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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로도 지구는 좁다 : 중국 편 - 중국 톈진에서 남아공 케이프타운까지, 30,000km 600일의 기록 자전거로도 지구는 좁다
장호준 지음 / 매일신문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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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세 라이더, ‘자전거 세계여행’의 서막을 열다

y 낮달2018 2023. 1. 3.

[서평] 장호준의 자전거 여행 기록 <자전거로도 지구는 좁다>

세 살 터울의 내 친형이 세계를 일주하겠다며 한국은 떠난 것은 2015년 4월이었다. 세계 일주라면 비행기나 열차를 이용하는 여행을 상상하겠지만, 그가 선택한 이동 수단은 자전거였다. 순전히 두 다리의 힘으로 페달을 밟아 움직이는 자전거로 세계를 일주하는 건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난 이라도 마땅한 그림이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2015년 4월, 60대 라이더 600일의 자전거 여행을 떠나다

물론, 그게 전례 없는 일은 아니지만, 사실상 나는 그걸 응원해야 하는지, 말려야 하는지조차 헛갈렸다. 어쨌든 그해 4월 그를 보내고 나는 블로그에 그의 출발을 알리는 글을 썼다. 그는 만만찮은 준비 끝에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톈진(天津)으로 떠났었다. [관련 글 : 63세 라이더세계를 향해 페달을 밟다]


그의 밑천은 두말할 것 없이 한번 꽂히면 끝을 보는 집요함이다. 십 오륙 년 전에 산악자전거(MTB)에 입문한 그는 타고난 체력과 집요함으로 ‘라이딩(riding)’을 즐기기 시작했고, 그렇게 세계를 주유하겠다는 욕망을 키워온 것이었다. 그런 그의 도저한 행동주의 유전자는 피를 나눈 내게는 약에 쓸래도 없는 형질이다.

그는 떠난 지 20개월 만에 노트북에 쟁인 두꺼운 여행 기록, 그리고 사진과 함께 돌아왔다. 중국에서 시작된 그의 자전거 여행은 30,000㎞, 동남아시아, 튀르키예와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를 종단하여 닿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끝났다. 이 책은 2015년 4월 1일, 톈진에 닿은 이래 라오스로 떠난 7월 25일까지, 그가 중국에 머문 116일의 기록이다.

2007년 대구에서 동해안 통일전망대로 휴가를 떠나기로 한 나는 이동 수단으로써 자전거를 선택했다. 자전거의 시작이었다. 그 1년 후 나는 산악자전거동아리에 가입했다. 한동안 물이 나를 미치게 했던 것처럼 장난처럼 시작한 산악자전거는 내 삶의 절대적 의미가 되었다. 자전거가 이동 수단에서 운동 수단으로 이윽고 오락 수단으로 넘나드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지만, 신체적 운동능력은 그저 팀에서 꼴찌는 면하는 그런 정도다. 나는 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사진 찍기도 좋아한다. 뭔가 조합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사실이다. 나의 이런 성향이 자전거 세계 일주를 계획하게 했으며 이 책을 내게 된 배경이다. 돌이켜봐도 이 여행의 시간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 <자전거로도 세계는 좁다> 책날개에서

길위에서 만나는 타인들로 ‘존재를 확인’하는 여행

자전거 탄다고 해서, 아니 산악자전거를 즐긴다고 해서 누구나 작가가 책날개에서 밝힌 소회처럼 세계 일주를 꿈꾸지 않는다. 일찍이 스쿠버 다이빙을 즐기면서 수중사진을 찍었던 그는 다이빙 여행에서 느꼈던 여행의 갈증을 자전거 세계여행이라는 방식으로 풀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내겐 미지(未知)며 만나는 사람마다 첫 대면’이라면서 ‘여행은 결국 타지에서 타인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 타인들은 그들의 세상 속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를 돌아보게 하며 여행을 풍성하게 해 준다’라고 믿었다.

그리고 2015년 3월에서 7월까지, 중국 베이징(北京), 타이위안(太原), 핑야오(平遥), 시안(西安), 정저우((郑州), 리장( 丽江), 다리(大理), 쿤밍(昆明)을 거쳐 라오스 루앙 프라방에 도착하기까지의 중국 여정을 기록한 이 책으로 그는 자전거 세계여행의 서막을 열었다.

‘자전거 여행’이란 표현은 지극히 중립적이다. 거긴 여행 수단을 건조하게 드러낼 뿐, 여행에 따르는 괴로움이나 외로움, 고달픔 따위는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속 팡파르를 울리며 떠났지만, 그의 자전거 여행은 쉽지 않았다. 도착 첫날에는 공안국 건물 벽에 기대어 비를 피하며 잠들어야 했고, 중국어를 몰라 비자를 연장하는 데 잔뜩 애를 먹었고, 엉뚱한 길로 들어 헤매기도 했다. 때론 좁은 방에서 여러 명과 잠들어야 했고, 때론 산비탈에 야영을 하기도 했다.

출발 때부터 그의 짐은 전부 열 뭉치였다. 그는 노트북과 디에스엘아르(DSLR) 카메라, 슬리핑백, 텐트, 옷, 자전거 수리 기구 등 60kg의 짐에다 자신의 몸무게 70kg을 보태어 20kg 자전거에 실었다. 여느 사람이라면 바퀴를 굴려 앞으로 나아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조건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걸 타고 여행을 이어가면서, 묵을 때마다 노트북을 켜고 그날의 일정과 견문, 소회를 기록했다. 여행 중 여러 차례 탈이 난 컴퓨터를 고치기 위해서 적잖은 고역을 치렀고, 카메라와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들은 아차 하는 순간에 날리기도 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길 위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감사와 사랑

고장 나는 건 컴퓨터뿐이 아니다. 카메라도, 휴대전화도, 무엇보다도 오롯한 이동 수단인 자전거도 지쳐서 퍼진다. 어디 집만 나서면 수리점을 만날 수 있는 대도시도, ‘신속한 에이에스(A/S)’를 자랑하는 대한민국도 아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이고, 망망대해 같은 길 위에서다. 나 같으면 진작에 접었을 여행을 그는 600일이나 이어갔다. 예사롭지 않은 그의 멘탈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초행이어서 끝을 알지 못하는, 미지의 행로를 한결같이 갈 수는 없다. 체력이 허락지 않아 원치 않게 쉬어가야 할 때도 있고, 아름다운 풍광에 마음을 빼앗겨 발걸음을 늦출 때도 있다. 무엇보다도 길에서 만난 벗들과 나누는 우정의 시간도 소중했다. 그가 책의 ‘에필로그’에서 ‘수많은 사람의 도움’을 언급하면서 이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보낸 까닭이다.

길 위에서 만나 연을 맺는 동무들이 하나같이 좋은 사람일 수는 없다. 그의 휴대전화와 카메라를 슬쩍해 간 우간다의 소매치기나, 휴대전화를 훔쳐 간 중국의 여성 오토바이 여행자들이 그렇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도 자신의 여행을 재미있게 만들어 주었다며 고마움을 표한다. 삶의 장면마다 명멸하는 기쁨과 슬픔이 어찌 길 위에서라고 모르는 척 비껴갈 수 있겠는가 말이다.

책은 비교적 잘 읽힌다. 그의 글에는 이른바 먹물들이 보여주는 사변적 어휘 따위는 없다. 그는 어떤 현상과 사물이 주는 느낌을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소화해서 독자에게 고스란히 날것으로 돌려주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운영해 온 블로그에 열혈 독자들이 적지 않았던 이유다.

짤막한 단문 위주로 이어지는 글의 호흡은 편안하다. 인물과의 만남과 동행을 표현하는 방식도 현재형의 대화 위주로 구성하여 현장감과 실감을 더 한다. 가는 곳마다 거듭되는 만남과 헤어짐을 마치 현미경을 들이대듯 세밀하게 묘사하는 글인데도 지겹지 않고, 쉬 읽히는 것은 문체가 지닌 힘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잘 읽히는 책, 후속편은 독자의 응원에 달렸다


600여 일간의 자전거 여행을 그는 4권으로 묶어내고 싶어 하는데 이 책은 그 첫 권이다. 애당초 여행의 전 과정을 한 권으로 묶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그는 여행기를 정리하면서 깨달았을 것이다. 여정과 상관없이 그 안에 담긴 에피소드만을 가려 뽑는다면, 그건 모험에 가까웠던 이 여행의 맥락을 무시하는 일이기도 했을 터이다.

그러나 후속편은 이 첫 권의 성패에 달려 있다. 이 첫 권에 대한 독자들의 호응이 일정하게 이루어져야만 후속 작업도 무리 없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펴낸 책의 성패란, 전적으로 시장과 독자에게 달려 있을 뿐, 지은이가 어찌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 책이 독자들의 호응과 응원으로 시리즈 완간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이는 단순히 책 한 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에 맞섰던 한 인간의 땀과 도전에 대한 이웃들의 응원과 격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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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지 않는 것들 - 최영미 시집 이미 1
최영미 지음 / 이미출판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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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영미가 ‘창비시선’으로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펴낸 것은 1994년 3월이었다. 두 달 뒤에 내가 산 책은 8쇄였는데 그의 시집은 2016년까지 52쇄를 찍었다고 한다. ‘초판 기천 부’도 다 팔지 못한다는 시집을 52쇄까지 찍었으니, 그가 주목받은 시인이었음은 분명하다.

 

그가 첫 시집을 낸 1994년 3월은 내가 4년 반 동안의 해직 생활을 거쳐 경북 북부의 시골 학교에 복직한 때였다. 이태 남짓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던 시기여서 그랬던지,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제대로 읽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 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서른, 잔치는 끝났다’(<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작과비평사, 1994)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기억은 표제 시 가운데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이라는 시구 정도다. 그것도 나는 ‘운동’을 ‘혁명’으로 ‘운동가’를 ‘혁명가요’로 바꾸어 기억하고 있었다. 글쎄, 대학 운동권 출신으로 비합법 조직의 사회주의 원전 번역팀에 들어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공동번역했다는 그가 ‘변혁’을 말하는 삐딱한 태도가 못마땅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30년 넘게 중고생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걸 업으로 삼았지만, 사실 시를 잘 모르며, 어쩌다 읽는 시도 읽을 때만 반짝, 맘에 두는 게 고작이다. 내가 그 뒤, 최영미나 그의 시집 따위는 잊어버리고 살았던 이유다.

 

최영미를 다시 기억한 것은 2016년, 그가 ‘저소득층을 위한 근로장려금 지급 대상’이 된 사실을 스스로 공개하면서다. 베스트셀러 시집을 낸 시인이 ‘연간 소득이 1천300만 원 미만이고 무주택자이며 빈곤층에게 주는 생활보조금 신청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꽤 충격적이었다.

 

이 땅이 시를 쓰는 것만으로 먹고 살 수 없는 사회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지만, 시인이 국가의 부조 대상이 된 ‘빈곤층’으로 떨어져 살아간다는 사실 앞에서 독자들은 일종의 열패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게 국민소득 3만 달러를 향해 치닫고 있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으스대는 이 나라의 현주소였으니까 말이다.

 

독자는 베스트셀러 시인이 살아가는 법을 모른다. 그들이 시를 발표할 지면을 어떻게 얻는지, 그리고 발표한 시가 어떻게 평단의 호응을 얻고, 또 어떤 방식으로 출판에 이르게 되는지 무지하다. 정확히 말하면 어떤 방식으로 인맥을 형성하고 그 ‘네트워크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상부상조하며 살아가는가를 알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꿈의 페달을 밟고>(1998), <돼지들에게>(2005), <도착하지 않은 삶>(2009), <이미 뜨거운 것들>(2013) 등 몇 권의 시집을 펴낸, 등단 20년이 넘은 50대 중반의 유명 시인이 극빈층으로 살아간다는 현실을 확인하면서 독자들은 머리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독자들이 어렴풋하게나마 시인이 살아온 삶의 얼개를 깨달은 것은 이태 뒤인 2018년이었을 것이다. 시인이 ‘괴물’(<황해문화> 2017년 겨울호)이라는 시로 문단 내 성추행을 고발하고, 방송에도 출연하여 문단에 만연한 성폭력 문제를 폭로했기 때문이다.

 

그의 고발과 폭로는 비슷한 시기에 터져 나온 검찰과 연극·영화계의 성희롱·성폭행 폭로로 촉발된 미투 운동으로 상승하며 전개되었고, 믿어지지 않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문단을 비롯한 문화계의 저명인사들이 연루된 이 문제는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지만, 서서히 잊히어 갔다.

 

올 6월에 최영미의 새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의 발간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는 다시 그의 존재를 재확인했다. 최영미의 새 시집은 그간 그의 시집을 펴내 온 ‘창비’도, ‘실천문학’도, ‘문학동네’도 아닌 ‘이미출판사’라는 낯선 곳이었다.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여러 해 물망에 올랐던 문단의 원로 시인 고은을 직격한 시 ‘괴물’을 발표하면서부터 그는 자신이 이전보다 더 어렵게 살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1심에서는 이겼지만, 그는 그 원로 시인이 자신과 언론 등에 제기한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치르고 있다.

 

그가 시집을 내기 위해서 접촉한 출판사는 모두 그에게 퇴짜를 놓거나 침묵으로 답을 미루었다. 그는 시집을 내기 위해 ‘출판사 등록’이라는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 했다. 미투로 금이 가게 하긴 했지만, 이 나라 문화계 네트워크 커뮤니티의 견고한 성채와 그 권력은 굳건하다는 사실은 증빙되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갖추고도 메이저 출판 자본에 기댄 문단 권력이 문학판을 좌지우지하는 전근대적 시스템은 건재하다. 작품 발표 지면을 무기 삼은 권력 앞에서 시인과 작가들이 숨을 죽이는 침묵의 카르텔도 여전하다.

 

나는 시인의 시집 발간 소식을 듣고 서가 한쪽에 꽂혀 있던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찾았다. 시집을 새롭게 일별하면서, 서른아홉 교사가 흘려보냈던 한 시인의 언어는 25년 뒤에 새롭게 다가옴을 깨달았다. 그러나 내 서툰 감상은 따로 적지 않는다.

 

내가 산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은 2019년 7월에 나온 초판 2쇄다. 6월에 낸 시집은 7월 중순께 4쇄에 들어갔고, 모두 8천 부쯤 팔렸다고 한다. 지금은 8월 중순, 그의 시집은 아마 1만 부는 너끈히 넘었으리라.

 

시집에 실린 시들은 시인의 외롭고 곤궁한 삶과 그 속에서도 쉽게 타협하지 않는 시인의 결기, 그러나 굳이 그걸 중뿔나게 표시할 필요가 없다는 처연한 자세 같은 걸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그가 등단 직후인 1993년에 발표한 시 ‘등단 소감’은 25년 경력의 저명 시인이었던 그의 삶이 의도적 고립의 결과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내가 정말 시인이 되었단 말인가 / 신문 월평(月評) 스크랩하며 /비평가 한마디에 죽고 사는
(중략) 내가 정말 여, 여류시인이 되었단 말인가 / 술만 들면 개가 되는 인간들 앞에서
밥이 되었다, 꽃이 되었다 / 고, 고급 거시기라도 되었단 말인가

 

시집의 첫 시편은 ‘밥을 지으며’, 그의 일상을 노래한 시인데, 마치 그의 삶을 물끄러미 조감하게 해 주는 작품이다. ‘대강 대충 살아왔’지만 ‘대충 사는 것도 힘들었’다는 그의 삶 말이다. 그것도 ‘목숨을 걸고 뭘 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제 계산이 맞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밥물은 대강 부어요 / 쌀 위에 국자가 잠길락말락 / 물을 붓고 버튼을 눌러요
전기밥솥의 눈금은 쳐다보지도 않아요! / 밥물은 대충 부어요. 되든 질든

되는대로 / 대강, 대충 살아왔어요 / 대충 사는 것도 힘들었어요 / 전쟁만큼 힘들었어요

목숨을 걸고 뭘 하지는 않았어요. / (왜 그래야지요?) / 서른다섯이 지나 / 제 계산이 맞은 적은 한 번도 없답니다.

 

<노컷뉴스>와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3년 전부터 거의 매일 도시락을 싸서 요양병원에 입원한 모친을 찾는 게 일상이라 했다. 아기가 된 어머니를 씻기고 몸에서 나온 것을 받아내는 생활이 시 ‘간병일기’가 되었다.

 

‘전쟁만큼 힘들었다’는 그의 삶은 그러나 그 자신이 선택한 ‘고립’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이 자신의 무계획한 삶의 결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문단에 만연한 성폭력을 고발하고 그로 말미암아 강고한 문단 권력과 싸우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문단 권력과 그 안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재고 살폈다면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터이니 말이다.

 

시집에 실린 마흔여덟 편의 시는 그런 시인의 시야에 포획된 벌거벗은 삶의 모습이다. 그것은 위태위태해 보이지만 삶의 숨길 수 없는 진실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 준다. 그리 어렵지도, 그리 쉽지도 않은 시편을 읽는 이들을 골똘히 생각에 잠기게 하는. 뒤표지에 실린 문정희 시인의 추천사는 최영미 시편의 성격을 가장 적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최영미의 시는 벌거벗은 검투사의 창처럼 위험하다. 계산이나 사교나 속도에 길들지 않은 호흡으로 위선이 숨을 곳을 차단한다. 예측불허의 표현과 자유로운 사고의 좌충우돌 속에 온몸을 던져 쓴 새 시집을 펼친다. 자신을 치열하게 드러낸 시와 외로운 삶의 우박들이 시린 상처처럼 솟구친다.”

 

최영미 시인의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은 한 시인의 개인시집이기 이전에 출간을 전후한 서사를 통하여 오늘의 우리 사회와 문화계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일종의 문학적 미니어처다. 베스트셀러 시인이 정부 부조의 대상이 되고 미투 운동에 동참해 힘들게 싸우는 것 등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전근대적 문단 시스템에 짓눌린 한 시인의 문학적 연대기를 재구성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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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국수를 먹다 문학세계 현대시인선(시선집) 215
이무열 지음 / 문학세계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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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무열 시집 '묵국수를 먹다'1970년대 대구의 문청(文靑) 시대

 

이무열 시인은 예순넷에 생애 첫 책인 시집을 냈다.


이무열이 시집을 냈다. 내게 이 사실은 '유명 시인 아무개가 새 시집을 냈다'는 여느 '팩트'와는 다른 결과 무게로 다가온다. 시집 <묵국수를 먹다>1990년대 후반 신춘문예에 동화로 당선한 뒤, 2010년에 계간 <유심>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이무열 시인의 생애 '첫 책'이기 때문이다.

 

20대의 막바지까지 이무열은 소설을 썼지만, 등단은 동화로 했다. 동화집 한 권 못 내고 시로 옮겨와 마침내 환갑·진갑을 넘긴 60대 중반에야 그가 첫 시집을 낸 것이다.

 

소설을 쓰며 젊음의 한때를 지나올 때, 나는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심야의 대구 시내버스 뒷좌석에 함께 앉아서 도저한 객기로 거품을 물던 젊은 시절을 나는 부끄러움과 함께 그리움으로 떠올린다.

 

1970년대 대구의 문청 시대

 

1970년대에 대구의 고교 문예반은 저마다 '문학동인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학교를 넘어 교류하고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학교별 동인은 계단(대구고), 근일점(계성고), 소라(대구상고), 씨알(대륜고), 태동기(대건고) 등이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시인 안도현도 태동기 출신의 후배다.

 

돌이켜보면, 기성 문인 못잖은 시와 소설을 썼던 그 시절 친구들이 교유한 커뮤니티는 가히 '학생 문단'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각 학교 동인들은 대구 YMCA 2층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시화전을 열어 관람객을 맞이하면서 들큼하게 '문학을 소비'하곤 했다.

 

시화전이 끝나면 YMCA 앞 중국음식점에서 반성회라는 이름의 식사와 곁들인 술이 한 순배 돌곤 했다. 3 때였던가, 짜장면과 배갈로 잔뜩 흥을 냈는데, 음식값을 낼 돈이 아무에게도 없었다. 내가 차고 있던 오리엔트 시계를 맡기고서야 식당을 나왔던 기억이 아련하다.

 

올해 예순넷, 다섯 살이 되었을, 경주에서 열리는 신라문화제 백일장에 떼 지어 몰려가 상을 석권하곤 하던 재주 많은 친구들은 대학을 거쳐 이내 하나둘씩 정식 등단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가장 먼저 시집을 낸 친구가 <작아지는 너에게>(1982)의 홍영철이다. 그는 이후에도 여러 권의 시집을 냈고, 서울에서 출판사를 꾸리며 살고 있다.

 

1988<얼음시집>을 냈던 송재학은 문학상을 여럿 받았고, 최근 열 번째 시집을 출간했다. 1989년에 <강물과 빨랫줄>을 낸 서지월도 전후 네댓 권의 시집을 내면서 대구에서 열심히 시를 쓰고 있다. 오정국은 다섯 번째 시집 <파묻힌 얼굴>(2011)을 냈고, 홍승우는 <식빵 위에 내리는 눈보라>(2007)로 뒤늦게 이 시집 출간 대열에 합류했다. 오두섭도 2010년에 시집 <소낙비 테러리스트>를 냈다.

 

장편소설 <바다로 가는 자전거>(1994) 외 여러 권의 소설과 시집을 낸 문형렬은 2017년에 문재인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를 썼다. 여러 권의 소설집을 펴내고 교직에서 물러난 박명호는 2016년에 소설집 <어떤 우화에 대한 몇 가지 우울한 추측>을 내고 부산에서 활동 중이다.

 

70년대 대구의 학생 문단(?)을 쥐락펴락했던 친구들은 모두 저마다 일가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 40년째 만나지 못한 친구들도 있다.

 

서른 고개를 넘기면서 습작기를 끝낸 나는 이들과 교유에서 멀어졌고,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면서도 문학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왔다. 지난 5월에 일제강점기 친일문인들의 문학과 삶을 다룬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을 펴낸 것은 그러니까 뜻하지 않은 외도인 셈이었다(관련 기사 :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2017년에 출판사로부터 책 출간 제의를 받기 전이다. 문득 책을 한 권 내어 볼까 싶어서 전화로 의견을 구한 친구가 이무열이다. 그는 단박에 좋다고 동의해 주었다. 나는 자넨 책을 냈는가 하고 물었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뭐 했어? 이 좋은 세월에. 등단한 지가 언젠데 아직 책 한 권을 못 냈다고?"

"글쎄, 말이야. 그렇게 됐어……."

 

60대 중반에 첫 책, 이무열을 지지함

 

이미 등단의 과정을 통과했던 이무열에게 책 내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 궁싯거리다가 오늘까지 온 이유쯤이야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몇 해 전, 50대 중반을 넘기면서 첫 시집을 낸 후배를 지지했듯 나는 환갑, 진갑 다 지내고 시집을 낸 이무열을 지지해 마지않는다.

 

이순을 넘기고 겨우 시집 한 권을 펴내 그가 무슨 영화를 보려고 했겠는가. 그는 다만, "도서관에서 경제원론 책 저만치 밀쳐두고 황동규·김영태·마종기 3인 시집을 읽던 그때"(시인의 말)를 가뭇없게 기억하면서 "어쩌다 스스로를 고립 가운데 머물도록 하면서" 시를 썼고, 이제야 그걸 독자들 앞에 들이민 것이다.


"내 허랑허랑 걸어온 내력 부끄러운 시편들을 두고 달리 무슨 변명의 말을 덧붙이랴? 우리네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개중 몇 편이라도 웅숭깊고 곰삭은 사람살이의 속내와 뒷 표정을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 '시인의 말' 중에서

 

시집 <묵국수를 먹다>에는 모두 예순두 편의 시가 실렸다. 책 끝에 붙인 이태수 시인의 해설에서 지적한 대로 "서정적 서사, 질박한 휴머니티"로 요약할 만한 작품들이다. 그의 시 곳곳에서 발견되는 서사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묵직한 묘사력은 소설로 시작한 그의 오랜 산문 공부의 결과일 것이다.

 

쉰다섯에 문예지에서 신인 추천을 받아 등단하던 시기를 돌아보는 시 '낭패'는 은근한 반어로 신인이 된 자신의 속내를 푸념처럼 고백한다. 짐작건대 이러한 시인의 자의식이 책을 내는 일을 주저하게 하지는 않았을지.


이것 참, 낭패로구먼 / 무심하게 딴전 피워 보는데

이보게 신인! / 앞발 긴 이리[]와 뒷발 긴 이리[] 함께

업고 업혀야만 다닐 수 있다는 그 깊은 뜻 아는가

치명에 들리도록 서른 해 / 가뭇없이 허우적거리던 진창길에서 만난

우리 서로 낭패 볼 일만 남았다네

- '낭패(狼狽)' 중에서

 

생애 첫 책으로 우리의 문청 시대는 마무리될까

 

표제작 '묵국수를 먹다'는 그가 화장품 회사를 퇴직한 뒤 '박가분' 가게를 꾸려오다 겪은 어느 고단한 삶의 장면을 노래한 작품이다. 늘 그만그만한 서사를 뒷배 삼아 교직하는 이무열 시의 특징이 제대로 드러난 시편이다.


주인 할아버지는 끓는 메밀 솥을 주걱으로 연신 휘젓고

묵 치는 할머니의 등은 해거리 비탈밭처럼 꾸부정한데

답답하고도 설운 심사 달래듯

묵국수 사발에 꾸역꾸역 고개를 처박았다

십 년 넘게 꾸려온 화장품 점포를

무조건 비우라는 집주인의 건물인도 청구소송에

오늘은 어쩔 수 없는 답변서를 작성해야겠다

애꿎은 송사에 변호사도 사지 못한 자에게

때로 산다는 건 쓸쓸한 식탐처럼 자꾸 목이 메는 것이라서

귀때기 파랗게 질리는 난전 시장통을 돌아

지지 눌러온 분노와 용서 사이

봉두난발로 분분한 눈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 '묵국수를 먹다' 중에서

 

그는 결국 시내 번화가에 내었던 가게를 접으면서 권리금 포함 1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던가. 고단한 삶의 이해는 그의 시선이 낮은 사람들의 성긴 삶에도 따뜻하게 머물게 한다. 그가 말한 "웅숭깊고 곰삭은 사람살이의 속내"로 잘 여미진 시편들 가운데 '김수우 씨'가 있다.

 

고아로 자라 "징역 살고 몇 차례 소년원에도 다녀온", "철가방 아저씨"는 뺑소니 차에 치여 홀로 죽어갔다. 그의 죽음 뒤에야 한 달 칠십만 원 수입 중 십만 원을 불우한 아이들 후원하고 아이들이 보내준 사진과 편지로 보람 삼아 살았던 그의 삶이 드러난다. "55킬로그램 체중에 키는 158센티미터"의 사내는 장기 기증 약속과 보험금 사천만 원을 후원회에 남겼다. 그리고 그는 영정사진 속에서 웃으며 묻는 것이다. "세상살이, 당신도 행복하십니까?"라고.

 

40년도 전의 젊은 시절을 소환하면서 나는 질펀하게 추억에 젖었지만, 그의 시집이 내게 다가온 느낌과 같은 무게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비록 다투어 출판되는 책 가운데 또 한 권으로 그칠지라도 그의 첫 책은 70년대를 문학청년으로 살았던 그는 물론, 우리에게 생애의 어떤 시기를 아퀴짓는 일이 될 것이다.

 

열아홉 살의 봄을 빛나는 언어로 형상화했던 그 시절의 벗 가운데 스무 살 약관에 신춘문예에 당선했지만, 이후 시집은커녕 오랫동안 시를 떠나 있었던 '()'가 있다. 이무열 시집을 뒤적이면서 나는 그에게 올해를 넘기지 말고 시집을 내라는 당부를 전하고 싶다. 그가 뒤늦게라도 자신의 시를 묶어내는 일은 우리가 함께 건너온 청춘, 그 번민과 치기의 시대를 마무리하는 일이 될 수도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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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의 진실
마이클 코더스 지음, 김훈 옮김 / 민음인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누구나 산에 오른다. 레저조차 마치 전쟁 치르듯 즐기는 성미 급한 한국인들치고 맞춤한 등산복이나 등산화 등의 장비를 갖추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주말마다 유명산은 물론이거니와 지방의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산에도 원색의 등산복으로 무장하고 전국에서 몰려든 '산악회 멤버'들로 차고 넘친다.

편한 등산복 바지는 사람들의 일상복이 된 듯하고 산 아닌 관광지마다 등산복과 등산화를 갖추어 입은 사람들로 붐빈다. 레저(등산)의 일반화·보편화라고 할 만한 이런 현상에서는 마치 그런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면 '신중산층'에서 낙오할지 모른다는 조바심마저 읽힌다.

다시 떠오른 오은선의 칸첸중가 등정 의혹

지리산이나 설악산 같은 높은 산도 곧잘 타는 '세미-프로'(?)들이라도 본격 '등반'과는 거리가 멀다. 요즘은 '티베트 트레킹' 같은 형식으로 해외에도 진출하는 모양이지만 '히말라야'라면 감히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다른 세계의 일이다. 감히 넘볼 수 없는 까마득한 세계의 소식은 가끔씩 국내에서도 '14좌 완등' 같은 뉴스를 통해 알려진다.

여성으로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히말라야 고봉 14좌를 완등한 산악인 오은선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도 그런 뉴스를 통해서다. 산악인 오은선은 최근 다시 뉴스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지난 일요일 SBS가 '그것이 알고 싶다'는 <정상의 증거는 신(神)만이 아는가- 오은선 칸첸중가 등정의 진실> 편을 방송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지금까지 14좌를 완등한 것으로 알려진 오은선의 칸첸중가(해발 8586m) 등정에 대한 의문을 다시 제기했다. 방송은 여러 가지 의혹을 제기하면서 그이의 칸첸중가 등정의 증거가 매우 부실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등정의 증거는 오은선이 제시한 2장의 사진과 함께 등정했던 셰르파의 증언이다.

그러나 등정의 증거로 제시된 사진에 대해 히말라야 등정 기록 권위자인 엘리자베스 홀리 여사는 '어디에서나 찍은 사진'일 수 있다며 그 증거능력을 부인하고 있다. 또 셰르파의 증언은 함께 등정했던 3명 가운데 두 사람의 동의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 명은 침묵하고 있고 나머지 한 명은 '정상 등정은 거짓말'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은 '신과 산'만이 알고 있나 

이 의혹 드라마의 핵심은 요샛말로 하면 '인증 샷'의 부실, 그리고 등정을 같이 한 셰르파의 엇갈린 증언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낳은 것은 등정의 현장이 인간의 발길을 좀체 허용하지 않는 지구상 세 번째로 높은 칸첸중가 봉이라는 것이다.

거기 오른 인간의 자취를 기억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말없는 산과 동행한 셰르파밖에 없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진실의 열쇠는 인간이 쥐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극한의 기후와 높이로 인간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이들 산에 대한 인간 도전의 역사는 꽤 뿌리 깊다. 1953년 에드먼드 힐러리가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산에 등정한 이래, 히말라야의 산봉우리들은 그 극한에 도전하는 인간의 도전 앞에 쉽게 그 속살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힐러리의 에베레스트 등정 50주년을 맞은 2003년 시즌 동안 총 264명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는 신기록이 수립됐다. 이듬해에는 330명이, 2006년에는 460명이, 2007년에는 근 600명이 넘는 사람이 산의 정상을 밟았다. 더 이상 에베레스트는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는 금단의 땅이 아닌 것이다.

산에 사람이 꾀기 시작하면서 에베레스트는 변질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변질된 것은 에베레스트가 아니라 거기 모이는 사람들이다. 특히 상업등반대는 등반을 일종의 상행위로 타락시키며 에베레스트를 가장 높은 '인간성의 무덤'으로 만들고 있다고 미국 언론인 마이클 코더스는 증언한다. 자신의 에베레스트 등반 경험을 곁들인 그의 저작 <에베레스트의 진실(원제 High Crimes)>(김훈 옮김, 민음인 펴냄)을 통해서다.

'탐욕과 협잡의 공간'으로 바뀐 에베레스트

이 책은 에베레스트 등반 후 하산길에서 지쳐 쓰러지지만 가이드와 셰르파에게 버림받고 실종된 한 볼리비아 출신 미국 의사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아버지의 실종 사건을 파고 든 딸의 작업에 동참한 저자는 '탐욕과 협잡의 공간'으로 변질된 에베레스트를 충격적으로 전하고 있다.

'충격적'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주말에 등산을 즐기는 우리 시대의 보통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 일원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희생하면서까지 동료를 살린 고귀한 우정도, 자연이 깨우치는 겸허와 달관의 철학 등 등반의 순수성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산이 있어 오른다'는 고전적 금언이 무색할 지경이다. 

정상에 오를 수만 있다면 뭐든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히말라야에 모인다. 베이스캠프 주변에서는 필수적 등산장비 절도와 마약 밀수가 공공연하게 저질러지고 일부 산악인들은 해발 6000미터가 넘는 곳에서 매일 대마초와 맥주, 위스키에 몽롱하게 취해서 지내기도 하고, 창녀들과 뚜쟁이들이 횡행하기도 한다. 이 모든 타락상의 배경은 '돈과 체력'만 있으면 에베레스트를 정복할 수 있는 현실이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변화 앞에서 원로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경은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제게는 에베레스트의 미래가 밝아 보이질 않습니다. 베이스캠프에는 천 명의 사람이 북적대고 오백 조의 텐트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음식 파는 곳, 술 마시는 곳, 요즘 시대의 젊은이들이 즐길 만한 그 밖의 여흥거리를 제공하는 곳도 있고요…… 저는 베이스캠프나 그 근방에 주저앉아 캔맥주나 들이키는 일 따위를 등산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타락상에 비길 수 없는 더 끔찍한 일은 거기에 동료애와 희생정신, 협동과 배려 같은 덕목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2006년 5월, 에베레스트를 단독 등반 중이던 데이비드 샤프가 죽었다. 그의 죽음은 '밑바닥까지 추락한 에베레스트 등반이라는 스포츠의 최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가 구조를 기다리며 죽어가던 며칠 동안 불과 손닿을 거리를 '사십여 켤레의 등산화가 두 번씩이나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힐러리와 스페인 저명 산악인 후아니토 오이아르사발은 말한다.

사람의 목숨은 산 정상에 오르는 일보다 훨씬 더 소중합니다. 헌데 그간 사람이 죽어가는 걸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났습니다.

저는 에베레스트 등반을 대하는 모든 사람의 태도가 끔찍한 형태로 변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저 그 꼭대기에 오르고 싶어 하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곤경에 빠진 사람을 봐도 아는 체를 하지 않습니다.
- 이상 에드먼드 힐러리

그 산은 여러 해 전에 이미 서커스장이 되었다. 그리고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있다.
- 후아니토 오이아르사발

2004년에 가이드 한 명과 두 명의 셰르파를 고용해 에베레스트를 오르다 실종된 닥터 닐스 안테사나의 경우도 비슷했다. 이 책은 안테사나의 딸 파비올라와 함께 저자가 파헤친 닥터 안테사나의 실종사건 전말기라 할 수 있다.

닥터 안테사나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뒤 하산하다가 가이드인 구스타보 리시와 두 셰르파에게 버림받은 뒤 실종됐다. 하산은 등정 못지 않게 위험한 일이라는 걸 닐스는 미처 몰랐다. 이를 충고하지 않은 가이드 구스타보는 '상업등반'의 과실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된 숱한 사이비 가이드의 한 사람이었다.

등반의 '상업화'가 초래한 사고

그의 고객은 탈진과 환각에 빠졌지만 가이드는 비디오 촬영에 골몰하며 40여 분을 소모했다. 그에게는 정상 등정을 자신의 경력에 넣고 그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마음을 뺏기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의 고객은 쓰러진다.

두 셰르파가 밧줄로 닐스를 묶어 절벽 아래로 내리는 등 악전고투했지만 진전은 없었다. 심해지는 강풍과 바닥난 산소통을 두고 구스타보는 혼자 하산했고 두 셰르파 역시 닐스에게 겉옷을 벗어준 뒤 하산해 버렸다. 그리고 예순아홉 살의 닐스는 천천히 죽음을 맞는다.

지은이는 닐스의 실종을 추적하다가 구스타보에게 고객이 그렇게 위급한 지경인데 왜 그렇게 정상에서 오랜 시간을 허비하였느냐고 묻자 구스타보는 이렇게 대답한다.

"정상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죠. 정말 근사했어요. 판타스티코(fantastico)!"

두 셰르파 역시 다르지 않았다. 눈벽에 앉혀놓고 내려올 때까지 닐스는 살아 있었지만 한 셰르파는 다른 셰르파를 불러 입단속을 했다.

"저 사람들한테 우리가 그 사람 곁을 떠날 때 그 사람이 아직 살아 있었다는 말 같은 건 하지 말아요."

하산 뒤 구스타보는 자신의 고객이 산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자신의 웹사이트에는 스페인어로 '정상! 구스타보 리시가 에베레스트를 정복했습니다'라고 자랑했다. 하지만 자신이 고객을 구하려는 노력을 하지도, 자신이 그 산에 한 사람을 버리고 내려왔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덕에 가장 유명한 등산 가이드가 되었던 로브 홀은 1996년, 죽어가는 고객을 뒤에 남겨놓기를 거부했기에 거기서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8년 후 닐스는 그 산에서 자신의 가이드에게 버림받고 죽었다. 닐스는 단지 형편없는 가이드를 선택했던 불운한 사람이었던 것일까. 

에베레스트 산에서 일하는 가이드들에게는 어떠한 자격조건도 요구되지 않는다. 등반 훈련, 경험, 범죄기록이야 어떠하든, 유일한 자격조건이라고는 가이드로 일하기 위해 자기네 정부에 돈을 낼 의향이 있느냐 하는 것뿐이다.  


에베레스트 산이 지상에서 훈련을 가장 잘 받고 가장 경험이 풍부한 가이드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가이드들은 '크레바스 구조법도 모르고, 눈사태에서 안전을 확보할 만한 자격도 갖추고 있지 못하고, 기본적인 응급처치 훈련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엉터리 가이드를 거를 수 없을 만큼 이미 히말라야 등반은 타락하고 있는 것이다.

에베레스트도 치부를 위한 시스템?

에베레스트는 현존하는 가장 높은 봉우리긴 하지만 그것이 가장 오르기 어려운 산이라는 뜻은 아니다. 베테랑 산악인들은 오늘날 에베레스트는 8천 미터 급 고봉들 가운데서 '사실상 가장 오르기 쉬운 산'이라고 말한다. 여러 기술적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는 사다리나 고정로프 덕에 매듭짓는 법도 잘 모르는 초심자들도 높은 곳에서 견딜 수 있는 유전적 자질과 체력을 가지고 있으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산 외에 오른 산이 몇 군데 되지 않는 이도 에베레스트를 오르고 나면 하나같이 '세계적인 산악인'이라는 칭호를 얻는 상황에서 에베레스트는 돈을 벌게 해 주는 거대한 시스템이 되어 가고 있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산악인뿐 아니라 에베레스트 강의, 슬라이드 쇼, 다큐멘터리, 리얼리티 텔레비전 등으로 에베레스트는 마치 일상생활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고 있는 것이다.

책은 저자의 경험(통신원 자격으로 산 정상에 오르는 과정을 보도하기 위해 '코네티컷' 에베레스트 등반대에 참여)과 닐스 안테사나의 실종 사건을 추적하는 두 이야기를 긴박감 있게 들려주며, '에베레스트의 변질'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준다.

한때는 숱한 산악인들의 꿈이요, 정복의 대상이었던 에베레스트는 돈 많은 일반인을 위한 최고급 레저의 대상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또 에베레스트 정복은 유명세를 탈 기회로 이용되고 있는 등 등반의 순수성은 상업주의로 오염되고 있는 것이다.

그 상업주의의 맥락은 적어도 한국 땅에서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 최초',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에 대한 집착과 잇닿는 것처럼 보인다. 오은선의 '칸첸중가 의혹'은 히말라야 등정조차도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고 과정이 아니라 성과만을 중시하는 우리의 사회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

고산 등반은 이미 자본을 절대 필요로 한다. 한 달에 2억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는 8000미터 급 등반에 자본은 이미 그 처음과 끝을 좌우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순수한 알피니즘 정신'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결벽주의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칸첸중가 의혹'이 결국은 그런 경쟁주의의 필연적 결과라는 점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히말라야의 고봉을 오르는 고산 등반은 혹독한 주변 환경과 인간 한계에 대한 도전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지금 추구되어야 할 것은 경쟁과 성과가 아니라 그런 기본을 확인하는 '등반의 순수성'이다.

결국 이 책에서 저자는 등반의 상업화가 초래한 한 아마추어 등반가의 죽음을 통해 지상에서는 사소한 범죄에 불과한 일이라도 높은 산에서는 인명을 앗아 가는 '치명적인 범죄(High Crimes)'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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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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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나는 강명관을 읽고 싶었다. 물론 그의 저작들이 신문 지상에 소개될 때부터다. 그가 매주 한 차례씩 <한겨레>에 연재하던 ‘고금변증설’을 읽으면서 그 생각은 굳어졌다. 그러나 인연이 닿지 않아서인지, 차일피일하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을 구입한 게 지난 달 말께다.

열흘 전쯤부터 학교에 가져다 놓고 틈틈이 읽기 시작했다. 마지막 몇 장이 남았을 때 나는 동료에게 그렇게 말했다. 최근 한 삼년 동안 가장 즐겁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읽은 최고의 책이라고.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두고두고 읽었다. 아까워 한꺼번에 먹어 치울 수 없었던 박하사탕처럼.

강명관은 한문학자다. 그는 한문학 연구를 위해 선인들의 문헌을 읽어야 하는 과정에서 ‘문학과 관련 없는 이런 저런 자료’를 만나는데 이런 자료를 ‘계륵(鷄肋)’이라 말한다. ‘애써 챙겨두자니 별 소용이 없을 것 같고, 그냥 버리자니 못내 아깝다’(머리말)는 뜻에서다. 그가 건강 문제로 얻은 뜻밖의 휴가에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쓴 책이 <조선의 뒷골목 풍경>이다.

‘강명관 교수와 함께하는 유쾌한 조선 풍속기행’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저자는 ‘조선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일반적 평가를 부정한다. 조선의 뒷골목은 “유흥계를 호령한 무뢰배들, 투전 노름에 골몰한 도박꾼, 술과 풍악으로 일생을 보낸 탕자들, 반양반의 기치를 높이 든 비밀 폭력조직, 족집게 대리시험 전문가, 벼락출세한 떠돌이 약장수, 설렁탕 한 그릇에 조직을 배신한 도적…….”(책 표지)으로 어지러운 것이다.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왕과 양반처럼 고귀한 사람들 아니면 홍경래나 임꺽정처럼 무언가 큰 사고를 낸 사람들뿐’이지만 저자의 박람강기(博覽强記)는 뒷골목에서 노닐던 ‘역사가 기억하지 않는 조선 사람들’을 찾아낸다. 그는 서설(‘잊혀진 조선 사람들의 역사를 위하여’)에서 굳이 ‘하찮은 잡동사니 같은 주제’를 다루는 이유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있다.

우리 역사는 조선의 금속활자를 구텐베르크의 그것보다 88년 앞섰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한국의 금속활자는 유럽의 그것과는 달리 지식의 대중적·보편적 확산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 이는 한국사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금속활자의 의미를 규명하지 않고 ‘민족 문화유산’이란 이름으로 모든 것을 은폐해 버리는 사례다. 다양성과 구체성을 지워버리고 단일한 중심만을 내세워 대상을 왜곡시키는 권력이야말로 중심적 담론의 독재가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저자는 ‘인간은 결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해가는 존재’이며,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변화시켜 나가는 존재’로 이해한다.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인물들을 통해 조선 후기사를 바라본 이 한문학자는 역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진술함으로써 몸풀기로서의 서설을 맺는다.

현재의 인간은 시간적 변화의 산물이며, 역사학은 바로 변화하는 인간을 해명하는 학문이다. 나는 어떤 교훈적, 목적의식적, 기념비적 역사관도 믿지 않는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에서 저자는 지배 중심의 역사에 묻힌 서민들의 삶과 문화를 복원한다. 그는 <조선왕조실록>과 <백범일지>는 물론, 개인 문집 등 다양한 자료를 통해 이른바 ‘뒷골목 비주류 인생’들의 삶을 고스란히 되살린다.



▲ 투전도(김득신) ⓒ 조선의 뒷골목 풍경

그들은 민중의(民衆醫), 군도(群島)와 땡추, 노름꾼, 왈자, 탕자이며, 정절을 벗어던진 여인네다. 그뿐만 책속에는 아니라 타락과 부정으로 얼룩진 양반들의 과거가, 조선후기의 유행을 주도한 오렌지족인 별감이, 서울의 도살면허를 독점했던 반촌(泮村)과 탕자들이 벌이는 호사의 극이 온갖 자료들의 뒷받침을 받으며 차례차례 드러난다.

교과서의 역사를 ‘공문서 역사’라고 본다면 거기에선 아무도 삶과 인간의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거기 등장하는 이들은 임금이거나 장수고, 역적이거나 충신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명관이 펼쳐 보이는 이 조선 후기사에 좌충우돌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조금씩 모자라거나 조금씩 넘치는 이들로, 바로 오늘도 우리 주변에서 살아 있는 캐릭터들이다.

비록 그게 18, 9세기의 조선 풍경이지만, 거기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 인간의 삶이 지속되는 한, 한 사회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모이면 도적이 되고 흩어지면 백성이 되’는 원리야 저 봉건사회나 이 자본주의 사회나 무엇이 그리 다르겠는가.

<조선의 뒷골목 풍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들은 무명의 의사들이다. 허준이나 이제마처럼 학식을 갖추고 조정에 중용된 명의들이 아니라 제대로 의서 한 권 읽지 못했지만 숱한 임상의 경험으로 죽어가는 백성들을 살려낸 민중의 조광일, 백광현, 피재길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이름을 얻으면서 어의가 되기도 했지만, 이들의 존재가 사실상 의료혜택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었던 민중들을 살려낸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한 개인의 출세기가 아니라, 공식적 의료시스템 부재의 조선사가, 궁극적으로 약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 죽음을 기다리는 현대사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읽어낸 저자의 눈썰미가 두드러진다.

조선 후기 경제성장과 함께 일어난 변화 중에 도박의 성행과 관련된 풍경도 흥미롭다. 바둑, 장기, 쌍륙, 투전, 골패 가운데서 도박계의 패권을 차지했던 투전은 ‘소비하는 인간’으로서 상인 내지 중간층 인간형을 출현시켰다. 이 도박의 성행은 조선 후기사회에서 늘어나는 사회적 불확실성의 표지였다고 할 수 있다.  
 

'금주령’이라면 20세기 초반의 미국사회를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조선조 내내 국가가 수시로 금주령을 발동하여 개인의 음주를 금지했던 역사적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귀중한 곡물을 축내는 주범이었던 술에 대한 이 국가적 통제는 강력했지만, 실제 단속에 걸리는 이들은 힘없는 백성뿐이어서, 음주는 정작 양반 계급이 누릴 수 있었던 특권적 쾌락이었던 모양이다.

사극 따위에는 주요 교통로마다 술과 밥을 파는 주막이 등장하지만, 기실 조선시대에 술집이 등장한 것은 상공업이 발달한 조선 후기로 봐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술집 풍경은 술을 뱃속에 쏟아붓고 주정을 하고 싸움을 벌이고 술집을 마구 부수는 형태였다고 책은 전한다. 술집 풍경은 불과 2, 3백 년 전이나 2, 30 년 전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중세사회에서 가장 공정한 인재등용 방법이었던 과거는 실제 시행과정에서 엄청난 불공정을 내포하고 있어 그 속에 중세적 불평등을 내포하고 있었던 제도였다. 18세기께 이미 과거는 인재선발 기능을 잃었다. 출사(出仕)의 욕망은 들끓고, 그 욕망을 충족시켜 줄 벼슬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다가 소수 문벌가문이 관직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과거는 ‘타락과 부정으로 얼룩진 양반들의 잔치’로 전락하면서 온갖 비리와 부정의 백태(百態)가 연출되었다. 숱한 선비들이 머리를 썩이며 공부했던 내용도 기실 국가 관료로서의 현실적 유용성 따위와는 무관한 시(詩)와 부(賦)에 그쳤다. 그러니 벼슬길에 나아간 선비들이 서리들의 입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지은이는 조선조의 과거 열풍과 오늘날의 고시열풍을 견주면서 우리는 아직도 ‘조선 시대’를 치르고 있다고 개탄하기도 한다.

감동과 어우동은 조선조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들이다. 이 책은 이들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 여인들을 도덕적으로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스캔들을 조선시대 남성의 성적 욕망의 분출과 병치하면서 그 속사정을 살피고 있다. 흔히 ‘도덕의 나라’라고 했지만, 양반들의 광탕함을 살피면 조선조는 단지 남성의 성적 욕망을 정당화한 사회였을 뿐이었다. 중종 이후 실록에서 성적 언어가 공식적으로 추방되었을 뿐, 조선사회는 결코 윤리적 사회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고려말 안향 집안의 노비 후예들로 성균관 주변에 형성한 마을, 반촌(泮村)이 ‘서울의 게토, 도살면허 독점한 치외법권 지대’였다던가, 나라를 뒤흔든 무뢰배들인 ‘검계와 왈자’는 술집과 기방과 도박판을 주름 잡, 조선 후기 민간예능의 주 향유자였다는 사실을 저자는 꼼꼼하게 천착하고 있다. 

이들 왈자 중의 한 부류인 별감은 호화로운 복식과 치장, 온갖 놀이문화, 유행을 주도하면서 시정의 유흥공간을 장악한 집단이었다. 저자는 이들은 역사 발전에 긍정적 기능을 한 것은 아니지만, 조선 후기의 정치와 경제가 소외시킨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부류로 바라본다. 그러면서 오늘날 ‘오렌지족’과 그들을 비기면서 변화와 불변의 본질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책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것은 탕자다. ‘은요강에 소변 보고 최음제 춘화 가득’한 이들은 ‘유흥하고 소비하는 인간’의 전형으로 저자는 소설 <이춘풍전>과 <게우사>(판소리 ‘무숙이타령’의 사설 정착본)의 주인공 이춘풍과 무숙이를 꼽는다. 이들은 오직 소비와 유흥만을 일삼다가 끝내 몰락하는 인물인 바, 저자는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지금 유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소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반문한다.

저자는 이 책이 한문학자로서 연구 과정의 결과로 얻은 가외의 소득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한 시대의 풍속사, 미시적 생활사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탄탄한 자료의 뒷받침을 통해 그 객관성을 얻고 있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이들의 인생을 복원하면서, 조선 후기 사회의 삶과 사회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네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인간사회 일반에 담긴 당대의 문제의식과 부조리, 민중들의 삶의 애환이란 시대를 넘어 연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다양한 자료와 해박한 박람강기를 통해 증명해 낸다. 그것은 그가 머리말에서 언급한, “현재의 인간은 시간적 변화의 산물이며, 역사학은 바로 변화하는 인간을 해명하는 학문”이라는 진술과 인과적으로 맞닿아 있다.

책 뒤에 실은 보론 ‘옛 서울의 주민 구성’도 흥미롭다. 서울에 사는 이들이라면 글을 읽으면서 18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 곳곳에 실은 온갖 사진, 그림 자료들도 이 흥미로운 시간여행의 동반자가 넉넉히 되고도 남음이 있다.

2001년 저작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는 저자의 ‘조선 풍속기행’ 첫 번째 이야기다. 순서야 바뀌었지만, 나는 인터넷 서재의 보관함에다 위 책과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를 쟁여 두는 것으로 이 책을 읽은 즐거움과 소회를 마감하기로 한다.


<2009.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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