살 수 있다. 어차피 현대인은 치료할 수 없는 병과 함께 살아가지 않는가.

사람들은 잃어버린 깨끗한 공기, 푸른 하늘, 맑은 강물을 감추기 위해서, 더욱 장식한다. 신사동 가로수 길의 아름다운 카페와 상점들을 보면서, 우리가 우리를 치장하며, 도시를 치장하는, 그 인공적 아름다움이야 말로, 우리 삶의 실패를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한 천장, 아름다운 야외 테라스 앞에, 같은 디자인의 나이키 트랙슈트을 입은 몇몇의 젊은이들이 자전거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들의 발은 화려한 루나로 장식되어 있었다. 더 이상 우리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가질 수 없기에, 그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인공적 아름다움으로 대체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아름답게 도시를, 우리를 포장한다고 할 지라도, 잃어버린 자연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은 결코 되돌아 오지 않으리라. 물론 과거의 향수 짙은 고향, 푸른 낙원으로의 귀환을 꿈꾸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잃어버린 자연과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차라리 각종 오염에 찌든 현실의 부정일 뿐이다.

이런 서울에서 가장 낯설었던 건, 이곳에 새로운 삶과, 신체를 목표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다. 이렇게 숨 쉬기도 힘든 곳에서, 그들은 어떻게 다른 삶을 꿈꾸는 걸까. 상상하기 어렵다. 죽음이 지배하는 도시에서, 삶을 위해 공부를 한다, 혹은 한다고 믿는다. 순간,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차라리 우리 모두는 서울을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서울에 집착을 하는가. 아마도 우리가 모두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일단 우리가 만난 곳이 서울이기에, 우리는 서울에 자리를 잡았고, 자연스럽게 서울에 자리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허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서울로부터 집단적 이주 혹은 탈출이 가능할까. 서울을 떠난 삶, 서울 없는 삶을 우리는 꿈꾸고, 실천할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서울로 대학을 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면 되지 않을까. 당분간은 힘들겠지. 허나 아무리 힘들다 해도,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진 않겠다. 말 그대로 숨 쉬기가 힘들다.


 
 
Forgettable. 2011-06-02 00:21   댓글달기 | URL
진심 부럽습니다 ㅎㅎ

pjy 2011-06-02 16:59   댓글달기 | URL
느껴지는게 많습니다..제 짧은 생각으로는 슬럼독 어쩌구 영화에서 본 것처럼 쓰레기더미에서도 잘만 살던 좀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이란 도시도 또 다른 관점에서는 그것과 다르지 않은거겠죠~
슬슬 데워지고 있는 물속의 개구리가 아니라, 노천온천에서 얼굴동동 내놓고 즐기는? 개구리심정입니다^^;
 

얼마 전에 아버지와 대학생들 등록금 문제에 대해 잠깐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약간은 분개 하시면서, 자살하는 학생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하며 말씀을 시작하셨다. 당신은 무슨 얘기를 하셨던가. 간추리면 이 정도가 아닐까 한다:

...사람이 죽을 용기가 있으면 뭔 일을 못하는가... 공부를 할 생각이 있으면, 요즘 장학금 제도가 얼마나 잘 되어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공부만 잘하면 왜 등록금 걱정을 하겠는가... 사람은 다 자신이 잘 하는 일, 적성이라는 게 있는데, 대학이나, 공부가 맞지 않으면, 다른 길을 찾아야지 왜 대학에 목을 매는가...

"뭐 듣기에 따라선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로 시작하며, 비교적 부드럽게 당신과 논쟁 아닌 논쟁을 잠깐 하였는데, 뭐 등록금이 비싸다는 생각은 하였지만, 내가 그 문제에 크게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고, 또한 대학 등록금을 전적으로 부모님에게 지원 받았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생각하면, 원래부터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 아버지와 내가 토론을 한 적이 있었던가? 하여간 오랜 만에 만난 부자가 오랫동안 언성을 높이는 것도 좋지 않을 꺼 같아, 적당히 꼬리를 내리고 내 방 아닌 내 방으로 후퇴하였는데, 그러고 나니 좀 분한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당신과 대학 등록금 문제에 대해 토론할 기회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있다면, 그 때를 위해서 좀 공부를 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선택한 책이 "미친 등록금의 나라"이다. (그러니까 때로 우리는 지지 않기 위해, 혹은 질투와 분노 때문에 공부를 하기도 한다.)
















이 책은 제목만큼, 분노에 가득한 책이다. 불의, 불평등에 대해 몸 깊은 곳에서 솟아 오르는, 분노를 최대한 억누르며, 절제된 언어로 독자를 설득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거친 문장과 표현 사이에서 간간히 느끼게 된다. 이러한 문체는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일 수 도 있을 텐데, 판단은 각자의 몫이리라.

저자들에 따르면, 한국 대학의 등록금 문제는 기본적으로 “수익자 부담 원칙”에 기반한 기형적인 사립대 중심의 대학교육 시스템에 기인한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시스템을 가지게 되었는가.

"우리나라에 현대적 의미의 대학이 들어섰던 해방 직후부터 미군정은 국민들의 폭발적인 교육열을 국•공립대학보다는 사립대학 유치를 통해 해결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사립대학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된 원인이다. 이 과정에서 미군정은 교육에 필요한 비용의 대부분을 학부모에게 떠넘기는 수익자 부담 원칙을 도입했다. 이에 따라 영세한 자본으로 우후죽순 대학을 설립했던 사립대학 운영자들은 국가 지원은 거의 받지 못한 채 대학 운영비의 대부분을 학생 등록금으로 충당했다. '교육 받는 학생들이 그 비용을 부담하라'는 수익자 부담 원칙이 지난 60여 년 이상 우리나라 대학등록금 정책의 뼈대를 이루게 된 배경이다." (24)

저자들에 따르면 등록금 문제는 기본적으로 대학•대학교육을 공공재로 바라보는가 아니면 사유재로 간주하는 가에 달려 있다. 한국, 일본, 미국은 대학 교육을 사유재로 바라보는 시각이 지배적이고, 그렇기에 '수익자 부담 원칙'을 강력히 적응한다. 즉 니가 구입하는 졸업장이고, 졸업장을 통해서, 이익을 얻는 것 또한 너다. 그러니 너가 돈을 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논리이다.

한국에서 이러한 시각이 지배적이 된 것은 저자들이 책의 후반부에서 지적하듯이, 한국의 독특한 역사적 상황이 한 몫을 하였는데,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무상 교육이라는 발상은, 공산주의적 발상으로 여겨졌던 것. 흥미로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88년 까지, 한국에서 이념 투쟁이 가장 치열한 군사정권 시절엔 대체로 등록금 문제가 잘 통제되었다는 점이다. 노태우 정권 이후, 동구권의 몰락 이 후, 한국에서는 대학 자율화를 통해, 현재의 미친 등록금 제도가 형성 되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선 정권을 김영상이 잡던, 노무현이 잡던,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니 한편으론 정치와 무관하게, 등록금 문제는 지난 20여 년간 악화일로를 걸었던 것이며, 좀 더 나아가 말한다면, 대학 재단들은 정치도 건들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철옹성을 그 동안 쌓아온 것이다.

* 등록금 문제도 알고 보면, 미국과 분단 때문이라는 거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들은 역시나 모두 이 두 시원적이며 정초적인 사건-존재와 결부 되어 있다. 일종의 원죄라고 해야 할까.

이 책에서 저자들이 제시하는 “현실적인” 대안은 정부 책임형 사립대학이다. 재정이 위태로운 사립대를 퇴출시키는 극단적인 방안이나, 기존의 국립대를 확대하는 정책 보다는, 일단 정부의 사립대학 보조금 확충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저자들은 진단한다. 정부 책임형 사립대학이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 정부가 사립대학을 지원하여, 반값 등록금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공약하지 않았다는 유명한 공약의 실행.

저자들에 따르면 현재 반값 등록금을 실제로 실행하기 위해선 매년 6조원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는 내국세의 6퍼센트 정도. 참고로 4대강은 연간 9.5 조원, 부자감세는 연간 16조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들은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새로운 세의 신설 없이도 반값등록금은 지금 즉시 실행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놀라운 건 부자감세만 안 해도, 대학 무상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책의 말미에, 저자들은 무상급식과 반값등록금을 같은 선상에 위치하며, 기적 같이 이룩해낸 무상급식처럼,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반값등록금을 반드시 실행해 내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자 다시... 아버지의 주장으로 돌아가자... 대략 세 가지 정도가 된다

1) 사람이 죽을 용기가 있으면 뭔 일을 못하는가...

죽을 용기를 가진 적이 없어서, 이 부분은 잘 모르겠다. 죽을 용기를 가진다는 것이 혹은 “죽을 용기”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표현인지, 희생할 용기까지는 내 머리로 이해를 할 수 있지만, 자살할 용기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건진 잘 모르겠다.


2) 공부를 할 생각이 있으면, 요즘 장학금 제도가 얼마나 잘 되어있는데, 공부만 잘 하면, 왜 장학금을 왜 등록금 걱정을 하겠는가...

도대체 장학금을 왜 공부를 잘 하는 애만 주어야 하는가?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어서 더욱 공부에 매진 할 수 있도록 해줄 순 없는 것일까? 현실적으로 성적 우수자 중심의 장학금 지급 행태를 경제 사정 곤란자 중심으로 바꾸는 게 먼저 할 일이다. 현재 비율은 대략 7:3. 이렇게 얘기하면 분명, 인센티브, 동기부여, 경쟁 등을 얘기하실 텐데, 교육의 목표가 경쟁을 심화시키고, 학생 개개인의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은, QS와 같은 사설 기관에 의해서 전 세계 대학의 서열이 매겨지는 현실에선 내가 말해도 거의 공상과학 소설 수준이기 때문에, 아 힘들다는 말 밖엔…

3) 사람은 다 자신이 잘 하는 일, 적성이라는 게 있는데, 대학이나, 공부가 아니라 생각하면, 다른 길을 찾아야지 왜 대학에 목을 매는가...

고교 졸업생의 80퍼센트 이상이 대학을 가는 나라이다. 대학 졸업을 못하면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는 나라이다. 7-80년대만 해도 상고 졸업하고 은행 취직이 되었다. 지금도 가능한가? 가진 건 인간 밖에 없는 나라이다. 이렇게라도 먹고 살 수 있게 된 건, 교육열, 미친 등록금에도 불구하고, 대학 보낸 부모들의 희생, 알바 뛰면 힘들게 졸업한 학생들 덕분에 된 거 아닌가. 정주영과 이병철이 만든 게 아니잖은가. (당신은 분명 정주영과 이병철이 만들었다고 하실 것 만 같아 정말 무섭다. 서간엔 각종 기업인의 자서전과 성공 스토리가 즐비하다. 얼마 전엔 이건희가 봤다며 “안씨가훈”을 두 권이나 주문하셨다. 나보고도 읽으라는 데, 정말….)

한국에선 대학이 이미 비공식적으론 의무 교육화 되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사회구조적으로 대학교육을 요구해온 과정은 생각하지 않고 정작 그 책임을 개인의 부담으로 떠넘기는 것은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139)

물론, 이 정도로 당신을 변하게 하리란 생각은 하진 않는다. 평생 변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대로 괜찮다. 내가 당신과 다르기 때문이다. 당신에겐 당신의 세계가 있으셨고, 우리에겐 우리의 세계가 있다. 어차피, 하나의 국론이란 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어차피 누가 국론을 주도해 나가는가의 문제이다. 문제는 어떤 문제가 이슈화 혹은 쟁점화를 통해서 사회적 의제로 등장하게 되고, 정당 공약에 포함 됨으로 현실 정치의 장에 들어가게 되는가 이다.

꿈 같던 무상급식이 현실화 되어가고 있다. 반값 등록금. 정치인 보다 더 무서운 언론과 재벌이 지배하는 세상을 개혁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다. 허나, 사람이 죽어나가지 않는가. 대한민국에서 학교가 배틀로얄이라는 말은 결코 비유나 수사가 아니라는 것을 2011년의 카이스트는 보여줬다. 거리에서 대학생이 죽어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쓰러지는 친구를 붙잡고 절규하던 친구라도 있었다. 이제, 우린 그런 친구도, 선배도, 동료도,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그러니 등록금 문제가, 단순히 등록금 문제가 아니다.


 
 
Joule 2011-05-23 21:00   댓글달기 | URL
아포지 님은 핏대 올리지 않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용케도 잘하시네요. '죽을 용기'라는 단어가 과연 가능한가 라는 지적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