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세계사 - 개정판 거꾸로 읽는 책 3
유시민 지음 / 푸른나무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여름, 나를 충격과 공포 속으로 밀어 넣었던 책은 여름을 노리고 본격적으로 쏟아진 스릴러물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해당 책은 '역사'에 관한 책으로, '거꾸로 읽는 세계사'라는 제목이 다소 도발적이기는 해도 이런 '역사' 관련 책이 스릴러물보다 더한 '충격'과 '공포'를 내게 안기리라고는 감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건 사실 공평하지는 않다. 지난 여름은커녕 최근 몇 년간을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내가 스릴러물을 읽은 기억은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스릴러물보다 이 책, 정확하게 말해서 이 책에서 핵과 관련해 인용한 내용 중의 일부가 정녕 두려웠던 건, 거기에는 주인공도 악당도 없이 다만 온통 끔찍한 피해자만 가득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간과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사설이 길었는데, 1945년 8월 6일과 9일, 각각 한 발씩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의 상황을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인용해 놓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전차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B29 두 대가 꽤 높은 상공에서 북동족으로 날아갔다.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다음 순간 번쩍! 맹렬한 빛이었다. 순간 그 자리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 다음은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손발을 움직여 보니 움직여졌다. "아아, 살았구나, 살았다." 일어나 히로시마역 쪽으로 달렸다. 여기저기 길에서 사람들이 나왔는데, 큰길에는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유령처럼 양손을 흔들흔들하는 반라의 여자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도 넘쳐흘렀다. 눈도 귀도 입도 녹아서 얼굴이 수박같이 되었다. 여기저기를 헤메다가 마침내 해안에 도착, 거기서 군인들에게 물을 받아 마시고 멍석 위에 누웠다. 그러자 구토가 나 아침에 먹은 걸을 토하고 잠들었다. ......화상을 입은 얼굴에서는 고름과 피와 땀이 흘렀다. 왼쪽 귀가 녹아내려 구더기가 끓고, 매일 학질 걸린 것처럼 고열이 났다. ......그해말 귀국했는데, 윤곽만 남은 자식의 모습에 부모님은 피를 토하듯 우셨다. (한국인 원폭피해자 협회장 신영수 씨의 증언) (p357~358)

 

물론 일본에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두 번의 폭격이 단순히 '폭격'이라는 무심한 단어 이상의 끔찍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너무나도 유유히 떨어진 단 두 개의 물체가 누군가의 터전을 망가뜨리고,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고, 누군가의 현재와 미래 모두를 짓밟았으리라는 것도 전혀 상상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종종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참혹한 짐작과 상상을 마주하는 대신에 단순한 인과론과 일방의 정의에 의한 단선적 서술을 목격하곤 한다. 위의 사례를 가지고 말하자면,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을 앞세워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유린한 일본의 기도를 분쇄하고 끝내 일본 천황의 입에서 "항복"이라는 말을 내뱉게 한 것이 바로 두 발의 원자폭탄이었다고 말하곤 끝내는 식이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두 발의 폭탄은 독립을 알리는 축포와도 같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단선적인 레일 위의 역사를 탈피한다는 점에서 무척 가치가 있는 책이다. 자본주의는 지구상 유일의 성공한 체제이고, 미국은 우리의 영원한 우방이며,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는 우리의 대척점에 서있다는 등의 일방적인 역사적 시각에 대항하여, 이 책은 외려 '거꾸로' 역사를 바라봄으로써 그 이면을 깊이 들여다보며 되묻는다. 과연 세계를 전쟁의 공포로 밀어 넣었던 나치즘은 단지 한 미치광이 전쟁광의 광기였을 뿐인지, 베트남 전쟁은 그저 한국이 우방국가 미국을 도와 치른 정의로운 전쟁이었을 뿐인지, 말콤X는 다만 백인을 증오하는 극렬분자였을 뿐인지, 핵은 인류의 진보를 표상하는 위대한 발명품일 뿐인지 등.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어쩌면 우리가 꽤 오랫동안 유일한 것이라고 배워왔던 객관식 답안과는 다를 수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역사사용설명서>에서 마거릿 맥밀런이 말했듯, "집단의 입맛에 맞는 억측에 이의를 제기하는 역사는 고통스럽"기 마련이고, 때문에 이 책에서 말하는 역사도 입맛에 맞기보다는 오히려 쓴맛을 남긴다. 나치즘을 한 개인의 탓이 아닌 자본주의의 비민주적 속성에서 끌어내고, "벗을 돕는 것이 목적이 아닌"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의 추한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을 대면하고, 말콤X에게서 사회에 깊이 박힌 편견과 증오의 뿌리를 확인하고, 핵이 지닌 그 피아를 가리지 않는 파멸적 힘의 공포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일은 확실히 즐겁고 유쾌한 일과는 거리가 멀다. 악당과 영웅이 등장하고, 적과 친구가 분명하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단선적 역사에 비해 "이의를 제기하는 역사"는 좀 더 복잡, 난해하며 당혹스럽기도 하다. "저는 노벨처럼 새로운 발견에서 인간성이 악보다도 선을 많이 얻는다고 믿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라는 퀴리의 인간에 대한 믿음도 '거꾸로 읽는' 역사 속에서 위태로워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역사는 현세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쓰여서는 안 되고, 인간사가 복잡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쓰여야 한다."라고 마거릿 맥밀런이 단언하듯이, 이 책이 '거꾸로 읽는' 목적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역사를 지향하는 데에 있다. 그로 인해 이 책이 보여주는 역사 속에서 인류의 선함에 대한 신념과 진보에 대한 장밋빛 전망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신뢰와 우방에 대한 믿음은 왕왕 흔들리기도 하지만, 바로 그러한 '복잡성' 속에서 우리가 역사를 더 잘 이해하게 될 수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컨대, '복잡한 인간사'를 포괄한 '역사' 속에서 우리는 오로지 영웅과 친구와 피해자가 아니고 또한 반대로 오로지 악당과 적과 가해자도 아니며, 다만 우리는 그 사이를 복잡하게 오가며 그 모든 입장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의 시각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는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거꾸로 읽는' 이 책의 시각을 배제하면 우리가 보는 역사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일방적이며, 따라서 거기에서 얻을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역사가 존 아널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과거를 방문하는 것은 타국을 방문하는 것과 같다. 거기서는 똑같이 돌아가기도 하고 다르게 돌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우리는 거기서 이른바 '고국'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만약 역사의 의미가 '고국(현재)'을 더 잘 이해하는 데 있다고 동의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역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선택이 아닌 필수임을 인정한다면, 이 책이 전하는 "지적 반항"은 더 이상 '반항'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가 "역사를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정치권력이 제멋대로 통제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과 토론을 억압하는 풍토가 사라져 아무도 이 책이 전하는 '지적 반항'에 귀기울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내가 진정 바라는 일"이라고 쓴 지 십수 년이 지난 현재에도, 저자의 바람은 아직도 요원하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2011년도 저물어가는 지금, 이 책의 "지적 반항"이 여전히 유효함을 나 역시 진정 슬프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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