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의 형제 -상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학수 옮김 / 범우사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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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어떤 인터뷰에서 “당신이 걸어가는 문학의 길의 종점은 어디냐”는 질문을 받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 같은 책을 쓰는 것이라고 답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 안에는 너무 다양한 사실, 시스템, 세계, 스토리, 그러니까 全 우주가 이 한 편의 소설 안에 모두 담겨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종합소설을 쓰는 것이 작가로서의 목표라고도 했다. 하루키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도스토옙스키, 그 중에서도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정점(頂點)이라고 여겨지는 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하루키가 어떤 지점에서 이 작품을 질투하고 숭배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러시아 어느 시골 마을의 지주인 카라마조프 가문에서 발생한 친부(親父) 살해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장남 드미트리 카라마조프를 둘러싼 재판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드미트리는 친부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는데, 그의 살해 혐의를 둘러싸고 검사와 변호사가 설전을 벌인다.

이폴리트 검사는 50페이지가 넘는 페이지에 걸쳐 드미트리 혐의에 대한 최후 논고를 밝힌다. 그의 논고는 논리적으로 질서정연했고, 드미트리가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았을 때의 시나리오가 얼마나 허약하고 개연성이 낮은 것인지를 파고든다. 이 지점에서 검사는 살해 전후 드미트리의 심리 상태가 어떠했는지 집중적으로 파헤치는데, 논고의 결론은 이렇다. <드미트리는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결국 친부를 살해했다>. 검사는 드미트리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려냈다. 반면, 검사의 논고에 맞서 페추코비치 변호사는 드미트리가 죽인 것이 아니며, 설령 드미트리가 죽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던 불우한 성장 배경을 언급한다. 즉 아버지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드미트리의 살해는 아버지에 대한 살해가 아니라 일반 타인에 대한 살해와 같다는 것이다. 변호사 역시 드미트리의 마음을 파고들어 그림으로 그려냈다. 

그러나 사실은, 검사와 변호사 둘 다 틀렸다. 그들이 언급한 물리적/심리적 증거, 논리적 추론, 당시 정황 등을 토대로 그려낸 살해 당시의 현장은, 친부 살해의 실제 범인인 스메르쟈코프의 고백과는 영 동떨어져 있다. 타인의 심리를 아무리 논리적으로 추론한다고 하더라도 타인과 나 사이에는 무한한 간극이 있다. 나의 심리, 나라는 개체의 진실은 나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타인의 추론으로 쉽게 그려질 성질이 아닌 것이다. 나는 아무도 모른다. 나에 대해서는 타인 그 누구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라면 어떨까. 나는 나에 대해서는 조금은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카라마조프의 둘째 아들인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와의 대화에서,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만난 악마와의 대화에서 나 역시 나의 심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사실은 나 이반 역시 친부 표도르의 죽음을 간절히 원하고 있던 것 아닐까. 그런 깨달음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는 것. 타인의 죽음을 원한다는 감정을 포함해 우리 내면에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가 모여 있다는 것.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완결 지은 것이 1880,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칼 융이 태어난 것이 1875년인 것을 생각해보면 도스토옙스키가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림자>를 수 십 년 앞서 암시한 것은 놀랍기만 하다. <그림자(Shadow)란 우리가 숨기고 싶은 모든 불쾌한 것, 부정적인 것의 집합을 말한다. 열등하고, 가치 없고, 원시적인 부분이며 우리 내면의 어두운 부분이다. 모든 사람은 그림자를 갖고 있는데, 바로 이 그림자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와 대화하며 자신의 그림자를 깨달았고, 집으로 돌아와 사람의 형상으로 변한 악마, 아니 자신의 그림자를 실제 마주한다. 이반이 고통스러워했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이반은 만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을 만났던 거다. 

그렇기 때문에 이반은 동생 알로샤에게 “사실 나는 그것이(악마가) 내가 아니라 그 놈이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라고 고백했던 거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는 무의식의 감정, 열등하고, 가치 없고, 원시적이고, 어둡고, 추악한 인간이 나 자신이 아니라 나를 현혹하러 온 사탄이기를 바랬다. 이반은 곧 나이기도 했다. 나는 조직에 순응하며 가정을 지키며 예술과 선()을 꿈꾸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온갖 부정적인 그림자가 – 누군가를 심지어 죽여버리고 싶다는, 인간으로서의 본성이 – 나에게도 분명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그림자를 가진 인간인 것이다. 때문에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읽으며 가장 깊게 감응했던 인물은 장남 드미트리도, 삼남 알로샤도, 혹은 친부를 살해한 사생아 스메르쟈코프도 아닌, 그림자에 눈 뜬 둘째 이반 카라마조프였다. 앞서 말했듯이 하루키는 全 우주가 이 한 편의 소설 안에 모두 담겨 있다고 했다. 우주에 빛만 존재하지는 않았다. 우주에는 어둠이 더 많았다.  

(2018. 12. 12.) 

추신1. <카라마조프의 형제>는 여러 출판사가 번역하여 책으로 발간했다. 그 중 고 김학수 교수가 번역한 범우사 판을 읽었는데, 범우사 출판사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처음 발행한 것이 1986 11월이니 30년 전의 작품인 셈이다. 일부러 범우사 출판사의 책을 읽은 이유는, 민음사에서 같은 책을 번역한 김연경 번역가가 고등학생 때 이 김학수 번역본을 읽고 자랐다는 말 때문이었다. 번역가의 번역가가 번역한 책이라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결과적으로는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책을 읽는 내내 한 손으로는 작가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번역가의 손을 잡고 있는 듯 했다. 책을 다 읽고 났음에도 우리는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추신2. <카라마조프의 형제>와 함께 2018년의 책 읽기가 조금씩 끝을 향하고 있다. 매달 시집, 고전문학, 과학책, 인문학책을 읽는 경향이 정착된 것이 지난 3월이었다. 사놓은 지 2년이 넘어가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자고 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매 달 다양한 고전문학을 읽는 시간은, 고전문학이 낡은 것이 아니라 이처럼 현대적이고 생명력이 넘친다는 점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안나 카레니나>부터 <카라마조프의 형제>까지, 러시아 문학에서 시작해서 러시아 문학으로 맺음 지었다. 19세기 러시아 낭만주의, 사실주의 문학에 더 빠져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이 2019년 책 읽기의 출발점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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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림과 울림 - 물리학자 김상욱이 바라본 우주와 세계 그리고 우리
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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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물리(物理)에 대해 떠올려볼까. 사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학원을 거의 다니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학원을 갔던 게 중2 때였어.  이십 년 전이네. 그 시절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은 대개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과학고를 대비해서 수학과 물리를 공부하는 편이고 다른 하나는 외고를 대비해서 영어만 공부하는 커리큘럼이었지. 나는 첫 번 째 유형의 학원을 다녔는데 (생각해보니 학원 이름이 8학군 학원, 꽤 도전적인 이름이지) 수업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내 옆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며 느꼈던 에너지는 생생하단다. 중학생이라고 해도 잠시 뒤면 고등학생이 될 녀석들인데 과학고에 갈 법한 친구들은 이미 생기 넘치는 총명함으로 가득했거든. 머리 속에는 온갖 공식과 해법을 외우고 있었고, 벽에 걸린 나무판에 손바닥으로 직각의 방향으로 힘을 가할 때 나무판에 가해지는 장력의 크기를 정확하게 구하는 아이들이었지. 경이로웠단다. 물리란 천재의 과목이었어.

과학고를 준비하던 아이들로부터 느껴지던 알 수 없는 에너지 ...... 그 아이들의 몸으로부터 아주 작고 가느다란 용수철이 발산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면 너는 믿을 수 있을까. 그걸 단지 머리 속의 느낌이라고 웃어 넘길 수만은 없을 것 같아. 물리 문제를 풀던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아주 가는 용수철이 떨리면서 그들에게서 뻗어 나오는 듯한 형상을 보았거든. 그들은 정지된 질량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끝없이 떨고 있는 진동의 근원지이기도 했어. 김상욱 교수는 이 책의 시작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지. <우주는 떨림이다. 정지한 것들은 모두 떨고 있다. 수천 년 동안 한자리에 말없이 서 있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떨고 있다 ......> 모든 것은 떨고 있고, 모든 사물은 진동이라는 책의 첫 머리를 읽으며 내 마음도 함께 진동할 수 밖에 없었단다. 그때 8학군 학원에서 목격했던 천재의 진동은 결코 거짓된 것만은 아니었구나 싶었어.

이어 이 책은 이런 말을 하고 있었어. <모든 물체는 고유한 진동수를 갖는다. 당신 주위에 있는 책상, 자동차, 유리잔 모두 고유진동수를 가지고 있다. 물체의 고유진동수로 그 물체에 진동을 가하면 진동이 엄청나게 증폭된다. 이것을 ‘공명(共鳴)’이라 한다>나도, 수경이도 미약하지만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지만 각자의 진동은 서로 형태와 움직임이 달라서 차이가 생겨나고 서로 다른 존재로 뻗어나가게 되지. 서로 다른 존재, 그건 위상 수학의 개념과 같을 거야. 위상수학에 따르면 야구공은 접시와 같지만 가운데가 뚫린 도넛과는 전혀 다르지. 다시 말하면 야구공은 절대 도넛이 될 수 없는 거야. 살아가며 몸무게가 늘거나 빠질 수도 있고, 가치관 역시 조금씩 바뀔 수도 있고, 生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나이기 위한 고유한 진동은 마지막까지 변함없겠지. 바로 이 때문에 우리 모두는 나만의 리듬, 나만의 감각, 나만의 주파수를 잃지 않기 위해 끈질기게 사투하는 것인지도 몰라.

그런데 말이야, 이어 이 책은 이런 말을 하고 있었어. <인간은 울림이다. 우리는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한다. 우리는 다른 이의 떨림에 울림으로 답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이렇게 인간은 울림이고 떨림이다......> 우리 자신을 김수영 시인이 말한 팽이에 비유해볼까. 내가 하나의 팽이라면 나는 고유한 리듬으로 진동하면서 계속 땅 위에 서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겠지. 하지만 떨고 있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야. 내 주위에는 나와 같은 60억 개의 팽이, 그리고 모든 생명과 에너지로 범위를 넓혀가면 무한대의 팽이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을 것인데 빠르거나 느리거나 서로의 방향과 회전을 인정하며 어느 하나가 쉽게 멈춤을 중단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태도. 그리고 언제든지 누군가를 위해 충분히 울어줄 수 있는 아주 손쉬운 사람이 되자는 것 ......  그런 태도를 소중히 가꾸어 나가다 보면, 우리가 겪는 현실은 점차 타인에게 공명(共鳴)하는 삶에 가까워지게 될 거야.

물리에 대해 떠올려보자고 했지. 물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흔한 방정식, 원리를 말하지 않은 건, 물리(物理)란 모든 사물의 이치라는 뜻 때문이었어.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물은 저마다 특수한 상황 아래에서 고유한 진동을 계속하고 있지만,  동시에 고유한 진동이 만들어내는 삶은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현실 그 자체이기도 해. 세밀하게 파고 들면 나는 세상에 유일무이한 것이며 나의 주파수와 정확히 같은 사람이 없어 보이지만, 나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무수한 내가 모여 우리 모두는 보편의 세계 속에서 보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 김상욱 교수는 이 책을 통해 물리학이 인간적으로 보이길 바란다고 말했지. 은하수를 여행하는 문과생이 바라본 물리학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쉽고 평범하게 이해 될 수 있는 보편의 언어였어. 누구나 고유하고 특별해지고 싶겠지. 그러나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될 수 있다는 건 어려운 것인지도 몰라. 그러니까 보편적인 것이야말로 정말 아름다운 것이라 말하고 싶었어. ▨


보편적인 노래를 너에게 주고 싶어
이건 너무나 평범해서 더 뻔한 노래
어쩌다 우연히 이 노래를 듣는다 해도
서로 모른 채 지나치는 사람들처럼

그때, 그때의 사소한 기분 같은 건
기억조차 나지 않았을 거야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건 너무 슬퍼
사실 아니라고 해도 난 아직 믿고 싶어
너는

이 노래를 듣고서 그때의 마음을
기억할까, 조금은

- <보편적인 노래> 브로콜리 너마저 1집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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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 필요한 순간 - 인간은 얼마나 깊게 생각할 수 있는가
김민형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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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다음 날, 요새 수능 수학 과목에는 어떤 문제가 나오는지, 내가 다시 수능을 본다면 대학에 갈 수 있을만한 수학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 작은 호기심이 들었어. 몹쓸 호기심 ...... 인터넷에 공개된 수능 수학 시험문제를 받아서 회사 점심시간에 펜을 돌려가며 풀었는데 두 번째 페이지에 갔을 때 도저히 풀지 못하겠다고 만세를 불렀단다. 그러니까 그게 벌써 15년 전이네. 2004학년도 수능을 준비하면서 유일하게 어렵지 않다고, 심지어는 종종 즐겁다고 느낀 과목이 수학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자신감, 열정, 좋은 기억들이 지금 당장 수학 문제를 풀어도 어느 정도는 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2003년 11월 수능을 보고 점수를 채점하고 났을 때도 수리 영역이 가장 점수가 높았거든. 그런데 15년만에 나의 현 주소를 다시 확인하고는, 지금이 바로 <수학이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 생각하며 김민형 교수의 책을 읽기 시작했단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문과 생이었지만 나는 정말로 수학을 좋아했어. 잘 한다는 것과 좋아한다는 것은 일정 부분 비례하는 것이 있어서 잘 했기 때문에 좋아했고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을 수학에 쏟았고 또 잘하게 되고, 이런 순서였지. 왜 그랬을까. 내가 속한 문과의 세계는 정답이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했어. 국어, 사회, 정치, 세계 문화, 윤리, 이런 것들은 정말 다양한 층위의 사상과 사유와 감각들로 쌓아 올려진 것들이라 단 하나의 정답이 없다고 믿었던 것 같아. 국어 영역은 언제나 낙제점을 받기 일쑤였지. 정철의 사미인곡을 읽고 나는 이렇게 해석했는데 정답은 저렇게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지. 정답풀이에서 말하는 해석의 이유가 낯설었어. 낯선 당위성 앞에 무척 곤혹스러웠지. 나는 나를 위로했단다. 단 하나의 정답에 대한 당위성은 존재할 수 없고, 옳고 그름을 떠나서 시험 출제자들의 인식 속에 이 문제를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방식 중 하나, 이 정도가 내가 시험문제의 정답을 대하는 태도였어. 그러니까 알긴 알겠는데 그 정답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거였지.
 
그런데 수학은 언제나 정답이 있었어. 그것도 언제나 보편적으로 설명 가능하고 명쾌하고 납득이 가며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정답이었지. 명확한 당위의 영역에 수학의 문제들이 웃으며 부유하고 있었어. 실제로 수학 문제지를 마주하면 문제 하나하나가 웃으며 허공을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단다. 근의 공식을 외우고, 사인 코사인 그래프를 그리며 문제의 해답을 찾아나가는 기분은 문과의 영역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감각이었어. 수학은 암기라거나, 이해라거나, 훈련이라거나 그런 해석은 부차적인 것이었어. 수학 문제를 풀면 어쨌든 정답이 나온다는 것만이 중요했거든. 그래서 수학 문제를 풀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문제를 한 번 다 풀고 처음부터 다시 한 번 검산을 할 때였어. 꽤나 어렵고 견고해 보이는 문제를 두고, 분명 이것이다 라고 느낄 만큼 자신감 있게 해답을 구한 경우라면 내가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지?’ 라며 흐뭇해하며 계산 과정을 복기했거든. 언제나 나의 시선은 수학의 가장 마지막 지점, 정답을 향해있었어.
 
그래서일까, <수학이 필요한 순간>을 읽으며 가장 놀랐던 건 수학은 굉장히 목적 지향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정을 천천히 아주 견고하게 쌓아 올리는 영역이기도 하다는 점이었어. 김민형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 <상당히 많은 수학적인 문제가 3가지 이슈를 한꺼번에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해가 있느냐 없느냐, 둘째는 찾을 수 있느냐, 셋째는 찾을 수 있어도 효율적으로 찾을 수 있느냐. 이 이슈들은 서로 관계가 있으면서 어느 정도는 독립적인 문제입니다.> (p.198-199) 수학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바뀌는 순간이었어. 수학이라고 하는 건 처음부터 태생적으로 정답이 정해져 있고, 정답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내는가, 우리들이 배웠던 수학은 대개 이러한 것이 많았지. 그러나 답이 있는지 없는지, 또 있다면 우리가 그 목적지에 끝내 도달 가능한 것인지, 이런 질문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면 수학은 이과의 영역이 아니라 문과의 영역에 해당할지도 모르겠어.
 
잠시 플래시백(Flashback). 문득 대학 졸업 전 들었던 과목 하나가 생각났거든. 필수 전공과목은 모두 이수했기 때문에 아무 수업이나 자유롭게 들으며 교양과목으로 인정받으면 되던 때였는데, 수학과에서 개설한 <정수론>이라는 수업을 호기롭게 들었단다. 그리고 한 학기 내내 후회했단다. 쉽게 말해 <정수론>은 일 더하기 일이 왜 이가 되는지를 논증하고 증빙하는 과목인데, 나는 수능 시험에서 만났던 웃으며 부유하는 수학 문제들을 상상했거든. 정답을 찾기 위한 수학이 아니라 정답을 미리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정답이 왜 정답인지, 그것에 대한 답을 내려야 했어. 대학 졸업을 눈 앞에 둔 2009년의 가을. 그 과목은 C를 받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정수론 수업을 듣던 때만큼 머리를 쥐어짜야 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아. 그건 수학 공식을 외우느냐 아니냐의 영역은 아니었던 것 같아. 논리와 추론과 사고의 게임이었지. 그래서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학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과목 중 하나로 남게 되었어. 치열했던 만큼 남은 것들이 더 많았어.

또 시간은 흘러 나는 서른 넷이 되었지. 돌아보니 나는 어떻게 해도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뭐라도 계속 합리적으로 만들고 나아가고 다시 후퇴하고 다시 삶의 뭔가를 건축해나가고, 이런 걸 연속해온 것 아닌가 싶어. 서른 다섯을 앞두고 떠올린 작은 생각이 15년 전의 수학 문제 풀이 과정에서 비롯되었다고, 10년 전의 정수론 수럽에서 비롯되었다고 어떻게 날름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다만, “결국 모든 삶은 수학적으로 사고할 수 밖에 없다는 김민형 교수의 말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아. 각자 살아가는 모든 삶에 나만의 해()가 있느냐 없느냐, 해가 있다면 그걸 찾을 수 있느냐, 그리고 조금은 덜 헤매며 해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지 …… 모두가 그 질문의 거대한 뿌리를 찾기 위해 각자만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셈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C를 받았던 그 수업을 들었던 걸 조금은 감사히 생각해도 괜찮은걸까. 


이 모든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김수영 시인의 <거대한 뿌리> 中


황정운. 글을 읽고 씁니다. 9년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marill00/221400697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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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행성 문학과지성 시인선 395
조용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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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가장 고민스러운 지점은 책을 다 읽었을 때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다음은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할 때는 간신히 무언가, 누군가를 이정표 삼아 다음 목적지까지 더듬거리며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책을 둘러싼 여러 지표들이 다음 목적지까지의 이정표가 되어 준다. 작가, 출판사, 번역가 ...... 최근에는 몇몇 평론가도 책을 읽는 여행길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데 신형철 평론가가 추천사를 쓴 책, 혹은 해설을 남긴 책을 의도적으로 선택했고, 그에 대한 나의 경건한 마음만큼 경건한 자세로 책을 읽었다. 그러나 사람의 리듬은 모두가 다른 법이었고, 이 다른 것에는 옳고 그름의 사사로운 감정이 끼어들 수 없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 받고 책을 추천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리듬에 어울리는 책이 있고, 어울릴 때에야 비로소 그에게 옳은 책이 될 것이었다. 옳은 것은 상당히 상대적이다.

누군가에 기대어 책을 읽는다는 것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나는 신형철 평론가가 해설을 달은 조용미 시인의 <기억의 행성>(문학과지성사, 2011) 시집을 읽어 보았고, 위험을 무릎 쓰고 이 시인이 들려주는 고요하고 쟁쟁한 아름다움의 세계에 눈을 뜬 것이 그토록 감사했다. 시집을 다 읽고 났을 때, 이 조용미 시인은 아픔이 멈추어버린 지점을 갈망하는 사람이며, 아픔이 없는 가능성이 감지될 때 생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미학적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독 시인의 시어에는 어두운 묘사가 등장한다. 아픔, 상처, 통증, 고통 ...... 이런 단어들이 종종 시어에서 발견된다. 시인은 그런 통증이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그것들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대개 그런 것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망자를 태우고 가는 꽃상여, 장엄한 종교의 세계로 들어가기 직전의 일주문, 우주의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한 매화초옥도 그림, 시인은 이들 앞에서 통증을 잊는다.

누구나 아름다움을 쫓을 것이다. 그러나 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종종 무시된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혹은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을 찾는다며 목적과 수단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이유로 우리는 저마다 아름다움을 찾는다. 조용미 시인이 감사했던 건 적절하게 스스로 미학적 인간을 추구하는 이유의 단서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아름다움이야 말로 나를 지탱해주고 변화시키고 다른 세계로 한 걸음 내딛게 하며, 한 번 겪고 나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대목을 읽으며 실제로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좋다. 한 번이라도 진실된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나면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시인의 고백이 언제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통용되길 바랬다. 빙산의 일각이라도 우리 역시 감전된 것 같이 아름다움 앞에 숨을 멈추었던 적이 있지 않던가. 최소한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희망이라도 품어본 적 있지 않았던가. 시인은 "문장은 결국 너를 낚아채고야 말았다"고 했다. 시인은, 나를 낚아채고야 말았다. ▨

(2018. 11. 16)


  
한 가지 色()에 깊이 들어앉은 다른 색을 발굴하기까지의 기나긴
과정에 대해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일은 가능할까
나약한 존재를 자극하는 섬세한 색의 변화를,
그 미묘한 느낌의 일렁임을

문장은, 너를 낚아채고야 말았구나
너를 지탱해주고 변화시키고 다른 세계로
한 걸음 내딛게 하는 순간들
한 번 겪고 나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 자리를

- <미학적 인간에 대한 이해>부분

http://blog.naver.com/marill00/221399746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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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이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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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모옌(莫言) 작가의 <열세 걸음(2003년作, 2012년 문학동네 펴냄)>을 읽고 책을 덮고 났을 때 가장 먼저 국어사전을 펼쳤다. 국어사전을 열고 환상(幻想)을 찾아보았다. 사전에 정의된 환상은 ‘현실성이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이라고 했다. 어딘가 개운치 않았다. 그것만으로는 모옌 작가의 책을 읽으며 체험한 강렬한 환상적 리얼리즘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세 걸음>은 현실과 환상, 진짜와 거짓, 화자와 청자가 서로 치환되고 교차되면서 서사를 진행시킨다. 현실에 현실이 아닌 것들이 끼어들어 목소리를 낸다. 그런데 현실적이지 않은 것들이 현실에 끼어든 순간, 바뀌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비현실적인 것들이다. 다시 말해 이방인들이 섞여있는 이상한 현실도 원래 그대로의 현실인 것처럼 여겨졌다. 이것은 가능성이 없는 헛된 세계라고 결코 생각되지 않았다. 어딘가에 이런 세상이 있을 것만 같았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언어와 정서와 사상이 마음에 들었다. 라디오를 켜고 이리저리 주파수를 돌리다가 나와 정확히 일치하는 채널을 찾고 명료한 라디오 너머 목소리를 듣는 듯 했다. 톨스토이에 이어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읽고 나자 그제서야 다른 러시아 작가들이 눈에 들어왔다. 니꼴라이 고골의 <뻬쩨르부르그 이야기>는 예전 러시아의 수도였던 뻬쩨르부르그를 배경으로 한 다섯 편의 단편을 싣고 있다. 어느 것 하나 환상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단편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결코 마주할 수 없는 낯선 가능성들을 제시하며, 이것도 경험하지 않았으나 언젠가 경험할 수도 있는 또 다른 현실이라고 말한다. 빵 속에서 다른 사람의 코가 발견되고(), 이름 모를 노인을 그린 초상화는 밤마다 살아나 섬뜩한 눈동자로 우리를 노려본다. (초상화) 대개의 관리와 장교들은 부패했고 민중의 삶은 궁핍과 처절함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골은 유쾌했다. 부패, 가난, 궁핍, 몰락 이런 삶의 가능성과 어두운 감정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대신 옆에 서서 소개하고 지켜보고 있다. 그가 유쾌할 수 있는 건, 유쾌하다는 감정의 근원을 지금이 아닌 다른 가능성들에서 찾고 있었다. 이는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는 유쾌할 수 없음을 이미 알아버린 것과 같다. 여기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삶을 정확히 직시할 수 있는 유령을 현실로 데려와 지금 이 곳을 그나마 유쾌해질 수 있는 현실로 만들어보자. 고골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프랑스의 환상문학(1951년 作>을 쓴 카스텍스는 환상이란 “현실의 삶의 테두리 안으로 갑작스럽게 침입하는 신비”라고 했다. 고골은 현실이라는 삶의 테두리에 신비한 유령을 초대했고, 풀어놓았고, 사람들이 당황해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웃었다. 웃고 있는 것은 고골 혼자였다. ▨

(2018. 11. 14)

 

http://blog.naver.com/marill00/22139898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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