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현대사. 시작으로는 세도정치를 종료시킨 흥선대원군, 외세들이 벌이는 각축전의 틈바구니에서 약소국으로 우리나라가 겪었던 슬픔은 책장을 넘기는 손을 무겁게 한다. 한 나라 국모의 신상에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사건, 명성황후 시해나, 임금이 궁을 버리고 한 나라 공사관으로 몸을 피해야 했던 아관파천 등. 지금은 끝났기에 돌아볼 수 있지만,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을 일제강점기에 광복까지. <마지막 황태자>는 조선으로부터 일제강점기 사이에 존재하는 '대한제국'을, 정확히는 그 나라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이 은을 주인공으로 삼은 세 권의 역사소설이다.
당시 일본 지도자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이웃 나라의 국모를 죽여 버리는 것을 할 만한 일로, 또 해야 할 일로 간주했다. 그 정신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자연인이든 국가이든 간에 마찬가지다. 실제 할 수 있는 일과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 자체를 잃는 것이고, 그것은 곧 모든 것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 상태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일본의 지도자들은 이미 그런 상태에 떨어져 있었고, 그런 자들의 주도로 일본이라는 나라는 그 추하게 일그러진 해외 침략의 길에 뛰어들어 참혹한 패망의 날까지 계속 그 길을 치달렸다. - 1권/p.112
1권 <못생긴 엄상궁의 천하>는 명성황후 사후 재입궁한 엄 상궁이 아관파천을 주도하며 아들을 낳고, 대한제국이 건국되어 그녀 자신이 황귀비라는 위치에 올라 영친왕비를 간택하는 때까지를 그리고 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는 가운데 명성황후 못지않은 엄귀비의 정치적 궤적을 보면 엄귀비 역시 황후에까지 못 올랐을 뿐(숙종대 장희빈 이후 후궁이 중전이 되지 못하도록 되어있었으므로) 새 왕후의 입궁을 막고 그에 준하는 위치까지 오른데다 그에 걸맞는 활약을 했으니, 그럴 만한 여성이라고 느껴진다.
인질……. 인질이 대체 무엇인가. 어떤 존재인가. 누군가 인질이 되는 순간, 그는 곧 인간인 동시에 이미 인간임을 벗어난 어떤 특수한 존재가 된다. "나의 생명과 존재와 가치에 대한 처분권이 너희들의 손에 있음을 인정하겠다"는 약자의 비명과 슬픔이 사람의 형체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곧 인질이다. 이쪽과 저쪽이 지닌 권력 관계의 강약을 보여 주는 하나의 살아 있는 상징이요 기호가 되는 것이다. - 2권/p.173
2권 <황태자의 동경 인질살이>는 1권 이후, 해아밀사사건[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하며, 영친왕이 황태자가 되어 동경으로 끌려가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될 때까지를 담고 있다. 1권에서 엄귀비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면, 2권에서는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꼽을 수 있겠다. 일설에 이토 히로부미가 죽어 한일병합이 앞당겨졌다고 했는데 그것이 터무니없는 거짓이며, 이토 히로부미가 어떤 인물인지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인질살이'중 우리나라 황태자를 회유하기 위해 일본 명치천황과 이등박문이 어떤 '독 묻은 사랑'을 주었는지, 어린 소년 이은이 어떻게 넘어가 세뇌된 채 평생을 살아가게 되었는가... 그리고 한일병합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제일 인상깊었던 것은, 실제로 내가 어렴풋하게 '이토 히로부미가 죽어서 한일병합이 앞당겨졌다, 그는 (근본적으로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는 방향은 아니었겠지만 방법론적으로) 한일병합 반대파였다'라는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면서 그게 절대 아니라는 걸 안 것이다. 사실 작중에서도 말하듯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말로는 전혀 한국을 침략할 뜻이 없다고 하면서, 그럴 생각은 전혀 없이 감언이설로 한국인을 속인 것이 그의 실체였기 때문이다(2권/p.312) 새삼 "자국을 위해서라면 이웃 나라의 국모를 죽여 버리는 것을 할 만한 일로, 해야 할 일로 간주한" 당시 일본 지도자들이 어떤 인간들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막내아들 부부가 신혼여행을 겸해 파리강화회의에 가서 일본 정부가 구사하는 정략의 도구가 되어 태황제 자신이 지금 혼신의 힘을 다해 추진하고 있는 생애 최후의 대계획을 망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일뿐이었다. 태황제의 죽음은 당시 절체절명의 곤경에 빠진 자로서의 스트레스와 고통을 견디지 못한 데서 온 비극이었다. - p.323
3권은 <왕세자 혼혈결혼의 비밀>. 2권의 '황태자'에 비해 한 격 내려선 '왕세자'라는 호칭처럼, 3권은 2권 못지않게 먹먹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2권에서 어머니와 억지로 떼어져 인질로 끌려온 황태자가 얼마나 다부졌나. 3권에서 왕세자가 된 이은은 학습원[일본의 귀족학교]에 입학해 연상의 학우들과 공부하며 우등생을 차지하나,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본인들에 의해 육군중앙유년학교로 보내져 체격적으로 뒤져서 열등생이 될 수밖에 없는 군사교육을 받게 된다. 물론 이후로 우등생은 되지 못했다.
한편 나라가 멸망한데다 귀한 아들이 물 건너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주먹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본 엄귀비는 충격으로 쓰러져 절명한다. 이어 순종은 억지로 끌려와 천기봉사[직접 일본에 와 일본황제에게 문안드림]를 하는 굴욕을 당하고, 이은은 조선에서 기다리고 있는 약혼녀 민갑완이 아니라 일본 황족 여자 이본궁 방자 여왕[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왕녀]과 약혼한 것을 신문에서 보는 처지가 된다.
3권에서 등장한 새로운 인물, 혼혈결혼의 당사자 이방자는 자신을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느꼈다고 작중에 인용된 여러 서적들에서 말한다. 하지만 작중에서는 사실 그 어머니 이도자비[나시모토노미야 이쓰코 비] 및 이본궁 측이 자청해 방자를 이은과 결혼시키려 했다고 하며 근거를 제시한다(3권/p.142). '나라를 위한 희생'이라던가 가장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였는데 미미한 정치적 기반과 불임의 가능성 때문에~ 같은 것은 시기적으로 봐도, "방자는 황태자와 나이가 같았기 때문에, 나는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다-<삼대의 천황과 나> p.114"라는 이도자비의 말(3권/p.127)을 봐도 완전히 잘못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렇게 흔히 갖고 있던 선입관을 제외한 이방자는 (일본측이 인물상까지 따져 결혼을 결정했는지는 모를 노릇이지만) 곱고 명랑하며 사치를 즐기는 "와신상담의 고난을 잊지 말아야 할 처지였던 망국의 황태자 이은에게는 최악의 조합에 해당하는 배필"이었다(3권/p.297)
고종은 보통 독살되었다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고종 독살설을 정면으로 부정한다.어떻게든 아들의 결혼을 막고, 만국강화회의의 기회를 노리려다, 신문을 통해 펼쳐지는 끊임없는 일본의 압박과 아들을 통해 펼쳐지려는 일본의 술수로 인해 원통하게 승하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종의 인산일을 이틀 앞둔 1919년 3월 1일, 저 유명한 삼일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역사소설은 그저 역사의 일설을 채용해 진짜인 양 '소설'로 꾸며내는 재미로 읽는 종류도 있지만, 이 세 권의 책은 '역사'로서 읽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을미사변 이후 엄상궁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부터 영친왕의 결혼을 앞두고 고종이 승하하며 벌어진 삼일독립만세운동까지, 역사적으로 큰 획을 그은 사건들뿐만 아니라 "조선왕실을 연관지어 당시의 상황을 좀 더 바르게" 알고 싶다면 주저없이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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