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판

Ari Ari the Korean Cinema, 2011감독 허철주연 정지영 윤진서







 한국영화, 문제 참 많다. 80년대 지독한 정치검열에의해서 이념에 부딛쳐 상영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영상예술은 국가의 정치적 이념을 전파하는 수단으로써 이용되고 그에 반하는 영화는 상영은 커녕, 만든 감독은 남산 지하실 어딘가로 끌려 가곤 했던 시절이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 오래전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87년 이후, 영화 검열자체가 해제되기 전까지 채 25년 전 이야기다. 한국영화의 황금기라 여겨지는 60년대에서 70년대로 접어들면서 독재정치는 이념의 문제로 영화를 짖밟았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지금. 영화는 자본의 이름으로 짖밟히고 있다. 


 대기업의 자회사 그룹들이 영화판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말그대로 '수익이 되는 상품'으로 영화는 상당부분 변질되었다. 1999년, 멀티플렉스 시대의 개막과 동시에 충무로의 영화제작 시스템은 대기업의 수익창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당연한 이치대로 흘러갔다. 헐리우드의 장르영화가 관객들의 선호를 받으면서 우리나라 영화제작 스타일도 대중들의 입맛에 결기되고 말았다. 대중들에 입맛에 의해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것이다. 관객들이 감당하기 힘든 영상과 스토리는, 투자자 입장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자본의 피해로 다가왔다. 때문에 대중의 입맛에 맞는 영화들이 제작되고, 감독의 독창성과 예술성은 서서히 자취를 감춰가는 추세가 이어졌다. 물론 그 사이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훌륭하게 표현한 작품들도 없었던건 아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영화판에서 그런 영화들이 드물다는 것. 영화가 영상예술로써의 근본적인 이상에 접근은 커녕 관심조차 없는 형태로 보여지고 있는 현실. 거기서 부터 문제였다. 21세기 한국영화는 지난 정치검열을 넘어, 또다른 형태의 자본검열을 받기 시작했다.


 <영화판>은 허철감독이 연출하고, <부러진 화살>의 정지영 감독, 배우 윤진서가 인터뷰어로써 출연해 영화를 이끌어 간다. 아니, 사실 이끌어 가는 모습이 아니다. 인터뷰어로써 질문을 던지다가 어느새 편집상 공백 속에서 인터뷰어가 직접 대답하는 형식으로 결론을 돌출하는 모습마저 비춰진다. 이미 인터뷰어로써의 역할과 출연자의 역할 사이의 벽이 허물어 지면서, '한국영화의 거장들을 만나서' 이야기 하는 본래의 취지마저 모호해 졌다. 결코 '융화'의 뜻이 될 수 없는 그 벽이 무너지는 순간 영화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흔들린다. 거장 감독들과 배우들을 옆에 두고, 하고싶은 이야기를 해버리는 '원맨쇼'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것은 정지영감독의 잘못도, 배우 윤진서의 잘못도 아니다. 편집의 문제라고 믿고싶다. <영화판>은 일종의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영화판에서 일했던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각 주제에 맞는 쿼터로 나눠 나열한다. 앞으로 제시 될 인터뷰 내용들을 요약한 주제의 타이틀을 드러내고, 그것과 관련된 그들의 의견들을 비춘다. 하지만 허철감독은 그 마저도 혼돈한다. 각기 다른 담론의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서 얻어낼 수 있는 비슷한 어휘와 반응들을 문맥상 어울린다 싶으면 꽃아 심어놓은 느낌이다. 배우들과 또 다른배우들의 영상이 하나의 주제로 교차되어 나타나면서, 그 속의 통일성이라곤 찾아 볼 수 없다. 그모습은 꽃병에 꼿힌 정신없는 조화처럼 느껴진다. 메인 타이틀을 상실한채 배우들이 내뱉는 문제의식들은 엉성한 편집에 의해 두서없이 던지는 잡소리로 변질 되어 버리는 것이다. 꽃병에 꽃이 만발했다고, 꽃이라고, 다 예쁜건 아니다.


세상에나, 이렇게나 훌륭한 배우와 감독, 제작사, 영화평론가, 영화학 대학교수들을 카메라 앉혀놓고 이정도 이야기 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이 한탄스럽다. 그들의 술자리와 인터뷰 자리에서 결코 쓸데없는 이야기가 오고갔다는게 아니다. 잠깐씩 튀어나오는 꽤나 명진한 문제의식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문제다. 진지한 문제의식이 쏘옥 하고 튀어나오는 것. 한가지로 수렴되는 문제의 진지한 담론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진 모래알 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널부러져 있다. 영화판을 이야기 하는 '난장판'으로 변질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50년대부터의 한국영화 역사를 집어 보면서, 80년대의 영화검열이 영화사에 끼친 악영향. 그로 하여금 놓쳐버린 중요한 감독들. 그리고 자본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검열을 받는 오늘날의 세태들. 정치에 의해, 자본에 의해 타압받는 영화판을 후반부에 다룬다. 한때 영화 전성기 때 다양한 작품을 내놓았으나 '노력해도 안되더라'는 정지영 감독의 실질적 고민을 등에 얹고 영화 제작의 높은 벽을 이야기 한다. 이 벽은 왜 여기에 놓여있는 것인가. 출연자들은 자본에 따른 영화판의 한계를 이야기 하지만 감독은 그 이야기들을 하나의 깔때기로 모아 애써 수렴하려고 하는 연출이 역력히 보인다. 몇개의 단어와 문장들이 서로 결탁해 하나의 입으로 모아지길 의도 하는 것이다. (무슨 얘기가 나오려 하면 잘려지는 편집을 보면서, 감독 한명의 이야기라도 좀 제대로 들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영상으로 보여지는 행위들에 적당한 당위를 부여하고, 욕설과 섞인 다른 의견들에 대해서 군화발 같은 편집으로 짖눌러 버린다. 열린 의견과 현실적 대안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 부족이 드러낸 처참한 결말이다.


 대한민국 '영화판'은 문제가 많다. 사회적 특수성과 급변하는 자본주의에 의해 수도없이 휩쓸린 고난의 상처들이 있다. 그리고 그 상처들을 다시금 화자하고, 극복의 의지로 똘똘 뭉쳐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할 수 있다. 너무도 훌륭한 취지이며, 영화는 그정도의, 그 이상의 수단이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로써 최소한의 만듦새도 가지지 못한 영화는 그 자체부터가 문제의식을 가지게 만든다. (영화의 엔딩으로, 정지영감독이 '부러진 화살' 영화 제작을 시작하기 전 고사를 지내는 모습이 나온다. 그 어떤 공론과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없이 이 장명은 판타지처럼 등장한다.) 이 영화는 <영화판>이 당장에 직면한 현실적 문제도, 해결해야 할 문제도, 그 문제를 들춰내는 방법도 부족했다.-ozwonsu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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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치콕 얘기를 좀 해야겠다. 반세기가 훌쩍 지나서도 끈임없이 화자되는 이유는 설명할 필요도, 설명할 가치도 불필요 하게 느껴진다. 서스펜스의 거장. 스릴러의 거장. 서스펜스랑 스릴러가 뭔차이가 있던, 고추장과 된장의 차이건. 순수하게 히치콕의 영화에 대한. 아니 히치콕과 영화에 대한 잡념을 적어보려 한다. 


히치콕 영화단상 1

 <싸이코, Psycho, 1960>



PSYCHO

Alfred Hitchcock's Psycho , Psycho, 1960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배우 안소니퍼킨스 베라마일즈







 영화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것은 다양하게 해석 될 수 있을 것이다. 등장인물에 대한 연민의 카타르시스일 수도 있고, 영화의 내용과 사건에 대한 카타르시스일 수도 있다. 혹은 영화에 관련한 사람이라면 영화 감독의 테크닉과 표현법에 느낄 수도 있겠고. 여하튼 히치콕은 영화적기법으로 '스릴러'를 다뤄내는 최고의 감독이다. 그는 그 자체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감독이다.


 대부분이 그랬을 거라 믿는다. 나도 흑백영상이 이루고 있는 욕실에서, 입이 찢어질 듯 소리지르는 전라의 여자의 모습이 연상되는 '싸이코'를 가장 먼저 봤다. 영화초반부터 후반까지, 일관적으로 유지되는 어두운 분위기와 음습한 기운들이 이 영화를 하나의 스릴러 작품으로 연상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수도 없이 인용되고 거론되고 심지어는 연구되었을 장면이겠지만, 욕조신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커튼을 치고 개인적인 공간에서, 게다가 입고있는 옷 하나 없는 인물의 현상황이 가지는 공간적인 공포감. 마치 무서워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올렸을때 찬바람이 쌩하고 지나가는 허전한 발처럼 심리적인 여백이 남겨주는 공포 속에서, 칼을 쉴새없이 여자의 신체 부위를 여기저기 난도질한다. 컷들은 여자의 입, 눈, 코, 팔을 지나 배수구로 흘러내려가는 핏물을 비치면서 순간적으로 인물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의 형태들을 캐치하듯이 빠르게 나열한다. 


 히치콕의 영화는 흔히 공포물에서 보이는 사건과 사건의 더미 속에서 가해지는 충격의 이미지들과는 많이 다른점을 볼 수 있다. 사건이 발발하는 상황설명과 이유를 알 수 없고 심지어는 그 범인조차 알 수 없다. 다양한 사건들에 의해 설명되고 분명한 행위가 아닌, 근본적인 공허함 속에서 가해지는 공포인 것이다. 거기에 치밀하게 계산 된 카메라 구성과 소름끼칠 정도로 냉혹한 사운드 트랙이 그 공포감을 더한다. 히치콕은 설명될 수 없는 대상으로 부터의 근본적인 공포감을 선호했다. 


 히치콕이 후대 영화계에 남긴 유산은 분명하게 일컬어 진다.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특유의 카메라 구도. 스릴러 영화로써 배경음악이 가지는 의미. 사건이 꼬이면서 관객들에게 사건의 여지를 숨기거나, 극단의 공포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의 설정등. 하지만 이런 테크니컬한 부분들이 히치콕의 손에 의해 나올 수 있기까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겠다. 난 한명의 감독은 한명의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히치콕이 가진 대중성과 더불어 그가 동시에, 결코 놓치지 않으려 했던 '작품성'에 그의 철학이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느끼는 공포의 본질적인 근원과 편중된 감정이 가지는 왜곡의 공포들에 대한 연구와 분석. 그것들에 대한 끈임없는 노력들이 후대 스릴러 장르에서 테크닉컬이라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되고 차용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ozwonsuv

<다음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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