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 새벽에 위 제목의 리뷰를 하나 올렸습니다.

요점은 마송의 말버릇인 "그리고 더해서 말하자면"에 대한 것으로서, 역자가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저렇게 어색하게 번역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서 살펴보니 마송의 답답하게 느린 어조와 중언부언하는 말버릇을 독자에게 쉽게 보여주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두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는 jaibal 님의 '몽 페레' 번역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뫼르소 님의 저와 역자가 동일인이 아닌지 의심된다는 글이었습니다.

 

jaibal 님, 저는 그 글에서 "저마다의 독법을 문제 삼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밝힌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른 견해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요. 김화영 번역본을 보니 님이 지적하신 부분 "mon pere"는 "신부님"의 뜻도 있고 "아버지"의 뜻도 있다고 김화영 교수께서 친절하게 주석까지 달아 놓았군요. "그리고 더해서 말하자면"처럼 왜 그랬는지 곰곰 따져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뫼르소 님, 분명히 밝히지만 저는 역자가 결코 아닙니다. 저는 그럴 능력이 전혀 안 되는 사람입니다. <이방인> 번역이 블로그에 연재되던 도중에 우연히 보게 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위 번역의 사례처럼 역자의 꼼꼼함과 성실함에 반하고, 그에 더해서 까뮈의 위대함에 놀랐을 뿐입니다.

 

글에는 글쓴이 고유의 지문이 있다고 하지요. 그르앵은 텍스트에는 텍스트 고유의 무의식이 있다고까지 했습니다. 새움출판사 블로그에는 역자 이정서 씨의 글이 있습니다. 비교해 보시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역자에게 누가 될지 몰라 새벽에 위 제목으로 올린 리뷰 글은 삭제했습니다. 삭제하면서 실수로 일차 리뷰(로쟈 님 반론)의 댓글도 일부 삭제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당사자 분(책과커피 님?)께 사과 드립니다.

 

저는 책을 몇 권 낸 적은 있지만 출판 관계자는 아닙니다. 논리도 없고 예의도 없이, 비판을 위한 비판을 일삼는 일부 꼴사나운 누리꾼들이 있어 댓글 다는 기능도 정지시켰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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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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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거친 반론을 이해하길 바란다.

 

그때, 한밤의 경계선에서 사이렌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이제 영원히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이정서 역, 새움, 2014, 165쪽)

 

문학작품에서 부분은 전체와 긴밀한 관계를 이루며 작품의 미적 구조를 형성한다. 문제의 이 부분에서 로쟈 님(이하 경칭 생략)은 limite를 영문판의 사례를 들어 '새벽'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며 초점을 흐린 다음(초점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밝히겠다), 사이렌(sirene) 또한 '뱃고동 소리'로 번역한 김화영 교수의 편을 들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근거를 다른 번역도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지젝처럼 난해한 책을 알기 쉽게 소개하기로 나름대로 꽤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의 논리치고는 너무나 허술하고 수상하며 객쩍다. 도대체 저게 논리적으로 어떤 정합성을 갖는단 말인가? A일 수도 있고 B일 수도 있는 번역이 있는데, 이미 누군가 B라고 했기 때문에 자신은 B쪽으로 손을 들어주고 싶다니! 더구나 본인 스스로, 번역은 쉽게 "단언할 만큼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그런 번역이라면 구글이 더 잘할 수 있다)."라고 덧붙이기까지 하면서. 여기에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정서의 번역이 원문에 가장 가깝다. 거기에다 부분과 전체의 맥락을 두루 살피고, 문학 고유의 메타포나 상징적 장치까지 고려하면 이정서의 번역이 거의 전적으로 옳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이는 불어 사전을 조금만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불어에서 limite의 사전적 의미는 1. 경계 2. (시간의) 한계, 기한 3. [비유] 한계, 한도, 제한이다.

그리고, sirene은 1. [그리스신화] 세이렌 (반인반어(半人半魚)의 요정으로 뱃사람들을 아름다운 목소리로 홀려 난파시켰다고 함)  2. [비유] 마녀,요부(妖婦)  3. (하반신이 물고기 꼬리를 연상시키는) 기형 동물, 인어체(體) 4. 사이렌이다.

 

limite는 뒤에 나오는 nuit가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질 수 있다. limite의 의미 자질 자체가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소설 전체의 맥락을 살필 필요가 있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이야기인 까닭이다.

 

나는 누워서, 하늘이 황금빛으로 변해 가면서 여름 저녁이 오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이정서 역, 새움, 2014, 156쪽)  

 

뫼르소는 감옥에 누워 저녁이 온 것을 알았고, 오랜만에 마리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제가 들어왔다. 그와 논쟁을 벌이면서 긴 대화를 나누고, 급기야 감정을 폭발시킨다. 그 다음의 상황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가 떠난 후,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침상에 몸을 던졌다. 나는 잠들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얼굴 위의 별과 함께 눈이 떠졌기 때문이다. 전원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떠올라 왔다. 밤과 땅, 그리고 소금 냄새가 내 관자놀이를 식혀 주었다. 잠든 여름의 경이로운 평화가 밀물처럼 내게로 흘러들었다.(이정서 역, 새움, 2014, 165쪽)

 

그리고는 문제의 구절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nuit는 언제쯤을 의미할까? 바로 '밤중'인 것이다. 로쟈가 인용한 영문판의 '새벽'은 결코 아니며(새벽이라면 별은 스러지고 없어야 한다), 문학동네판의 "밤이 시작되려는 바로 그때"는 더더욱 아니다. 별이 초롱초롱하게 뜨고 주위의 소리들이 고요히 잦아든 '한밤중'인 것이다. 그렇다면 limite는 한밤중의 '2.한계'나 '3.제한'의 뜻보다 '1.경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다시 뒤에 나오는 사이렌과 결합되면서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당시는 2차대전이 벌어지고 있던 전시 상황이었으므로 우리가 유신시대에 통금을 알리는 싸이렌이 울렸던 것처럼 자정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을 것이다. 사전에 보다시피 사이렌이 '뱃고동 소리'라는 해석은 없다. 물론 폭넓은 은유는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리스 신화(오딧세우스)의 맥락을 견강부회식으로 전혀 엉뚱하게 갖다붙인, 일종의 '과잉해석'이다.

 

참고로 여기서 '울부짖었다'의 hurler는 1.(개·이리 따위가) 짖다 2.(주어는 사람) 절규하다, 울부짖다, 고함[아우성]을 치다이다. 자정의 고요한 상황에서 갑작스레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그만큼 크게 들렸기 때문에 역자(이정서)는 '울렸다'라는 자연스런 어휘를 버리고 일부러 '울부짖었다'라는 동사를,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선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정작 지금부터이다. 앞서 언급했던 '초점'에 해당된다. 이정서의 번역이 전적으로 옳다고 본 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다. '한밤의 경계선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는 다음날이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하는 바로 그 날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영원히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는 '죽음의 세계'가 된다. 반면에 김화영 번역은 '죽음의 세계'가 아니라 뫼르소와 아무 관계가 없어진 세계, 즉 '바다'를 의미한다. 그래서 사이렌이 '뱃고동 소리'로 번역되면 메타포의 깊이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또한 '죽음의 세계'가 되어야만 바로 다음 문장("아주 오랜만에 다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이 더 깊고 강하게 공명할 수 있다. 사형수가 자기 생의 마지막 몇 시간을 남겨놓고 어머니를 떠올리는 장면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문제의 이 구절이 감옥에 갇힌 사형수가 갖게 되는 분명한 심리적 메타포로 절대 기능할 수 없다. 무슨 수로 그게 가능하겠는가? 불과 몇 줄 안 되지만 까뮈의 언어 연금술이 아주 멋지게 빛나는 대목 아닌가. 좋은 번역자는 그런 걸 찾아내 독자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물론 텍스트의 의미는 완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체 맥락에서 부분이 조정받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며, 그 전체의 범주가 달라지면 문제의 이 구절 또한 새로운 의미를 입고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이 정도의 해석에 따른 이정서의 번역이 가장 타당하다고 믿는다. 

 

이쯤이면 로쟈의 지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이 지적이 새로운 번역을 더 도드라지게 만든 것은 아닌지 생경스럽다. 비판은 신중해야 한다. 로쟈가 좋아하는 지젝의 문장을 보라. 얼마나 기막힌 역설과 시적 진술로 가득차 있는가. 비판을 위한 비판처럼, 전체의 맥락을 깡그리 무시한 채 극히 지엽적인 부분만 가지고, 그것마저도 아무런 근거 없이 달랑 케이스 하나만 가지고, 누군가의 고된 작업을 깎아내리는 짓은 삼가야 한다. 그게 진정 공부하는 사람의 태도인지 진심으로 묻고 싶다. 곡학아세! 지식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짓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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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웃긴책방 2014-04-08 15:1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진지한 관심 고맙습니다. 그리고 출판계에 대한 애정 어린 염려에 저 역시 십분 공감합니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진지한 성찰과 토론이 더욱 생산적인 논의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고 믿기에, 다시 누더기 댓글을 달아봅니다.

문학작품의 매력 중 하나는 다양한 해석 지평 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저마다 다르게 읽을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김화영 교수의 해석, 이정서 씨의 해석, 저의 해석, 님의 해석이 다 다를 수 있고, 나름의 어떤 설득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들뢰즈의 말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이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날카롭습니다. 그건 전제주의와 다름없다고 잘라 말하지요.

저마다의 해석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그 해석이 기반하고 있는 근거들이 타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설득력을 얻어 새로운 해석의 갈래로서 후대의 텍스트에 대한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문화창발성으로 이어짐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렇지 않고 잘못된 이해가 분명한데도 특정 권위에 얹혀서 자신의 오류를 인정치 않는 것은 기존 문화자본의 권위나 위세를 그대로 행세하겠다는 전제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작품에 대한 폭력이지요. 작품 고유의 자율성을 위해서라도 이런 행태는 근절되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견해나 해석은 서로 대립할 수 있습니다. 독점해서는 안 되지요. 하지만 잘못된 해석이 분명한데도 이를 용인하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입니다. 우리 문화 전체를 위해서라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저는 잘못된 해석을 비판하면서 왜 잘못되었는지 가능한 한 명료하게 밝혔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님의 의견은 또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군요. 한번 보겠습니다.

님께서는 '사이렌'이 '뱃고동 소리'는 아니지만, 울리는 시점이 자정은 아니고 새벽녘이라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그 근거로 로쟈 님과 마찬가지로 영역본의 번역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영역본에도 얼마든지 오류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뉴요커에 실린 기사를 혹 보셨는지요? <이방인>은 1946년, 영국에서 처음 영어로 번역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첫 문장조차 제대로 번역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제가 밝혔듯이 nuit가 어느 시점이냐가 중요한데 새벽이 아닌 이유는 "얼굴 위의 별과 함께 눈이 떠졌다."라는 구절 말고도(역자 이정서는 이와 관련해 '유리창'과 '채광창'도 구분해야 한다고 역자노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얼굴 위의 별"은 바로 채광창을 통해 들어오는 별빛을 말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시그널이 또 있습니다. "소금 냄새"에서 알 수 있듯이 뫼르소가 갇힌 감옥의 소재지는 항구도시입니다. 그는 선박회사 직원이기도 하지요. 혹시 항구의 새벽 풍경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아주 시끄럽습니다. 출항하는 배들이며 생선이며 수산물을 떼다 파는 시장사람들로 북적대지요(제 고향이 그런 곳입니다). 그런 항구의 새벽에 시골변두리("전원")의 소리들이 감옥까지 들려올까요? 그런 와중에 "잠든 여름의 경이로운 평화"가 과연 가능할까요?

제가 그랬지요. 문학작품은 부분만 가지고 해석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전체의 맥락 속에서 부분의 의미를 살펴야 한다고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어렵게 꼬아서 해석할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가슴을 열고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토록 어렵게 의미 변전을 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참, 동틀 무렵에 별이 잘 보인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달은 아주 잘 보이지요. 가슴이 시리도록. 하지만 별은 그 반댑니다. 별은 자시(11-1시)가 가장 밝습니다. 동틀 무렵이면 태양의 여명에 가려서 희미해지고 샛별 정도로 큰 별들만 겨우 보일락말락 합니다.

또 사형집행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동틀 무렵에 울릴 까닭이 있을까요?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영문판도 자세히 보면 sirens로 복수로 되어 있군요. 물론 불어판도 복수입니다. 그렇다면 감옥에서 기상 시간에 일제히 사이렌이 울리는 것일까요? 그렇게 보기에는 앞선 문장들의 맥락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데리다가 그랬지요. 꼼꼼한 읽기가 필요하다고. 그래야만 진정한 타자를 만날 수 있다고. 다시 한번 더 꼼꼼하게 읽어보시기를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외롭고웃긴책방 2014-04-08 17:3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제가 그렇게 전체 맥락을 살피자고 말씀드렸는데도 참 고집스럽게도 끝까지 부분만 보시는군요. 그러면 더 이상 논쟁은 이뤄지기 어렵지요.ㅠ

한 가지만 말씀드리지요. "뱃고동 소리" 번역은 얼토당토 안합니다. 뱃고동 소리가 hurle 하게 소리를 내나요? 혹은 blast하게? 요란하게 울부짖듯이? 밤중이든 새벽이든 항구에서 뱃고동 소리 들어보세요. 그렇게 찢어지듯 소리를 내지르는지... 아주 아스라하게 들립니다. 더구나 복수로, 여러 개가 한꺼번에 들릴 수 있을까요? 모르긴 해도 이 따위 엉터리 번역을 하니까 역자도 까뮈의 <이방인>이 아니라고 했을 겁니다.

아,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인문학은 자연과학과 달리 위대한 천재(뉴튼, 아인슈타인 등)에 의해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텍스트 위에 텍스트를 구축해가는 지리한 정신적인 작업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플라톤과 공자가 필요하고 칸트와 프로이트가 필요하지요. 권위적 진술은 자신의 논리를 강화하기 위한 전형적인 논법 중 하나가 아닙니까? 님은 왜 다른 번역을 갖고 오시나요? 게다가 옥스포드 영영 사전 운운이 말이나 됩니까? 지금 우리가 다루는 텍스트가 프랑스어인데...

상대의 예의와 논리에는 그에 응당한 대접이 있어야 자신의 토포스도 비등하게 됩니다. 아쉽습니다.

판사^^ 2014-04-09 09:3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위 문장은 쉬운데...... 그냥 그대로 번역하면

그때, 밤의 경계에서 사이렌들이 (개나 이리가 짖듯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정도?

이정서님의 번역이 원문에 젤 충실한 듯

책방님 승!

그 뒤에도 <신호와 별들로 가득한 그 밤>이라고 또 나오는구만

작품을 너무 어렵게 비틀어서 해석하시려는 경향이 있는 듯 ㅋㅋ




모택동 2014-04-09 15:2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그때, 한밤의 경계선에서 사이렌이 울부짖었다,가 번역이 맞는지 틀렸는지를 봐야지, 굳이 무명의 번역가 운운하며, 여기 책방님을 오독하게 만들었으니 오역이라니, 세상에 그런 논리가 어디 있습니까? 해석은 그냥 개인 자유인거지. 내가 보기에 이정서 씨도 그냥 있는 그대로 번역해둔 거지, 해석을 덧붙인게 아닌데, 굳이 '무명'운운하며 까내릴 필요가 있을까요? 내가 보기에 책방님의 전시상황운운도 조금 '오바'인듯 하고. 물론 저 밑의 로쟈님은 전혀 순수하지 못한 지적인 듯하고. 로어 전문인거로 알고 있는데, 왜 저분이 뜬금없이 불문 소설을 두고 영문 문장까지 가져와 쉴드를 칠 이유가 있었을까? 책방님 지적처럼 전혀 논리적이지도 못한것도 그렇고,평소답지 않음에 조금 난감해졌음.

외롭고웃긴책방 2014-04-09 20:0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더 이상 댓글을 달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여전히 논란이 진행중이므로 하나만 더 적겠습니다.

책과커피 님, 새로운 번역판의 역자노트에 보면 이정서 씨는 님의 견해와 동일하게 "(감옥의) 사이렌이 울부짖었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감옥의 사이렌이 아니라 야간통금을 알리는 사이렌이었을 거라는 추정은 온전히 저의 견해입니다. 오해 없길 바랍니다. 그리고, 필명이든 실명이든 "이정서"라는 이름이 버젓이 있는데 "무명"이라니요? 큰 실례이십니다.

모택동 님, 기본적으로 님 생각에 동의하지만 '오바' 운운하신 부분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감옥살이를 직접 해 보지 않았지만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볼 때 감옥에서 사이렌이 울리는 경우는 탈옥이나 집단 '난동'(이 용어가 죄수들의 인권에 거슬린다면 수정하겠음) 등의 '비상사태'와 기상 시뿐입니다.

당시는 분명 2차대전 중이었고, 프랑스령인 알제리는 독일 점령하에 있었습니다. 연합군이 알제리에 상륙한 때가 1942년 11월이니 1942년에 출판된 <이방인>은 분명 그 전일 것입니다. 당시 독일군은 점령지 치안을 위해 야간통행금지를 실시했습니다. 이를 입증하는 엘뤼아르의 시가 있기에 인용해 둡니다. 시 제목은 <야간통행금지>입니다.


어쩌란 말이냐 성문은 감시당하고 있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리는 갇혀 있는데
어쩌란 말이냐 도시는 정복당했는데
어쩌란 말이냐 도시는 굶주렸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리는 무장해제 당했는데
어쩌란 말이냐 밤은 왔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리는 서로 사랑했었는데.

(P. 엘뤼아르, 오생근 역, <여기에 살기 위하여>, 혜원출판사, 1987, 98쪽)


* "밤의 경계"가 반드시 시각적 이미지인 빛과 어둠의 경계만을 함의할까요? 날짜와 날짜가 바뀌는 시간의 경계도 있지 않을까요?




지나가다 2014-04-09 20:1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방인의 배경은 2차대전 직전의 알제리입니다. 책이 1942년 파리에서 출간된 거구요.

재미있네요 2014-04-10 01:0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새움출판사는 노이즈마케팅을 하기로 결정했나 보네요. 로쟈더러 곡학아세라거나, 지젝을 들먹이며 조롱하는 문장들을 보니 말입니다. 복마전 같은 한국 출판계의 재미있는 한 현상이라고 말하면 될 일이지, 뭐 영영사전까지 찾아서 논쟁할 일은 아닌 게 점점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한국의 끝은 어디인가요? 서울인가요?

지나가다2 2014-04-10 07:2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그런데 새움출판사 대표 이모씨와 이 책의 번역자 이모씨. 두분은 무슨 관계일까요? 갑자기 그게 궁금하네요...

2014-04-10 10:0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Elles annonçaient des départs pour un monde qui maintenant m'était à jamais indifférent.

오히려 이제 나에게 영원히 아무런 관계도 없어진 세계, 가 죽음이라기보다는 그 배들이 떠나가는목적지인 외부세계라고 해석하는게 훨씬 자연스러운데요...

싸이렌이 복수로, depart가 복수로 되어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요. 싸이렌"들"이 울린거고 그 소리가 이제 나에게 영원히 아무런 관계도 없어진 세계 (왜냐하면 나는 죽었을 것이므로, 즉 외부세계) 로의 출발"들"을 알리는 거잖아요. 여러 척의 배들이 어딘가로 떠나가는 거지요. 그 어딘가는 나는 이제 사형당할 것이므로 앞으로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세계인 거고요.

그 바로 앞 부분의 I was assailed by memories of a life that wasn't mine anymore, but one in which I'd found the simplest and most lasting joys를 보면 더욱 확실해요.
여름냄새, 저녁 하늘, 마리의 원피스, 그녀가 웃는 모습...등이 이 외부세계, 죽음과 반대되는 생의 표상들인 거고요. 거기서 a life that wasn't mine anymore가 a world toward which i would remain forever indifferent와 같은 외부세계예요.

나와 앞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을 세계를 죽음이라고 해석하는건 뫼르소가 곧 죽을 것이고 앞으로 죽음의 세계에 있는 것인 점을 감안하면, 나는 곧 죽음의 세계로 떠나가게 되겠지만 나는 그 죽음의 세계에 대해 영원히 무감할 것이다. 즉 갑자기 뫼르소가 나 죽으면 알게 뭐냐 분자 형태로 돌아가는거지 같은 무신론자가 되는 해석이 되지요.

저는 고전의 재번역에 대해서는 백만번 찬성하고 응원하는 입장이지만,
이번 새움 번역은 여러가지로 아쉬운 점이 많이 남습니다.
번역이라는 건, 특히 문학번역은 그렇게 단순하고 딱 떨어지는 수학공식같은 명료함이 있는 과정/작업/결과물이 아니어서 출판/학술/독서 커뮤니티 내에서 여러가지로 논해볼 여지는 늘 있는거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건 명백히 틀렸다 (심지어 이정서씨는 "엉터리다"라고;;) 내 해석이 맞다라고 하기가 어려울 때가 훨씬 많은거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번역 작업이 high art인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을 간과하고 펼치는 노이즈마케팅을 보고 있자니 저는 윗분처럼 재미있다는 생각보다는 마음이 아프네요...

꼴불견 2014-04-10 11:5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2차대전 직전은 아닌데요? 브리태니커 사전에는 1939-1945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1941년입니다. 좀더 찿아보니 알제리에서 독일군과 연합군이 본격적인 전투를 치른 건 1943년이라고 하는군요. 그렇다면 그전에는 독일군 점령이 맞는데요?

새움출판사 2014-04-10 12:4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에 대해 이정서님께서 글을 보내오셨습니다.
참고가 되실 겁니다.

http://saeumbook.tistory.com/429

jaibal 2014-04-10 12:52   좋아요 0 | URL

한밤의 경계선..이란 말은 한국어로 도무지 뜻을 모르겠군요...

국어에서 그런 표현이 가능합니까?

국어로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국어로는, 밤과 새벽의 경계선이라든가, 밤의 끝이라든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죠.

독서꽝 2014-04-10 13:3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jaibal/ㅎㅎ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말씀을 하시는지...
문학작품이니까 당근 그렇지요ㅎㅎㅎ
까뮈 특유의 문체이기도 하고요.

jaibal 2014-04-10 13:59   좋아요 0 | URL
까뮈 특유의 문제라고요?

그건 그냥 불어에서 쓰이는 표현일 뿐입니다.

"la limite de"로 구글검색이라도 한 번 해보세요...

1 억개 이상이 검색됩니다.

그리고 국어에서, 한밤의 경계선.이라는 표현이 가능합니까?

2014-04-10 14:4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놀라운 것은, 오래간만에 처음으로라는 (물론 유럽어->한국어 번역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없었을 표현일지 모르나) 충분히 현대 한국어에서 통용되는 표현은 굳이굳이 문제를 삼아
전혀 뉘앙스가 다른 오래간만에 다시, 엄마를 생각했다라고 (이건 "처음"의 뉘앙스를 죽이는 번역이예요. 마치 평소에 엄마 생각 자주하다가 재판 등등으로 바빠서 생각 못하고 있다가 이제 시간이 나서 다시 생각하는 재탕 느낌남. 엄마 생각을 평소에 하다가 휴지기가 있고 다시 생각하는 뉘앙스) 번역하면서

한밤의 경계선 같은 표현은 별 문제를 못 느끼고 쓴다는 거예요. nuit가 한밤중인 것도 너무나 자의적이고 끼어다 맞춘 얘기고요.

위의 새움출판사 링크는 이 부분이랑은 큰 상관이 없는 얘기들이네요. 왜 논의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얼버무리고 또다른 구절들을 가져오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저는 거기서는 charges가 기소인 건 맞다고 생각하고요. 다만 "사실은 그런 떄에도 그들은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정서역)"은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번역이라고 생각이 되네요. 이 한국어 문장만 보면 판사와 변호사가 굉장히 시큰둥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선관주의 의무 위반? ㅋㅋ) 대충대충 한다는 문장이거든요. "뫼르소한테 신경을 쓰지/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해야 정확한 의미가 전달되지요.

우리말기본 2014-04-10 18:2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오래간만에 처음으로"는 명백히 비문입니다. "3년 만에 처음으로" 혹은 "수십년 만에 처음으로"처럼 앞에 일정한 기간이 주어지면 맞는 어법이지만 "오래간만에 처음으로"는 틀린 어법입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김예령 역자 역시 "밤의 경계선"이라고 그대로 옮겼네요. 이게 맞지요. 번역자가 왜 해석을 해서 까뮈 본래의 글을 망쳐 놓습니까? 그렇게 해버리면 문학작품의 생명을 죽이게 됩니다.

물론 옮기기 어려운 단어, 가령 "파르라니" "나빌레라" "시퍼러둥둥" 같은 우리말 표현을 외국어로 옮기자면 그만의 해석이 필요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대로 옮겨야 문학 고유의 생명력이 작품에 그대로 살아있게 되지요.

와우~~~ 2014-04-10 20:5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정서 역자님. 님께서는 지금 김화영교수 따위를 상대하실 계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님은 지금 세계 최초의 주장을, <이방인>에 대한, 세계 최초의 주장을 하고 계신 겁니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도 있어본 적 없는 카뮈에 대한 탁월한 해석!! 대단하십니다. 존경합니다~~~ 이정서님의 탁월한 주장은 우리끼리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하루 빨리 영역하고 불역도 하고 해서 대한민국의 힘을 보여줍시다!!!

2014-04-10 23:3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우리말기본 님/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외국어ㅡ한국어 간 번역을 안해보았거나 외국어로 글을 읽을 기회가 적었던 사람들은 통상 "번역이란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닌가"라고 순진무구하게 되묻기도 하지만 각 언어의 체계, 그리고 문화권에 따라 달리 사용되는 표현과 뉘앙스라는게 있기 때문에 word to word로 그대로 번역해 놓으면 당연히 바보번역이 되는 거지요. 그런 글은 서로 다른 문화권/언어권 독자들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좋은 예로 한밤의 경계선을 들수 있겠고요. 번역가는 출발언어와 문화에 능통하여 최소한 이 표현은 관용적 표현이다 이 표현은 시적 표현이다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부분마저 헛갈리고 있으면 제아무리 꼼꼼히 시간을 들여도 나름대로 논리적인 오독을 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