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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 문학동네시인선 100 기념 티저 시집 문학동네 시인선 100
황유원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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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이었다. 딸 아이는 내 손을 잡고 졸망졸망 걸어가는 것인데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손가락을 들어 밤 하늘을 가리킨다. 저것 보라고 했다. 밝은 가로등이 하나 서 있고 가로등 옆에는 소나무인지 향나무인지 동백나무인지 모를 사철나무 하나가 나란히 서 있었다. 아이는 저것을 보라고 했다. 저것의 색깔이 변했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처음에는 가로등 불빛이 밝은 것을 보고 놀랐다고 생각했지만 손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겨 보니 사철나무의 끝이 갈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니까 사철나무라고 생각했던 것은 계절이 바뀌며 색이 변하는 것이니 사실 사철나무는 아니었던 거다. 녹색이 미묘하게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아이의 눈이 참으로 매섭고 신기했다.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와 걸었던 길을 오늘은 나 혼자 걸었다. 회사에서 늦은 날이었다. 집에 거의 도착한 순간 걸음을 멈추고 어제의 나무를 올려 보았다. 여전히 갈색이었다. 나는 아이를 생각했다.
 
아이에 대해 생각했다고 했다. 아이는 태어난 지 두 해 반을 지나 걷고, 뛰고, 말하고, 웃고, 울고, 사랑스럽게 다가와 안기고, 또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자기만의 시간을 보낸다. 아이가 말을 한다고 했다. 아이는 두 돌이 지나면서 폭발적으로 단어를 배우고 습득한 것을 정확하게 발음하기 시작했다. 가끔 아이가 자기 자신에게 나에게 아내에게 하는 말을 듣다 보면 가슴 한 켠이 섬뜩해질 때가 있다. 이 아이가 언제 이런 단어를 배웠는가. 이 아이가 언제 이런 표현에 눈떴는가. 이 아이가 어쩌면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표현 방식으로 이토록 세상을 아름답게 묘사해내는가, 그런 것에 섬뜩해질 때가 있다. 속으로 생각한다. 이 아이의 지금 이 말들을 기억하겠다고. 그리고 돌아서서 깨닫는다. 순간의 섬뜩한 기쁨은 언제나 돌아서면 까맣게 잊혀지는 법이라고. 그래서 아이의 말이 정확하게 기억되는 것은 거의 없다. 남는 것은 그 순간 품었던 경이로운 감정뿐이다. 말은 사라지고 아름다움이 남았다.
 
여행을 가기로 했다. 아이와 여행을 가려니 챙길 것이 많아 자연스럽게 가지고 가지 못할 것들도 많아진다. 책을 놓고 가기로 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세 번째를 읽던 참이었다. 가방은 가득 찼고 책은 무거웠고, 머리도 가득 찼고 무거웠다.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 여행을 하며 느끼는 순간의 것들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여행을 하며 느끼는 순간의 것들은 사진으로 담아내기도 하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차 휘발되어 집에 돌아오면 까맣게 잊혀지는 것이 더 많았다. 그래서 여행의 경험이 정확하게 기억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그런 것들이 좋았다는 주관적인 감정 몇 개만이 떠오른다. 언제 어디에 여행을 다녀왔는지 정도를 기억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여행은 아이의 말과 같다. 돌아서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설레고, 경이롭고 삶이 온전하게 구슬려지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너는 아름답다. 나는 너의 아름다움을 기록하지 않되 최대한 기억하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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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393
유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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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 듣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아주 오래 전.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아 작은 오디오 전원을 켜면 라디오가 흘러나왔는데 아주 어릴 적에는 그게 무슨 채널인지, 채널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방송이 무엇인지, 방송을 진행하는 DJ는 누구인지 궁금하지도 않은 채 그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라디오 DJ와 방송 프로그램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 중학교 진학을 앞둔 무렵. 11년 동안이나 별밤지기를 맡았기 때문에 지금도 별밤지기라고 한다면 나와 내 위의 세대는 이문세를 떠올리겠지만, 내가 라디오 너머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주파수를 더듬던 시절에는 이휘재가 MBC 표준FM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전창걸과 함께 ‘영화공작소’ 라는 코너를 진행한 적이 있다. <쉬리>, <타이타닉> … 영화 주요 장면을 재미있게 소개하는데 지금까지도 그 대사를 외우는 걸 보면 아마 그 무렵을 기점으로 라디오가 본격적으로 나의 생활을 장악하기 시작했던 듯 싶다.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듣다 보니 시간대 별 프로그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이 사람의 감정에 내려 앉는 결은 시간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저녁의 라디오는 깊은 호수와 같았다. 조용한 밤 DJ의 목소리가 고요하게 들리는 가운데 타인의 사연 속으로 깊게 빠져들었다. 낮의 라디오는 시장이었다. 겉잡을 수 없는 흥겨움 속에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타인의 사연은 깊게 파고들 것이 아니라 얇게 이해되고 소비되는 재료였다. 그러나 누군가의 감정과 사연에 동화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때로 감사하기도 했다. 이제 아침의 라디오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들었던 아침의 라디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아침이라며 억지로 생글거리는 활기를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하루를 출발한다는, 시작한다는 적당한 템포와 세기를 전해 주었다. 가끔 누군가의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으나 DJ의 목소리는 건조한 편이었다. 아침의 라디오는 분명 가까이 살고 있으나 좀처럼 살갑게 인사한 적 없는 옆 집 이웃과 같았다.

그러므로 유희경의 첫 번째 시집 <오늘 아침 단어>를 읽을 때 나는 생각한다. 이 시인은 아침이면 분명 방송국 어디선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을 거라고. 그의 목소리는 비교적 나지막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의 라디오 채널은 그의 목소리처럼 담담하면서도 너무 가깝게 다가서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적당한 깊이의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앉아 가만히 앉아있을 것이라고. 다가서지도 물러서지도 않는 알맞은 거리감이 나와 유희경 시인 사이에, 시인과 세상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여있을 것이라고. 나는 유희경의 시집을 읽으며 생각하게 된다. 그의 시집 제목처럼 그만의 건조한 서정은 낮도 아니며, 저녁도 아니며, 너무 늦은 밤도 아니며, 비교적 아침에 떠올려지고 회자될 성격이었다. 그는 우산에 대해서라면 오래오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우산은 기본적으로 혼자 쓰는 것이었다. 나는 우산 아래 숨을 수 있고 숨은 공간 너머로 타인과 알맞게 교류할 수 있다. 핵심은 ‘알맞게’ 였다.

최근 몇 개월 동안 내면에 끝없이 파고드는 시어를 가까이 했다. 황혜경, 이제니, 김이듬 …… 서로 다른 시인들은 유사한 시어를 내세우며 나를 한없이 깊은 감정의 골짜기로 데려갔다. 그들의 사연이 녹아있는 시어를 가까이 하며 깊은 계곡을 내려갈 때는 황홀했으나 다시 나의 세계로 돌아오는 일은 요원한 것처럼 보였다. 떠남보다 돌아옴이 버거웠다. 그리하여 유희경 시인의 시집을 읽고 서점을 거닐다가 류근 시인의 산문집이 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슬픔에 대해서 천천히 이야기한다고 했다. 함부로 사랑에 속아주는 버릇. 그리고 함부로 인생에 져주는 즐거움. 사랑에 속아준다는 것은 타인에 대해 어려운 마음을 갖지 않겠다는 결의였다. 류근의 바로 대척점에 유희경 시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는 우산을 쓰는 일 같이 꽤나 혼자인 셈이라, 남의 사연과 감정에 깊게 끌려들어갈 시간과 자신이 없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사랑에 속아주지 않는 버릇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


우산에 대해서라면 오래오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검은 빛이고 나는 펼쳐진 시간을 사랑한다.

예를 들어 점점 어두워져 가는 거리, 어깨를 감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가로등 켜지고, 그림자 사라지고, 나는 머뭇거릴 때,

검은 물로 태어나는 것 혹은 젖은 몸으로 살아가는 것 쉽게,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는 방법 혹은 혼자서 걸어가는 일

- 유희경 시인의 <우산의 과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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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한길컬처북스 2
이부영 지음 / 한길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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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첫 선을 보인 드라마 <엑스파일(The X-Files)>은 내게 다양하고도 지금까지 이어지는 깊은 흔적을 남긴 유일한 문학 작품이다. 이것을 문학으로 부를 수 있을지 여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생생한 인물, 단단한 서사, 끊임없는 긴장과 해소는 이것이 단순히 브라운관에서 재생되는 미디어라기 보다 하나의 거대한 문학 작품으로 만들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주인공인 폭스 멀더(데이비드 듀코브니)가 루비라는 여자 아이의 실종 사건을 추적하는 이야기인데, 멀더는 루비의 흔적을 찾으며 어릴 적 잃어버린 친 동생 사만다를 끊임없이 떠올린다. 결국 에피소드가 끝날 때까지 멀더는 루비를 찾지 못했다. 동료인 데이나 스컬리(질리안 앤더슨)는 멀더가 최면 상태에서 여동생 납치 당시를 회상한 녹음 테이프를 듣게 된다. 테이프에서 흘러 나오는 멀더의 목소리는 멀더 자신의 것이기도 했고, 무의식 속의 또 다른 멀더의 것이기도 했다. 엑스파일을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장면 중 하나다.
 
깨어있지 않은 사람이 깨어있듯이 말하고 감정을 토로하고 때로는 눈물도 흘린다. 최면을 통해 엿본 무의식의 세계는 평소 자신이 의식하여 꺼내어 보이지 않은 다양한 인물과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게 되는데, 나도 모르는 나를 만나는 것은 언제나 강렬하고 섬뜩하다. 표면에 드러난 자아를 뒤로 하고 조금씩 나의 무의식 속으로 침잠하여 들어갈 때 처음 만나는 것이 그림자라고 융은 이야기한다. 그림자. 깨어 있는 자아가 무의식의 세계로 밀어 넣은 나의 열등한 인격이다. 자아로부터 배척 당해 무의식에 억압된 또 다른 나의 모습이라고 했다. 누구나 밝고, 정의롭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것이 당연하겠지만 빛이 있으면 반드시 어둠이 있는 법. 누구나 어둡고, 비열하고, 추한 모습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며 그런 모습이 내게는 전혀 없다고 감추어버리는 것 역시 사람의 한 단면이라고 했다. 열등한 것들을 애써 무의식의 세계로 밀어 넣을수록 현실 세계에서 그림자를 투사하여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한다고 했다.
 
분석심리학의 대가인 이부영 선생의 <분석심리학 탐구> 3부작은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자아로부터 진정한 자신의 실체인 자기에 이르기까지 만나야 하는 존재들을 차례 차례 다룬다. 가장 먼저 만나는 그림자, 그 다음에 만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이해하고 나면 비로소 자기에 도달할 수 있다. 올리버 색스의 심리학 책을 읽고 사람의 마음에 대해 알고 싶어 3부작을 구입했던 게 6년 전이다. 당시에는 책의 내용이 어려워서 몇 장 넘기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무엇보다 내 안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음을 인정하기 싫었다. 계속 앞으로만 나아가고 싶었나 보다. 시간이 여러 해 지났다. 시간이 여러 해 지났다고 그때에 비해 특별히 달라지는 것이 있었을까. 다만 몇 년 더 살다 보니 나는 생각보다 순수하지 않고 세속적이지만 동시에 실존에 대해 고민하고 형이상학적인 성향도 꽤 많았다. 어느 하나로 나를 정의하기 쉽지 않았다. 어떤 사람으로 나를 규정하기에 나는 많은 것들이 적절히 섞여 있는 존재였다.
 
작가는 그림자를 우리 마음 속의 어두운 반려자라고 불렀다. 반려자. 짝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짝이라는 건 무엇일까. 하나가 아닌 하나와 하나가 쌍을 이루어 삶을 살아간다는 말이다. 제목을 다시 생각해보자.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다. 이 둘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김수영이 하 …… 그림자가 없다, 라고 독백한 것과 달리 사실 그림자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그림자가 없다고 믿는 사람만 있을 뿐. 그림자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야말로 사실은 가장 거대한 그림자를 딛고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삶이 과연 건강한 걸까. 이부영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자아와 그림자, 밝음과 어둠이 합쳐지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나를 찾는 길고 먼 여행의 첫걸음은 아마 내 안의 어두운 그림자에 청하는 최초의 악수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아닐까 싶다. 육 년을 기다려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 떨리는 마음이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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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민음사 모던 클래식 75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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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生, 저마다의 기억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름을 떠올린 것은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와의 대화에서였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친구는 제 나이 답지 않게 꽤 오래된 영화를 좋아했는데 특히 영국 웨일스 출신의 안소니 홉킨스 배우를 흠모했다. 그의 추천으로《양들의 침묵(1991)》,  《가을의 전설(1994)》, 《조블랙의 사랑(1997)》《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2005)》을 보았고 이 배우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연기의 아우라에 나 역시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가즈오 이시구로 이름이 흘러나온 것은 바로 그 즈음인데, 안소니 홉킨스의 《남아있는 나날(1993)》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한 번 보라고. 그리고 영화를 보기 전이나 혹은 보고 나서 이 영화의 원작인 소설을 함께 읽어 보라고 했다.  영화와 소설을 겹쳐 읽으면 쓸쓸한 정서가 온 몸으로 스며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는 아직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전이었는데, 일본인의 이름을 가진 작가의 작품이 영미권에서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가 추천한 영화 《남아있는 나날》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영화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이름 하나는 확실히 남았을 무렵. 2017년 10월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려왔다. 가즈오 이시구로라고 했다.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로부터 그의 이름과 소설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예전에도 어디선가 밝혔지만 나는 조금 독특한 버릇이 하나 있었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작품을 읽어야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표작은 가장 나중에 읽고 그의 세계관을 형성해가는 주변 작품들부터 읽어야 했다. 그래야 작가의 대표작이 어떻게 견고하고 두터운 문학적 의식의 지층을 딛고 만들어진 것인지,  그런 것들을 조금 더 진실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예를 들어 영국 서머싯 몸 작가의 대표작 《달과 6펜스》를 읽기 전에 《인간의 굴레에서》, 《면도날》 등의 작품을 먼저 읽어보는 식이다. 물론 대표작에 대한 생각과 판단은 저마다 다르므로, 어떤 순서로 작품을 읽어야 할지 정답은 없다.

 

처음으로 접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읽고 나서, 올 해 봄 읽었던 모옌 작가의 《개구리(2009)》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이 두 책은 공통된 주제를 놓고 상반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 “우리는 적어도 믿는 바를 위해 행동했고 최선을 다했다.”라고 주인공 오노가 회상하는 것처럼, 두 책 모두 믿는 바를 향해 최선을 다해 행동한 개인들에 대해 말한다. 정부의 산아제한정책에 적극 협조했던 고모에 대해 다룬 《개구리》와, 일본 제국주의가 확장되어가던 20세기 초 일본 정부를 선전하는데 일조했던 예술인들의 삶을 다룬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적어도 주제 측면에서는 같은 지점을 향해 접근해간다. 이러한 개인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믿음은 주관적인 것이라 믿음은 개인적으로 자유가 허락되어 있고, 스스로 믿는 대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삶을 만들어나갔을 뿐이다. 개인의 삶에는 절대적인 선과 악이 있을 수 없었다.
 
달라지는 것은 그 다음부터. 《개구리》가 쉴 새 없이 앞으로 전진해 나간다면,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현재보다 더 많은 과거를 담아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개구리》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5)>와 같다면,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메멘토(2000)>과 유사한 방식으로 서사를 구조한다. 오노를 둘러싼 사람들. 그의 두 딸들.  사위. 옛 제자. 친구들이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오노를 대하는 것을 들여다보며, 제국주의에 호응했던, 그리고 그것을 꽤 자랑스러워 하는 또 다른 오노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무엇이 남았을까. 제국주의에 대한 반발. 부역에 대한 기억으로 고뇌하는 예술인의 모습. 아니다.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작가는 기억에 투쟁하는 개인에 대해 계속 그려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끈질기게 자신만의 문학 세계에 대해 분투해온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단지 좋은 작가가 아니라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있다는 옮긴이의 말처럼.

 

http://blog.naver.com/marill00/221355987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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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의 메아리 - 우주가 빛에 새긴 모든 흔적 우주배경복사
이강환 지음 / 마음산책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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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일곱 마리 눈먼 쥐가 있어. 일곱 마리 쥐는 노란 색, 파란 색, 초록 색, 빨간 색 …… 저마다 다른 색으로 물들여져 있는데 어느 날 이들 앞에 아주 커다란, 낯선 존재가 등장한단다. 책을 읽는 우리는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 손쉽게 알 수 있었지만, 일곱 마리 눈 먼 쥐에게 그 존재란 너무나 거대한 질량과 부피에 불과했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눈먼 쥐들은 한 마리씩 거대한 존재 위로 올라타서는 그 존재를 알아내고 이해하느라 바빴어. 저마다 거대한 존재의 아주 작은 일부분을 더듬어보고는 그것이 무엇인지 단언하고 다른 쥐들에게 자랑하느라 바빴지. 하지만 그 누구도 그 거대한 존재가 회색 빛의 코끼리인 걸 맞춘 이는 없었단다. , 마지막에 그것이 코끼리임을 눈치챈 한 마리 쥐가 있긴 있었지. 그리고 책은 이렇게 끝나버려. “참된 지혜는 전체를 보는 데서 나온다. 어제 밤 아이가 잠들기 전 읽어준 그림책 <일곱 마리 눈먼 생쥐>의 이야기야.
 
참된 지혜는 전체를 보는 데서 나온다. 그 말은 전체가 무엇인지 알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일 테지. 내가 마주하고 있는 존재, 나를 둘러싼 세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전체가 무엇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 참된 지혜가 무엇인지조차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없겠지. 아주 당연한 그림책의 마지막 문구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던 건 최근 몇 년 직장에서 내가 맡았던 업무 때문이었을 거야. 나는 석유 제품을 만들어 파는 석유 회사에 다니고 있어. 올해 벌써 9년차라지. 지난 3년 동안은 우리 회사의 원가를 예측하고 전망하는 업무를 맡았단다. 원가. 그러니까 내가 다니는 회사가 빵집이라면 밀가루와 계란 가격을. 자동차 제조 회사라면 철강의 가격을. 핸드폰 제조 회사라면 반도체의 가격을 미리 예측하고 전망하는 일을 3년 동안 했단다. 그 일은 꽤 어렵고 무엇보다 끝없이 방대했어. 혜안을 갖고 가격 결정 시장의 전체를 내다보기는커녕, 백 분의 일에 해당하는 것도 알기 어려웠단다.
 
나를 둘러싼 전체의 세계를 석유시장에서 확장해서 지구, 아니 우주로 넓혀볼까. 지구의 아주 작은 일부분인 석유시장조차 정확히 손에 쥐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탄생한지 137억년이 넘은 우주라면 과연 자신 있게 참된 지혜는 우주의 전체를 보는 데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내가 알아가야 하는 세계가 넓고 깊을수록, 그래서 내가 알아갈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는 존재 앞에 마주할 때 우리의 태도는 한 없이 겸손해질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아. 우주는 그런 걸 가르쳐 주는 것 같아. 우주에 대한 경애심, 존재에 대한 겸손함, 그리고 경애심과 겸손함 끝 찾아온 이타심 …… 지금까지 우주를 다룬 책은 대부분 그랬단다. 그러니까 우주의 진리를 향해 지혜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지혜라는 단어를 꺼내어 보여주는 셈이었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창백한 푸른 점>이 그랬듯이 알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았어. 이만큼이라도 알 수 있어 다행이라는 투였지.
 
대학에서 천문학을 전공한 학자가, 비록 순수한 천문학자의 길을 걷고 있지는 않지만 우주에 대한 동경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한 것을 기록한 이 책도 우주에 대한 경애심, 조금이라도 우주의 진리를 알아가기 위해 노력했던 선배 학자들에 대한 존경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적 탐사의 결말은 이제 완결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라는 겸손함. 이런 것들이 숨길 수 없이 전해져서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한 편이 따스해져 오는 것이 느껴졌어. 이 책을 쉽게 말하면 이런 걸까. 태초에 빅뱅이 있었다고 하는데. 빅뱅이 발생하고 태초의 파동을 간직한 우주배경복사가 전 우주로 팽창해가며 뻗어갔다고 하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팽창 속도는 계속 빨라져서 우주는 오늘보다 내일 더 멀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 한다고 하는 것들을 지난 수 십 년 동안 과학자들은 믿음을 진실로 증명하기 위해 분투했는지. 그러니까 이 책은 우주만큼 지혜로워지고 싶었던 인류의 분투에 대한 기록이겠지.
 
뉴욕에 가본 적이 있는지. 뉴욕 현대미술관에 가서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마주한 적이 있는지. 어지럽게 흩날리지는 않더라도 수 없이 많은 별을 머리 위에 이고 누워 본적이 있는지. 아마추어 천문 동아리 활동을 했던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밤 늦게 동네 야산에 올라 텐트를 치고 머리 위에 가득한 별을 본 적이 있어. 하늘에 별이 가득했지. 진실로 별이 가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과 몇 십 미터 아래 도시에서 올려다본 하늘과 산 속에 스며들어 본 하늘은 정말 달랐어. 가지고 간 미놀타 수동 카메라 조리개를 수 십 초 동안 개방해서 별의 움직임을 필름에 담았어. 인화된 사진에는 수 십 초 동안 장엄하게 움직인 우주의 움직임이 경이롭게 기록되어 있었지. 별도, 빛도, 어둠도, 우주배경복사도, 빅뱅의 흔적도 사진 속에 담겨 있었겠지. 우주가 움직이고 회전하고 이동하고 있다. 나를 둘러싼, 어쩌면 나의 존재를 탄생시킨 그 무엇이 검은 심연의 너머에서 끝없이 울어대며 몸부림치고 있으면서.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數千年 前)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 김수영 시인의 <달나라의 장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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