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0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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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으로 이 세계가 나와 타자 이 둘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해보자. 타자라는 말이 경직되어 있다면 당신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이러한 경우에 나와 당신이 관계를 맺고 서로 섞이는 방식은 두 종류가 있다. 먼저 관계 맺음의 시작은 나의 결함에서 시작한다. 현재 나는 삶이 불안정하고 덜 행복하고 신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실질적인 결손이 있는 상태에 놓여있다. 먼저 나의 결함이 당신과의 관계를 통해 충족되거나 극복될 수 있다고 여겨질 때, 당신과 섞이려는 나의 속력은 조급하고 거칠 것이 없다. 당신에게 가까워짐으로 인해 나는 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 경우 나의 언어는 욕망으로 가득하고 대개의 경우 파국(破局)에 다다른다. 욕망은 본질적으로 멈추어지지 않는 것이므로, 언젠가는 멈출 것을 기대할 것을 기대하며 끝없이 자신을 소비한다. 나는 비극을 스스로 껴안는 존재다. 

그러나 나의 결함이라는 것이 당신으로부터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성질이라면, 이러한 경우에 나는 어떤 방향으로 어떤 속력으로 달려가야 할까. 나의 결함을 당신으로부터 채울 수 없는 것과, 채울 수 없다는 점을 안다는 것의 온도는 미묘하게 다르다. 뒤의 경우가 급격하게 더 슬플 것이며 심지어는 삶의 욕망, 의욕, 열정 등의 긍정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언어를 상실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섞일 수도 없고 섞일 이유도 없을 때 나의 언어는 욕망보다는 공백으로 훨씬 더 풍부하게 채워질 것이다. 공백의 언어에는 목적이나 의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목적과 의도는 일반적으로 나 자신만이 아닌 당신과 세계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의 언어는 연극의 방백(Aside)처럼 들린다. 무대 위에 있는 다른 배우들은 나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다. 희망이든 고통이든 나의 말을 다른 에게 전달 될 때 비극이 가능해진다. 나는 비극을 스스로 회피하는 존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스물 일곱 살에 발표한 데뷔작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 , 1926>는 욕망의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전쟁을 겪으며 본질적으로 인간의 결함에 눈을 뜬 사람들이 있고, 전쟁 중에 사고를 당해 성기에 돌이킬 수 없는 신체적인 결함을 갖게 된 사람도 있다. 이들의 행동과 언어는 모두 땅에 단단히 딛고 있지 않고 정처 없이 부유한다. 이들은 고향인 미국을 떠나 파리, 스페인을 전전한다. 인상적인 건 이들의 대화다. 특별한 심리 묘사 없이 말과 말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장면 어디에서도 끈적거리는 욕망과 은밀한 대화의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들의 대화는, 단지 서로 말을 나누고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는 듯 이루어지고 있다. 대화를 통해 얻어낼 것이 없이 대화라는 행위 자체에만 몰두한다. 언제 어느 형태로 대화가 시작되거나 대화가 종료된다고 하여도 이상할 것 없다. 때문에 이들의 대화는 소름 끼치게 미끄럽게 흘러가는데 바로 그 때문에 이들을 지켜보는 내내 나는 슬픔으로 가득했다. 

스스로 비극을 회피하는 이들에게 단지 비극만이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와 당신의 관계는 당신의 시선에서 보면 당신과 나의 관계로 역전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무수한 나의 집합체이며 서로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나아가고 후퇴한다. 때문에 너에게 다가가려는 욕망을 잃어버렸을 때,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나를 제외한 수 없는 당신들, 나의 여집합들이다. 당신들은 나에게서 빠르게 달아나고 있고 점점 멀어지고 있다. <삶이 이렇게 빠르게 달아나고 있는데, 정말 철저하게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어. 넌 인생이 깡그리 달아나 버리고 있는데, 그걸 조금도 이용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벌써 인생을 절반 가까이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느냐는 말이야!> (p. 22,24) 책을 다 읽고 이 문장에 오래도록 시선이 멈추었던 건, 사실 욕망의 언어를 모두 잃어버린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누구라도 生 전체를 부유하는 이는 없을 것 같았다. 

희망과 욕망의 언어를 잃어버린 이들의 속 마음이 오히려 희망의 증거를 암시하게 했다. 이들의 언어가 점차 독백이나 방백이 아닌 대화로 가득해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니까 자꾸만 빠르게 달아나는 삶에 뭐라도 말을 걸어보는 것. 우리 모두 그것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 있는 셈이 아닌가. (2018.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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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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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톨스토이를 시작으로 러시아 문학을 읽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겨울이 되어야 비로소 도스토옙스키를 읽겠다고 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과 사랑에 대해 말하는 톨스토이에 비해 도스토옙스키의 글에서는 어둡고 치밀하게 응축된 감정이 느껴졌다. 그의 작품은 레몬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 밤이 아니라 스산한 바람이 부는 겨울에 읽어야겠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그만이 톨스토이의 대척점에 있다고 믿었다. 고골, 고리키, 투르게네프, 체호프 ...... 읽고 올라서야 할 러시아의 문호들은 너무도 많았으나, 오직 도스토옙스키만이 톨스토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순서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톨스토이의 작품 분량은 압도적이다. 그래서 흔히 도스토옙스키를 먼저 만나고 이어 톨스토이를 만난다. 누구를 먼저 만나는지 여부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처음 경험한 것들이 기준점이 되어 그 이후를 비교하는 척도가 된다. 비교는 공평하지 않다. 먼저 살다간 것에 보다 종속적이다.

기우였다. 겨울에 읽은 도스토옙스키가 봄에 읽은 톨스토이에 비교되지 않고 종속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둘이 전혀 다른 성격의 화법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톨스토이가 영화라면 도스토옙스키는 연극이었다. 영화는 거대한 서사가 시계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움직이고 흘러간다. 인물과 사건에 초점이 비추어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서사는 계속 앞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동적이다. 연극은 그에 비해 스타카토로 진행된다. 인물과 인물이 무대에 올라 말과 행동을 섞으며 격돌한다. 서사의 시간이 잠시 정지한 채 각 등장 인물들은 한없이 자신의 심리를 꺼내어 보인다. 아래로 파고 들다가 갑자기 조명이 꺼지고 어두워진다. 암전. 그리고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고 다시 시간이 멈춘 채 다시 아래로 파고 든다. 정적인 순간과 동적인 진행이 교차된다. 도스토옙스키가 묘사하는 정적인 순간은 톨스토이에게선 발견되지 않는 것이었다. 둘의 화법은 달랐다. <죄와 벌>을 읽으며 톨스토이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좋았다.

도스토옙스키의 언어가 연극처럼 다가왔다고 했다. <죄와 벌>을 무대 위에서 상연한다고 하면, 세 가지 장면에서 나는 숨이 멎을 뻔했을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전당포 주인 알로냐와 그녀의 이복동생 리자베따를 죽일 때. 라스꼴리니꼬프를 찾아온 뽀르피리 예심판사가 그가 알로냐를 죽인 범인임을 입으로 소리 내어 단언할 때. 라스꼴리니꼬프의 동생 두냐의 사랑을 끝내 얻지 못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권총으로 자살할 때. 이 세 장면만큼은 눈으로 소설을 읽고 있었으나 어두운 관객석에 앉아 눈 앞의 무대를 홀로 지켜보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이토록 말과 말이 서로를 죽일 수 있는 날카로운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오랜만에 기억해냈다. 적당히 아름답고 적당히 보편적인 말로 사람의 감정을 위로하는 말 장난이 아니라 여겼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을 시작으로 다섯 편의 걸작을 완성했다. 그러나 여기 쓰여진 문장들은 이 작품이 生의 마지막 작품인 것처럼 한 없이 치열하게 쓰여져 있지 않은가 ......

연극을 마친 라스꼴리니꼬프가 무대에서 내려와 관객석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그가 어딘가 슬프게 기억되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그때 알고 싶었던 거야, 어서 알고 싶었어.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인가, 아니면 인간인가를 말이야. 내가 선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아니면 넘지 못하는가! 나는 벌벌 떠는 피조물인가, 아니면 권리를 지니고 있는가 ...... (p.615-616)」그는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비범한 인간이라고 믿었다. 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알로샤를 도끼로 죽인 것 역시 그것을 단지 시험해보기 위함이라고 했다. 나는 시험이라는 단어를 ‘증명’이라고 바꿔 이해하고 싶었다. 그는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아니,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존재였다. 가치를 증명해야 존재가 성립되는 삶이었다. 그는 스스로 권리를 지닌 독립 인간이라 믿었지만, 사실 타인과 세계에 종속적인 피조물에 가까웠다. 얼마나 역설적인가. 나의 슬픔은 이 괴리감에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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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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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다는 건 거짓이나 숨김이 없이 바르고 곧다는 거라고 했다. 올해 많은 시집을 읽으며 솔직함은 나이와 반비례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올 해 읽은 시집 중에는 젊은 나이에 등단하여 시작 활동을 하는 작가부터, 한창 감정이 불타오르는 서른, 마흔 나이의 작가들, 원숙해진 시어를 들려주는 원로 작가까지 다양했다. 시인의 나이는 다양했다. 젊은 시인들 혹은 서른과 마흔 나이의 시인들은 자기 자신에 솔직했다. 솔직하다고 느꼈다. 거침없이 자신의 감정을 파헤치고, 드러내고, 방향 없이 발산했다. 반면 원숙한 시인의 원숙한 시어는 에둘러간다고 느꼈다. 출발선에서 달리기를 시작해 결승선에 도착하기 직전 돌아본 삶은 마치 아무런 후회와 원한과 욕망이 없는 것처럼 보여졌다. 처음에는 삶을 포용하는 시어가 따스했으나 이어 솔직하지 않다고 느꼈다. 사람으로서 솔직하지 않아 보였다. 어쩌면 시인의 나이가 시인을 대하는 나에게 편견을 심어주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일 솔직하지 않은 건 나인가 싶었다.

10월에 허수경 시인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읽자고 결심하고 며칠 뒤 시인의 부고를 접한 것은 묘한 긴장감을 주었다. 시인은 등단 뒤 이십 대 나이에 시집을 두 권 내고 독일로 건너가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다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가 출간된 것은 2016. 시인의 나이도 오십을 넘겼고 어쩌면 몸도 조금씩 병들기 시작했을 무렵에 탄생한 작품일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삶보다는 삶 아닌 죽음에 눈을 돌리고 삶은 그만큼 여유롭게 바라볼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시인이 들려주는 시어는 반대의 감정으로 가득했다. 시인이라는 연필 한 자루가 점점 짧아지면서 떠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 당신은 나쁘기도 하고 이쁘기도 한 복잡한 감정 ...... 삶과 죽음 사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시인은 끝까지 솔직해지고 싶어 했다. 오래된 과거를 돌아보는 시인의 솔직함은 묘하게 감동적이었다.

삶과 죽음 사이 어느 지점에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봤다고 했다. 계절로 치면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순간을 통과하고 있는 셈이다. 시인은 아주 많은 시에서 여름이라는 계절을 언급했다. 그 봄, 가을, 겨울 시인은 당신과 함께 있었으나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우리의 계절은 시퍼런 빛들이 무작위로 이마를 짓이기는 여름이라고 했다. 그리고 레몬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밤 속에서 사랑을 한다고 했다. 아니, 사랑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일이다. 삶에 대한 미련, 집착, 후회, 그리움에 솔직해질 수 있는 사람이 가장 그리운 계절은 아마 여름일거다. 여름처럼 태양이 작열하는 삶의 정점은 다시 시인에게 허락되지 않기 때문일거다. 나는 아직 여름보다는 가을과 겨울을 좋아했다. 한 해가 끝나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는 감정이 좋았다. 그렇게 보면 나는 아직 삶과 죽음 중 삶에 더 가깝다고 믿었던걸까. 그래서 아직 더 많은 여름이 내 앞에 놓여져 있을 것이라 생각한걸까. (2018. 10. 26)


지난 여름 속 당신의 눈, 그 깊은 어느 모서리에서 자란 달에 레몬 냄새가 나서 내 볼은 떨린다 레몬꽃이 바람 속에 흥얼거리던 멜로디처럼 눈물 같은 흰 빛 뒤안에서 작은 레몬 멍울이 열리던 것처럼 내 볼은 떨린다

달이 뜬 당신의 눈 속을 걸어가고 싶을 때마다 검은 눈을 가진 올빼미들이 레몬을 물고 레몬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밤 속에서 사랑을 한다 당신 보고 싶다, 라는 아주 짤막한 생애의 편지만을 자연에게 띄우고 싶던 여름이었다 

- 허수경 시인의 <레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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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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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에 대해 생각한다. 1812년으로 돌아가보자. 볼콘스키 가문의 첫째 아들,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은 나폴레옹에 맞서 러시아의 운명이 걸린 보로디노 전투에 참가한다. 전투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승리 아닌 승리로 끝났고, 볼콘스키 공작이 속한 러시아는 패배 아닌 패배를 경험했다. 전쟁은 참혹했고 주변에는 부상자들이 가득했고 볼콘스키 그 자신도 심각한 부상을 입고 사경을 헤맨다. 그도 알고 있는 바실리 가문의 차남 아나톨이 다리가 잘려 나가는 광경을 지켜본다. 그런데 인간과 인간의 삶이 부서지는 참혹한 순간에 안드레이 공작은 역설적으로 사랑의 위대함을 각성한다. 형제에 대한 사랑, 적에 대한 연민, 주변을 사랑하라는 신의 섭리. 사실 전쟁터는 사랑의 위대함을 각성하기에 적합한 지점은 아니다. 살갗이 뜯어져 나가는 현실의 순간에 사랑에 대해 곱씹어 볼 여유가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결고리야말로 톨스토이의 문학을 톨스토이만의 것으로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은 두 가지를 연결시키고 있다. 먼저 어떤 현실에 처해있고, 또 그 상황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지각하지만 다른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는 운명을 매개한다. 즉 거부하고 싶은 현실과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사이에 그럼에도 불구하다는 말이 위치해 있다. 매개되어 있는 것 사이에 우리는 보통 주인공들이 앞으로 어떤 운명을 선택하고 개척해 나갈 것인지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현재의 삶이 얼마나 초라하거나, 혹은 얼마나 위대하거나 관계없이 현실을 관통하는 주인공의 각성 이후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한다. 각성 이후의 지점에 작가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이 말은 분명 옳다. 톨스토이가 안드레이의 입을 빌어 그럼에도 사랑이다, 라고 말을 했을 때에는 그의 진심이 사랑, (), 땀으로 가득한 성실한 삶, 이런 것에 있음을 우리는 안다. 피예르를 통해, 레빈을 통해, 네흘류도프를 통해, 그리고 이들이 겪은 다양한 군상을 통해 톨스토이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랑과 선(), 아니 작가의 무엇이라도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재구성될 삶이 공허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삶 역시 진정성 있게 다루어져야 한다. 지금까지의 삶이 진실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현실을 긍정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발 밑에 깔려있는 현실의 부조리함과 참혹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보여주고 경험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길을 걸어가려는 삶에 당위가 생긴다. 말이 길었다. 톨스토이의 문학은 현실과 운명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작품 내내 휘몰아치는 다양한 군상들의 생생한 목소리는 현실이 얼마나 우연으로 가득하며 매번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는지 알려준다. 모두가 혼란스러운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엔트로피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비단 1805년부터 1812년 모스크바의 함락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시간만이 전쟁이 아니라, 삶 전체가 끊임없는 투쟁과 전쟁의 연속이다.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현실과 운명 두 가지에 대한 고민을 요구한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크고 작은 각성의 순간을 경험하며, 끊임없이 좋은 방향으로 삶을 만들어 가려고 노력한다. 사람의 본성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어느 순간 굳은 결심은 약해지고 주변의 사람은 통제되지 않고 지배할 수 없는 사건이 늘 발생한다. 삶은 쉽게 부서지고 허물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대해 도전하고 생각을 품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의 특권이라고 믿고 싶다. 비록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참혹한 현실에 기인하지 않고 불연속적이라 하더라도, 비록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톨스토이가 말한 사랑과, ()과는 다른, 각자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삶이라는 전쟁을 겪고 있기도 하며, 동시에 아주 우연히 그와 반대의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 우리가 꿈꾸는 평화라는 것이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 역설을 이해한 순간 나는 본질적으로 행복해졌다.

(2018.10.22)


. 톨스토이의 장편 세 편을 쓰여진 시간과는 반대로, <부활>,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순서로 읽었다. 작품의 분량은 점차 늘어났고 작품의 세계관은 점차 깊어졌다. 톨스토이를 만난 것만으로도 2018년은 본질적으로 행복했다, 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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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 - 빗소리가 어떻게 풍경을 보여주는가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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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부터 솜사탕 색깔을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색각이상이라고 구체적인 증상을 알게 된 건 초등학교 신체검사 시간이었어. 색각이상(色覺異狀). 색각이상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증상이 있고, 증상의 정도에 따라 색맹이나 색약으로 분류되는데 나는 가끔 적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적록색약에 해당했지. 수경이도 초등학교 신체검사 시간에 한 번쯤은 색각이상 검사를 해봤겠지. 색으로 칠해진 점이 가득한 도형에서 특정한 숫자나 패턴을 읽어내는 것인데, 처음의 한 두 장은 손쉽게 읽었지만 그 뒤의 숫자들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어. 색각이상 여부를 검사하던 선생님은 내가 어떤 숫자를 말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어. 대다수의 아이들이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7이요, 13이요, 19, 라며 숫자를 연신 외치는데, 나는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거든. 몇 초 침묵이 이어지다가 간신히 12인가요, 라고 말하면 선생님은 색각검사지가 아니라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셨지.

적색과 녹색을 구분하는데 가끔 어려움을 느꼈지만 일반 생활에서는 불편할 것이 거의 없었어. 신호등 색이 바뀌는 걸 제대로 분별할 수 있으니 그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지. 물론 아이와 함께 공원을 찾았을 때 희미한 솜사탕 색이 하늘색인지 분홍색인지 분간하기 어렵다거나, 유니클로 매장에서 판매하는 옷의 다양한 색을 정확하게 비교하며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경우가 있었지만 삶을 재구성해야 할 만큼 심각한 수준은 결코 아니었지.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증상이라 하더라도, 내 삶이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고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적록색약이라는 것이 무의식 중에 콤플렉스가 되었던 것 같아. 그래서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색깔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기 시작했지. 10,000가지 이상의 색을 체계화 한 팬톤(Pantone)의 색채 표현을 외우다시피 하며 이 색은 이 색이구나, 저 색은 저 색이구나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단다. 언제나 고통에는 정 반대 측면에서의 보상이 뒤따르는 법이었지.

색깔에 대해 이야기했지. 색깔이란, 사람 눈에 따라 보이는 여러 가지의 빛깔이라고 하네. 사람의 눈에 따라 지각되고 표현되는 것이 비단 색깔에만 해당될까. 아침에 일어나서 내 옆에 누워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을 때, 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지적 사고가 가능하지만 어떠한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할 때, 피아노 악보의 음표가 전혀 낯선 것으로 읽힐 때, 혹은 수십 년 읽은 책이 익숙한 알파벳이 아니라 전혀 생소한 그리스 문자나 히브리 문자로 이해될 때, 그때의 당혹감은 얼마나 크고 깊을까. 지금껏 익숙한 방식으로 지각하고 표현하던 것,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이 파괴된다면 어떻게든 그 파괴 속에서 자신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할 거야. (229) 신경과 전문의인 저자가 2015년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출간된 <마음의 눈(2010)>은 사람들이 어떤 손실을 겪으며 삶이 어떻게 파괴되었고 또 어떻게 극복하는지. 삶의 파괴와 부활에 대한 이야기야.

올리버 색스를 떠올리던 순간이 생각났어. 작년 5월 회사 점심시간에 근처 갤러리에서 작품을 관람하고 돌아오던 길이었어. 마을버스를 타고 회사로 돌아오는데 창 밖을 바라보며 그 즈음에 읽었던 그의 자서전 <온 더 무브 (알마, 2015)>를 떠올렸단다. 책을 읽는 내내 느껴진 따스한 정서가 5월의 날씨와 잘 어울렸지. 그는 신경과 전문의로 일하면서 다양한 고통과 기괴한 상실 속에 살아가는 환자들을 마주했는데, 자신도 범속한 삶을 살았던 건 아니었어. 사람 얼굴이나 장소를 인지하지 못하는 어려움, 동성애라는 성 정체성에 대한 고뇌와 죄의식, 마약에 탐닉해서 몸과 마음이 부서졌던 과거, 모터사이클을 타다가 발생한 큰 사고 ...... 나의 고통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아니지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거나, 빗소리로 풍경을 볼 수 밖에 없는 이들의 처지에 감응(感應)할 수 있게 해주었을 거야. 삶이 부서진 이들에게 감응하고 귀를 기울였던 그는 실로 의학계의 계관시인이었어.

이번에 <마음의 눈>을 읽으며 마음이 더 따뜻해졌다면, 그건 환자들이 보여준 경이로운 생명력 때문일거야. 우리는 보통 아주 작은 상처에도 삶이 위축되고 더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그러나 지금까지 살던 방식을 버리고 살아가는 방식을 새롭게 재구성해야 할 만큼 낯선 환경에 처했을 때 나나 수경이나 과연 끝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어. 올리버 색스라면 곁에 나타나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우리도 그렇게 계속해서, 어떻게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다고. 음표를 읽기 힘들어진 릴리언이 하이든 4중주곡을 여전히 머리 속에 기억하고 놀랍도록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릴리언이 특별한 건 아니야.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겠지. 우리 모두는 릴리언과 같아. 바로 그 때문에 우리 모두는 평범하지만, 동시에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부활하여 인간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계속 살아가게 될 거야. 그게 인간이 인간으로 규정될 수 있는 조건이겠지.


이건 불행이라고, 중얼거리면
모든 음악이 전쟁의 손으로 우리를 안아주는 그런 슬픈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건 사랑이라고, 중얼거리면
모든 음악이 검은빛으로 변하는 그런 처참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다만 손을 잡아달라는 간절한 몸의 부탁일 뿐입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내 기억을 가진 쥐가 당신에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 허수경 시인의 <내 손을 잡아줄래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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