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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이 된 왕 이은의 천하 ㅣ 마지막 황태자 4
송우혜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4월
평점 :
마지막 황태자 마지막 권을 읽었다. 3권이 1919년, 고종의 사망으로 끝났었는데 4권은 그 이후―이은의 약혼시절과 결혼부터 시작하여 8.15에 다달라 이윽고 현대에 이르기까지를 그리고 있다. 시대가 흐른 만큼 1권에서 막 태어났던 소년은 결혼을 하여 아이까지 낳았으며, 역사의 전면에 서 있는 것은 이은과 동년대의 조선 왕가 사람들, 고종의 딸 덕혜옹주와 의친왕 이강의 장남 이건·차남 이우(운현궁 흥왕 이희의 장남 이준의 양자로 입적) 등이 되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이은은 무사히 이방자와 결혼했고 그 아들 이진이 1921년 8월 18일 태어났다. 태어난 날 오후 조서가 내려져 황족으로 대우받으며 7일 만에 명명되는 등 일본이 이 아이에게 거는 기대를 알만하다. 그러나 한쪽에서 빛이 강한 만큼, 다른 쪽의 그림자도 짙었나 보다. 1922년 4월 근현식을 위해 세 가족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비극이 일어났다. 일본의 피가 섞인 왕자라 하여 아편을 탄 우유로 독살된 것이다(당시의 공식 사인은 소화불량이었다). 아이는 5월 11일 생후 8개월 만에 사망하였고, 5월 17일 장례가 치러졌다.
이진 사후 거듭 유산했던 이방자는 1931년 12월 29일 이구 왕세자를 낳았다. 이구가 14세이던 1945년 8월 일본제국이 멸망했고, 그 이후 미국으로 유학해 MIT를 졸업하고 줄리아 뮤록과 결혼했다.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5일 덕수궁에서 출생했다. 엄귀비가 별세한 지 꼭 10개월 만으로, 복령당 양씨 소생이다. 1914년과 15년에도 광화당 이씨가 이육, 보현당 정씨가 이우, 내안당 이씨가 옹주를 낳았으나 죽었다. - p.110
덕혜옹주는 만 네 살 때부터 덕수궁에 설립한 유치원에서 일본인 교사에게서 배웠고, 늘 일본인 가정교사가 있었으며, 소학교 2학년부터는 일본인 아이들이 다니는 일출소학교에 다니면서 일본인 교사에게서 일본어로 배웠다. 게다가 머리까지 좋았기 떄문에 덕혜옹주는 일본 유학 이전부터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잘했다. - p.173
이번 권에서 제일 기억에 남은 것은 덕혜옹주 이야기였다. 소설 등으로 지금까지 접해왔던 덕혜옹주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사실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일 정서에 감싸여 자라난 덕혜옹주는 일출소학교 시절 '일본어 동시 작가'로 명성이 높았고, 그녀의 동시에 일본인 작곡가들이 곡을 붙인 동요들은 일본 아이들에게까지 널리 불렸다고 한다. 일본유학 후에도 학업성적이 좋아 매스컴에서는 "화가와 동화에 천재가 계시며"라고 할 정도이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비운의 옹주'와는 퍽 떨어진 이미지다.
그런데 그녀에게 찾아든 비극은 대체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 책에서는 신문 등을 통한 당시의 정세와 증언의 행간을 읽어 '산계궁 등마왕(山階宮 藤麿王)과의 혼약설과 파혼'이라는 해석을 제시한다. 산계궁 등마왕은 1926년 만 14세가 된 덕혜옹주를 두고 궁내성이 혼사 문제를 다루기 시작할 당시 혼담 상대자로 거론되었고(p.181) 실제로 1927년 7월 조선에 건너와 창덕궁 윤비를 방문하고 조선 각지를 방문하는 등 행사를 치렀으나, 1928년 3월 신적 강하를 신청해 황족의 지위를 버리고 화족이 되면서 축파 등마(筑波 藤麿) 후작이 되었다(명치유신으로부터 60여년간, 황족이 신적강하로 화족이 된 사례는 겨우 5명이었다). 이로써 '덕혜옹주와 일본 황족과의 혼담'이 깨어지고, 1929년 늦가을 '조선 귀족과의 결혼설'이 보도되었다.
기정사실화되어 있던 황족과의 혼담이 깨지면 여성인 당사자로서는 심리적으로 매우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p.195). 실제로 방자의 여동생 이본궁 규자 여왕은 본인이 황족 여성인데도 황족 남성과 파혼하게 되자 부모도 없고 가난한 청년인 광교진광 백작과 서둘러 결혼한 바 있다. 덕혜옹주는 반일 정서에 노출된 적이 전혀 없었던 데다 조선 왕가의 유일한 옹주로서 떠받들리며 자라나 '일본 황족과의 결혼'을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결혼으로 받아들였는데도 일방적으로 파혼당한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으니, "학교 친구들로부터 들은 말을 감정적으로 강하게 받아들여 끙끙거리며 언제까지나 신경을 쓰거나 하며" 신경쇠약이 시작된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덕혜옹주가 학습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거나, "나도 대한제국의 황녀" 운운했다는 보편적인 상식은 개연성이 없다는 지적도 내친왕들과 얼굴을 마주칠 기회가 실제로 없었다거나 하는 근거가 확실하다. 혼담이 깨어지고 일본 황족, 조선 귀족, 일본 화족으로 상대가 자꾸 바뀌어 대마도 번주 가문의 종무지 백작과 결혼하기까지, 어디까지나 이해관계와 정략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덕혜옹주의 기구한 삶은 안타까우나 그녀가 이은이 그러했듯 어디까지나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친일로 물들어 있었음이 명확하기에 씁쓸하다.
이방자의 외사촌동생 송평가자와 결혼하였고 조선 공족으로 태어났으면서도 민족의식 같은 건 전혀 없이 완전한 일본인으로 살아간 이건과 달리 동생 이우는 아홉 살에 일본에 유학했으나 뚜렷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다. 혼혈 정략결혼을 거부하고 박영효 후작의 손녀인 박찬주와 결혼했는데, 한일합방 이후 조선 왕공족 중 최초이자 최후의 동족결혼이다. 형제이면서도 완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 이 둘은 인생의 끝에 이르러서도 정반대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건이 왕공족 폐지로 평민이 된 즉시 일본으로 귀화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개명하여 산 반면, 이우는 33세의 나이로 해방을 목전에 둔 8월 6일 광도(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희생된 것이다. 왕정복고는 이미 시대에서 먼 이야기이지만, 만약 이우가 살아 있었다면― 최소한 우리에게 남은 조선왕조의 마지막에 대한 기억이 좀 바뀌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움이 남는다. 해방 이후 어리석은 처신을 보여온 조선왕가는 마지막 후예, 이구가 줄리아와 이혼하고 후손을 남기지 않은 채 떠남으로써 "한 왕조가 그 문을 닫고 초라한 그늘과 못난 그림자까지 완전히 거두었다(p.396)."
"실제의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정도正道의 서술으로 / '우리의 진정한 역사'를 알리며 / 상상으로 꾸며진 역사소설보다 진짜 역사소설이 훨씬 재미있다" 는 작가의 의도를 이 책을 덮으면서 생생하게 느꼈다. 시대만을 빌려온 소설, 작가의 상상력을 담은 소설, 역사소설이면서도 실제 역사와 관계 없는 종류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역시 "어떤 역사적 인물과 그의 시대가 실제로 지녔던 함축과 격동의 폭과 의의는 대부분 인간의 보편적 상상을 크게 뛰어넘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에 동의하게 된다.
/130309~130310
"내 지위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무쪼록 지금까지와 마찬가지의 대우를 해줄 수 없습니까?" 라고 말한 것이다. (……)
그는 자신의 뿌리를 잃은 것이다. 뿌리 없는 자는 나약하고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뿌리 깊은 데서부터 치고 올라가서 줄기와 가지를 뻗고 잎과 꽃을 피우는 생명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뿌리 없는 나무와 같았던 이은에게는 조국이 독립했다는 사실과 그 조국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이나 기여를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나 각오가 없었다. 그저 이전과 같이 일본에 살면서 융숭한 대우와 풍요로운 생활을 보장받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한 사람의 가엾은 퇴역 장군에 불과했다. - p.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