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 - 제138회 나오키 상 수상작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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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든 서로 빼앗는 아버지와 딸.  배덕과 퇴폐의 '러브스토리'

   북오프에서 산 책이다.
   사 둔 지 몇 개월이 지나도록 진도가 좀처럼 안 나갔다. 깨끔깨끔 읽다가 지난주던가 지지난주에 읽기를 마치고 멍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아버지와 딸"의 농밀한 관계라는 것이 세일즈 포인트였던 듯하다. 매우 음험하고 퇴폐적인 냄새가 나는 테마인데, 라노베 출신인 작가에게 선뜻 요구할 만한 가벼움 혹은 몽환적이고 탐미적인 터치는 일체 배제된, 시적이면서도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이 되었다.
   부녀상간이라는 것은 의외로(?) 소설판 여기저기에서 자주 보인다. 단 테마로서가 아니라 소재로서이다. 개별 작품을 거론하기엔 내 기억력이 막장이라 거시기한데, 봐온 바로는 대부분 어린 딸에게 짐승같은 욕망을 품고 덤벼든 파렴치하고 추한 중년 남자와 일방적으로 희생당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품은 여자라는 알기 쉬운 구도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나보코프의 [롤리타]도 이 경우인데, 이 쪽은 "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린 소녀에 대한 성적 환상이라는 로망에 충실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엔딩까지 읽으면 결국 대상에 대한 어떤 조건주의(?)를 뛰어넘어 진정성을 얻는, 육체적 환상에서 헌신적 사랑으로의 승화 같은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하는 기분도 들지만, 뭐 오프 더 토픽이다.
   근친상간이라는 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이어지는 유서깊은 비극적 가족 드라마의 단골소재이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고딕 로맨스나 관능소설 종류에서 맥을 잇고 있는 듯 싶다. 특히 남매상간 내지 남매간의 순애를 테마로 비극적 드라마를 연출하는 작품은 여성 취향의 관능소설이나 소녀소설, 순정만화 뿐 아니라 트렌디 드라마 등지에서 자생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관계를 그와 나만의 폐쇄된 세계로 파악하며 "금기" 혹은 "금단"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외압과 시련에 시달리는 것을 지고의 로맨스로 꿈꾸는 "소녀"들의 우주 안에서는, "혈연"이야말로 둘만의 세계를 보다 굳건이 하는 장벽임과 동시에 외부의 시련이 더욱 격렬하게 부딪치는 빌미가 된다.
   한편 부녀상간이라는 테마가 의외로 뜸한 것은, 현실적으로 '아버지'라는 존재가 딸에게 있어서 그다지 이상적인 남성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근친상간을 꿈꿀 정도로 데인저러스 앤드 무빙한 아버님이라는 것은 빅토리안 잉글리시 시대극 정도에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오빠 혹은 남동생과의 관계보다는 아버지와의 관계 쪽이 좀더 금단의 로망에 가깝다. 상식적인 얘기로 오빠/남동생과 나는 이미 2촌관계이며, 한 계보 안에서 대등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수직으로 이어지는 혈통의 이미지, 연애관계의 전제가 되는 권력관계의 강렬함, 만든 자와 만들어진 자라는 마치 신과 그 피조물의 관계와도 같은 유비와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배가되는 악마적인 뉘앙스라는 점들을 생각해 보면 남매보다 부녀의 관계 쪽이 훨씬 우월하다.
   [내 남자]는 탐미풍 순정만화의 그것 같은 부녀상간의 구도를 계승하고 있다. 특히 "아버지" 쿠사리노 준고의 외양은 그야말로 순정만화풍의 미남자다. "비의 향기가 나는 남자" "우아하지만 어딘가 초라한 남자" "우아한 빈곤남(...)" 등등의 낯간지러운 수사가 어울리는, 길게 뻗은 팔다리와 일견 친듯하게 웃는 듯 하면서도 어딘가 범죄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위험한 분위기. 그러나 이 작품은 순정만화풍의 문법대로 위험한 매력을 풍기는 남자주인공에 대한 절대적인 동경과 열병과도 같은 애증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이 작품이 여타 근친애물과 차별화되어 일반 소설로서의 풍격을 갖춘 지점은 인물들에 대한 냉정하고 현실적인 거리감과 그것을 실현한 농밀한 문체에 있을 것이다.
   총 여섯 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영화 메멘토를 상기시키는, 단위별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메멘토에서는 기껏해야 분단위였으나 여기서는 년 단위다. 각 단위 속에서는 '아버지' 쿠사리노 준고와 '딸' 쿠사리노 하나, 두 사람의 관계와 그들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인생에 있어서의 중요한 전환점 혹은 사건이 각자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준고와 하나 자신들이 화자가 되는 경우도 있으나 그들의 관계는 무척 현상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본질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왜" 서로에게 기형적으로 의지하는 것일까. 아버지가 딸에게 갖는 집착의 정체는 무엇일까, 혹은 딸이 아버지에게 갖는 그것은 무엇일까. 의문의 단서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장면과 여러 화자들의 시점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고, 아버지와 딸이 처음으로 대면하는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시원함이 아닌 묘한 답답함과 함께 '답'이 나오게 된다.

   제 1장 : 2008년 6월 '하나와 낡은 카메라' 
   제 2장 : 2005년 11월 '요시로와 낡은 시체'
   제 3장 : 2000년 7월 '준고와 새 시체'
   제 4장 : 2000년 1월 '하나와 새 카메라'
   제 5장 : 1996년 3월 '코마치와 무풍'
   제 6장 : 1993년 7월 '하나와 폭풍'


   시간순으로 스토리를 요약해 보자면 대충 이렇다.
   다케나카 하나라는 이름으로 어촌인 친척 집에 입양되어 살던 하나는 어느날 커다란 쓰나미에 휩쓸려 가족을 잃고 먼 친척인 쿠사리노 준고와 만난다. 사실 하나는 준고가 열 다섯살 때 유부녀와의 불륜으로 낳은 딸로, 준고는 자신이 사는 홋카이도 마을의 촌장 격인 오오시오 씨의 반대를 뿌리치고 하나를 양딸로 삼는다. 하나는 해일이 닥쳤을 때 자신을 길러준 가족이 자신만 버리고 함께 죽음을 택했다는 사실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준고 역시 어릴 적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가족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은 부녀는 서로에게 기형적으로 의존하고 의지하는 사이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들의 삐뚤어진 관계를, 준고의 여자친구 코마치가 눈치채고 오오시오 씨에게도 들켜 버린다. 결국 오오시오 씨는 우발적인 살해의 희생물이 되고, 부녀는 도쿄로 거처를 옮긴다. 하지만 형사 출신의 다오카가 그들을 좇아 오자, 준고는 그를 칼로 찔러 죽이게 된다…
   살인사건이 두 차례나 발생한다고 해서 이것을 미스터리나 서스펜스 소설 쯤으로 기대해서는 안된다. 미스터리의 사돈의 팔촌의 옆집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 정도의 관계성밖에 없을 것이다. 시간의 역구성이라는 기법만 봤을 때는 트리키하지만 이 작품은 살인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로 퇴폐적인 인간관계라는 주제를 농밀한 심리묘사와 묘한 시적 리듬감과 색채감이 풍부한 문체로 그려낸, 말하자면 일반소설이다.
   앞서 순정만화스런 주제와 일부 인물 조형에 대해서 말했지만, 대부분의 인물조형과 배경설정은 매우 현실적이다. 따라서 현실감각을 견지한 상태로 읽어나가지만, 특히 겨울이라는 계절, 바다, 눈雪 등의 자연묘사가 갖는 독특한 시적 박력에 압도되어 그곳에 사는 인물의 모습에 마치 동물과도 같은 야성과 운명에 대한 체념을 덧칠하게 된다.
   상식적이고 사람 좋은 속물의 대표자처럼 그려지는 오오시오는 부녀의 관계를 알고 하나에게 말한다. "사람이 해도 될 일과 해선 안될 일이 있다. 너희들은 해선 안될 일을 했다. 그건 짐승이 할 짓이다". 그러자 하나는 "아빠와 딸 사이인데, 해선 안될 일 따위 아무것도 없어" 라고 받아친다. 이 장면에서 절실히 통감한 것은, 인간적인 "말"의 무의미함이다. 오오시오는 단지 속빈 말만을 되풀이할 뿐, '어째서' 그것이 인간이 해선 안 되는 일인지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 공허한 말에 기대다가 그는 결국 '짐승'에게 살해당하고 마는 것이다.
   한편 이 현실미 때문에 자신이 가진 소녀취향의 그로테스크감을 깨닫기도 한다. 이 작품은 말하자면 부녀상간 환상이 현실적으로 실현되었을 때 어떤 막장;이 초래되는가를 그린 사고실험의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유년체험의 트라우마 때문에 전혀 성숙하지 못한 채 유아적인 집착에 매몰되어 버린 관계이며, 둘만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사람을 둘이나 죽여버리는 추악함이다.
   국내에도 계약된 작품이고, 사쿠라바 가즈키의 발랄한;; 면모만을 아는 분들에겐 충격과 공포의 한권이 될 테지만 패륜에 치를 떠는 사람들에게는 선뜻 권할 수 없는 책이다. 비슷한 분위기와 테마는 [소녀 나나카마도와 일곱 명의 가여운 어른]에서 다루고 있는데, 이 쪽은 훨씬 다가가기 쉽고 건강하다. 그러고 보면 각 장마다 일인칭 화자가 바뀌는 구성은 [내 남자]와 비슷하고 그런 맥락에서 일전에 [소녀 나나카마도]가 [내 남자]의 습작이 아니었을까, 라고 썼는데, 지금 생각하면 인물들의 개성이 확연히 드러나면서도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았다는 점, 알기 쉬운 드라마 포인트가 있었다는 점에선 그쪽이 낫다. 어쩌면 두 작품은 표리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쉽고 건강한 나나카마도가 表 라면 내 남자는 관계의 어두운 면을 묘파하는 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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