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놉티콘 : 제러미 벤담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4
제러미 벤담 지음, 신건수 옮김 / 책세상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벤담은 자신의 이상을 실험하기 위하여, 프랑스 혁명으로 개방된 개혁의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그는 영국의 관습적 보수주의와는 대조되는 '거대한 전환'에 매혹되었다. 벤담은 다양한 주제에 관한 논평과 조언을 담아, 프랑스 제헌의회에 많은 편지를 보냈다. 이 책이 번역한 『파놉티콘』 프랑스어 판도, 벤담이 영어로 쓴 파놉티콘에 관한 여러 글들의 핵심을, 1791년에 친구인 에티엔 뒤몽 Pierre Étienne Louis Dumont과 함께 축약·번역하여 프랑스 국민의회에 보낸 것이다. 그와 같은 열정적 노력에 대한 응답으로, 벤담은 1792년 프랑스 명예시민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벤담은 이내 프랑스혁명에 대한 지지를 거두게 된다. 그는 '자연적 정의'라는 것의 논리적 토대가 약하다고 보았다. 그는 '공리의 원칙' 이외의 다른 어떤 원칙들, 예컨대 금욕주의, 공감(반감)의 원칙과 같은 것들은(벤담에 따를 때, '정의'는 공감원칙의 변형에 불과하다), 자칫 '지배자 한 사람의 최대 행복, 혹은 지배계급의 최대 행복'에 복무하는 것이 되기 쉽다고 생각하였다.

  다시 파놉티콘 이야기로 돌아와서, 벤담은 감옥을 사회 개혁의 최전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1786년부터 1813년까지, 강박적이라 할 정도로 파놉티콘의 구상과 실현에 집착하였다. 아버지의 유산까지 모조리 쏟아 부었지만, 결국 사업은 실패하고 그는 파산하였다. 영국 정부까지 파놉티콘보다는 완벽한 개인별 분할 수용을 위주로 하는 미국 펜실베니아 모델을 채택하기에 이르고, 벤담도 파놉티콘에서 손을 떼게 된다. "나는 더 이상 파놉티콘에 관한 서류에 눈을 돌리기가 싫다. 그것은 마치 악마가 숨겨놓은 서랍을 여는 것과 같다."

 

  생전에 저술을 정리하여 출판하는 데까지 신경쓰지 못했던 벤담은 영국 정치가이자 가까운 동료였던 John Bowring(1792~1872)에게 자신이 쓴 원고의 편집과 출판을 일임했다. 보우링이 편집한 『The Works of Jeremy Bentham』(Edinburgh: Tait, 1843)은 11권짜리이다. 위 책 148쪽에는 13권짜리라고 써있으나, 의문이다. 위 전집은 http://oll.libertyfund.org/titles/bentham-works-of-jeremy-bentham-11-vols에서 원문 전체를 편리하게 볼 수 있다. 일부는 구글북스에도 전체 공개되어 있다. 그 중 4권에 「파놉티콘 혹은 감시의 집 Panopticon or the Inspection-House」(1787, 단행본 링크는 https://books.google.co.kr/books?id=NM4TAAAAQAAJ&dq=inauthor%3A%22Jeremy%20Bentham%22&pg=PP3#v=onepage&q&f=false. 뒤에 설계, 건축 설비와 기술 등에 관한 대단히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 두 편의 후속편postscript이 실려 있다), 「Panopticon versus New South Wales: or the Panopticon Penitentiary System and the Penal Colonization System, Compared」(1802)가 수록되어 있고, 8권에 파놉티콘의 '학교' 판 확장모델이라 할 수 있는 '크레스토마시아'에 관한 글 「Chrestomathia: Being a collection of papers, explanatory of the design of an institution proposed to be set on foot under the name of the Chrestomathic day school, or Chrestomathic school, for the extension of the new system of instruction to the higher branches of learning, for the use of the middling and higher ranks in life」(1816)가 수록되어 있다.

 

  최근에는 벤담의 저작 다수를 누락한 Bowring 판 전집에 대한 대안으로(보우링의 아마추어적 편집 실력에 대해서는 악평이 무성하다), University College London 'Bentham Project'에 기반하여 J. H. Burns(1961-79), J. R. Dinwiddy(1977-83), F. Rosen(1983-94), F. Rosen and P. Schofield(1995-2003), P. Schofield(2003-)가 편집자로 참여하고 있는 『The Collected Works of Jeremy Bentham』(London: Athlone Press/Oxford: Clarendon Press, 1968-)를 참조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다(설명은 다음 위키피디아 링크도 참조. https://en.wikipedia.org/wiki/The_Collected_Works_of_Jeremy_Bentham). 1968년 1권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34권이 출간되었고, 총 80권 정도를 출간할 계획이라고 한다. 시간 낭비를 혐오하였던 벤담답게, 규모가 엄청나다. 벤담은 20대 후반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7만여 장, 하루 평균 15쪽 분량의 글을 썼다. 이들은 University College London 도서관에 상자 채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애초에 축약본을 번역한 이 책에는, 어떻게 보면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간접적으로 다룬 정도를 넘는 특별한 내용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물론 양자의 초점은 다르다. 벤담이 파놉티콘을 사회개혁의 도구로 삼고자 하였다면, 푸코는 파놉티콘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적 훈육 이면에 깔린 권력 기제를 폭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벤담의 선의(善意)가 너무 자주, 쉽게 폄훼되었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 기독교와 칸트의 이름으로. 한국에서는 여기에 유교주의가 더하여져서. 국내에는 벤담의 방대한 작업 중에서, 위 책과 『도덕과 입법의 원리에 관한 서설』 정도가 번역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벤담의 공리주의(현실주의)와 곧잘 대비되는 칸트의 도덕률이 법제도 설계에까지 전면적으로 적용·응용될 수 있을까. 세상에는 훨씬 더 저열한 도구주의가 판치고 있다. 인간의 본성에 솔직하였던,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무너지기 쉬운) 서로와 인류에 대한 '신의(信義)'보다는, 시스템과 제도, 강렬한 이기심에 터 잡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공공선의 체계를 구축하고자 하였던, 벤담의 개혁에 대한 이상과 열망을, 우리는 편견을 걷어내고 들여다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덧1. 실학자들과 벤담을 비교하여 볼 필요성을 느낀다.

덧2. 책 뒤에 실린 '추가 독서 목록'이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되어 국내도서에 한하여 이 곳에도 소개한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이다. 『살과 돌』은 안타깝게도 절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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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26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열심히 공부한 노력이 돋보이는 글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에 관한 글을 여러 편 본 적 있지만, 벤담에 관한 글은 정말 보기 어렵거든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설 연휴 잘 보내세요.

묵향 2017-01-26 17:48   좋아요 1 | URL
아직 다 읽진 못하였지만, 『도덕과 입법의 원리에 관한 서설』도, 체사레 베카리아 『범죄와 형벌』과 더불어 매우 유익합니다. 단, 한인섭 교수님의 『범죄와 형벌』 번역은 다소간 오역이 있고, 문장도 매끄럽지 않아 읽기가 힘이 듭니다. 정말 위대한 저작인데, 풍부한 해설을 덧붙이고 가독성을 높인 번역본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cyrus님 최근 글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