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윤리학을 '하는' 다른 방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비트겐슈타인과 코베시에게 윤리학에서는 기술(記述, description)이 전부라고 배웠다. 그러나 참된 기술을 이어 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 때문에 찾아올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 거짓을 선택하는 일이 없도록 덕이 몸에 밴 행위자가 필요하다. 더욱이, 그 기술들은 그냥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연결은 '이야기'를 만든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시험하고,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내가 이런 식으로 '윤리학'에 접근하는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결정과 자유를 강조하는 입장이 윤리 이론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 불만스럽기 때문이다. "선택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하는 것"이라는 아이리스 머독의 주장에 영향을 받아, 나는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그보다, 우리가 하는 일을 어떻게 기술하는지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한다. 참으로, 우리가 한 일을 제대로 기술하기 전에는 우리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비로소 나는 덕의 중요성을 회복하려는 나의 시도에 어떤 함의가 있는지 보다 분명히 보게 된 것 같다.
기독교 윤리학을 신학과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된 것도 한몫했다. 기독교 윤리학의 독립성을 주장하고 싶어 하는 많은 이들은 여기서 '분리'가 너무 강한 단어라고 항의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윤리학이 신학과 분리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사랑이나 정의나 그 외 다른 근본적 원리를 도덕적 삶의 근본 원리나 원리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배경 믿음 정도로 여길 뿐, 우리의 도덕적 삶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로는 잘 여기지 않는다.
신학을 좋아하지 않아서 '윤리학자'가 되는 사람이 너무 많지 않을까 염려된다. 나는 늘 기독교 윤리학회의 적극적인 지지자였지만, 그런 학회의 존재 자체가 윤리학에서 신학을 분리하고 싶은 유혹으로 작용할 수 있다. 윤리학계의 일부 동료들이 나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하나님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내세우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것도 그냥 아무 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말하니 말이다. p. 217, 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