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데이즈>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
-
파인 데이즈
혼다 다카요시 지음, 이기웅 옮김 / 예담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깊이나 큰 울림은 없지만 찌릿한 전율과 작은 탄성을 내뱉게 만든 단편들이다. 네 편의 단편은 대칭구조(대위법식 전개)를 공통 특성으로 신비에 싸인 주인공('Yesterdays'는 예외)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작품별 서평을 하기 전에 네 편을 관통하고 있는 대칭구조에 대해 말하고 싶다. 예전에 읽었거나 근래에 읽은 작품 중 이런 대칭구조를 가진 작품은 잘 없었다. 대칭구조를 사용하지 않는 한 가지 이유는 대칭구조형식의 소설을 가볍게 썼다가는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는 위험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여간해서 능력이 뛰어난 작가가 아니라면 대칭구조를 고급스럽게 구사할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대칭구조형식을 기피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혼다 다카요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칭구조형식을 모든 작품에 적용시키고 있다. 단순한 평행 대칭구조가 아닌 높낮이나 경중의 차이를 적당히 이용한 비평행 대칭구조를 구사하고 있다. 『파인 데이즈』에서는 '그 애'와 '야스이'가 각각의 세계에서 갖는 의의를 대척점으로 등가 표시되며(물론 작품의 말미에 이르면 균형이 깨어지면서 '야스이'가 지배인물이 된다), 『예스터데이』에서는 암투병중인 아버지와 그의 36년 전 애인인 마야의 관계가 주인공 막내아들인 '나'와 '여자'와의 관계와 서로 오브랩되며 『잠들기 위한 따사로운 장소』에서는 누나인 유코 대 유키의 관계가 주인공 '나' 대 동생의 관계로 등치된다. 마지막 작품인 『셰이드』에서는 골통품 가게 노인이 들려주는 유리램프 셰이드에 얽힌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유리공과 유랑패 여성의 관계가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주인공 '나'와 '나'의 여자친구의 관계와 서로 복사판인양 똑같이 전개된다. 이 모든 단편들이 각자의 색깔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액자소설에 가까운 이중틀과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혼다 다카요시의 다른 작품은 어떨까'라는 의문이 생기게 만드는 특별한 소설들이었다.
『파인 데이즈』를 읽기 시작했을 때, 등장인물들이 내뿜는 흡입력에 정신없이 빨려들어갔다. '그애와 '야스이' '간베' 등 모두 다 재미있는 인물이었으며, 특히 '그애'의 무서운 저주는 마치 만화적이다라고 느끼면서도 충분히 개연성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동시에 갖게 만들었다. '야스이'의 저주로 선생이 자살하고 상급생이 오토바이를 타다 사고가 나며 옥상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는 등 다소 미스테리 소설에 가까운 면도 지니고 있었다. 공교육 현장이 붕괴된 학교와 여기를 다니는 선생과 학생을 보는 것 같아 많이 안타깝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막내아들인 주인공에게 옛애인과 당시 임신 중이었던 주인공의 '누나'(아버지는 임신한 자녀의 성별을 작품 후반구까지도 모른다)를 수소문해서 찾아주길 바란다. 결국 주인공은 아버지의 옛 애인 '마야'씨와 그의 딸을 찾아낸다. 간절히 한 번 보기를 바라는 주인공의 아버지의 맘과 달리 마야씨는 조용한 인생에 파문이 생기길 원치 않는다. 마침내 자초지종을 암투병중인 자신의 아버지에게 말하자 그는 만약 첫사랑과 결혼을 했더라면 ' 너무 과분한 인생'이 전개됐을 거라고 말하면서 웃는다. 소란하거나 번잡하지 않은 깔끔한 전개가 인상적이었던 작품이었다.
『잠들기 위한 따사로운 장소』는 그림으로 예지력을 표현하는 누나 유끼와 그 그림을 해독하는 남동생 유코의 특별한 주종관계가 자동차 사고현장에서 동생을 제치고 지나가던 승용차 운전자가 내민 구조의 손에 자신은 구조되고 동생은 차와 더불어 폭발되는 사건을 겪은 주인공 '나'의 죄책감과 서로 병립하면서 화해의 접점 혹은 운명에의 도전을 (가능하지 않지만) 시도하는 단편이다. 누나의 질투심으로 다친 유끼를 병문안하는 주인공 '나'는 유끼가 누나가 보기 전에 (누나가 또다시 질투심이 발동하면 '나'가 다칠 것이고 자신은 죽을 수 있기에) 가라고 하지만 되려 '애인이에요'(261p.)라고 유코에게 말하면서 '눈을 빤히 뜬 채 유키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261p.)개는 장면은 사랑의 힘이 마법적인 저주의 힘보다 강하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마지막 단편 『셰이드』는 마치 한 편의 중세 항해 이야기와 흡사하였다. 사랑을 얻기 위해 유리 램프 셰이드를 만들어 사랑하는 그녀(유랑단원)가 '어둠에 녹지 않기를 기도하'(269p.)는 최고의 유리장인의 애절한 사랑이야기임과 동시에 '나'와 '그녀'의 사랑이야기이다. 재미있었던 부분은 유랑단원 '그녀'와 '나'의 연인 '그녀'는 둘 다 아픈 과거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옛날에 사랑하던 사람이 육지에서 '그녀'와 함께 살다가 죽고 난 후 그 남자의 사자는 그녀를 죽음으로 데려가려고 하기에 더는 육지에서 생활하지 못하는 '그녀'를 어머니의 간곡한 소원으로 인해 바다로 가지 못하는 반대상황에 처해 있는 유리장인인 '나'가 육지에서 그녀와 함께 살기 위해 죽음인 어둠을 영원히 물리치는 도구로 온갖 정성으로 만든 유리램프를 소재로 하는 다소 신파적 내용이지만 나름대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는 인상을 받게 되어 퍽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