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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삶
이종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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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가면돼지국밥에 부산 소주를 먹자부산에 가면숙소 침대에 하루 종일 늘어져 있자. (……부산에 가면헌책방 거리의 카페에서 손을 잡고 옛날 음악을 듣자.

손은 왜 잡아.”

하얀 설탕을 먹을게.”

꼭 챙겨 먹어.”

하루에 한 번씩 물에 타서 마실게.” (17-18)

 

이 이야기는 너구리가 매실청을 담그기 위해 흑설탕을 사러 나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그리고 우리는 책을 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가의 능청스러운 밀당과 입담에 속수무책이 된다절절한 사랑 고백도격렬한 스킨십도 없는 이런 문단에 입술이 마르고 온몸이 짜릿하다이런 식의 색깔 놀이말놀이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빨간 휴지 줄까파란 휴지 줄까말을 거는 화장실 귀신 이야기를 하다가소주를 시킨다가게 주인이 묻는다. “빨간 거 줄까파란 거 줄까?”(39)

 

끝없이 막막해지기만 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다. ‘막막하다는 소설 속 주인공너구리가 까딱하면 생각하는 말이다그늘에 앉아 장기를 두는 노인들에게서 나의 미래를 볼 때케로베로스 옆에 가만히 앉아 시간을 때울 때, 3년 만에 만난 친구 형에게 할 말을 고를 때멀어지는 길고양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생각할 때겨우 이 생을 살아냈는데 귀신이 돼버린 귀신을 떠올릴 때너구리는 막막해진다나도 막막해진다이런 글을 읽고 있으면뭐야나만 막막한 게 아니었던 거야세상 모든 청춘들은 이렇게 막막한 거야이런 우리는 누가 구원해주는 거야이 막막함은 언제 해소되는 거야?


그럼 기성세대가혹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무한경쟁사회가자본주의와 보이지 않는 손이내 손을 잡고 컵을 파는 가게에 들어선다애초에 컵을 사고 싶지 않았더라도마음에 드는 컵이 없더라도꼭 하나를 고르란다컵을 사야 네 막막함’ 따위를 잊을 수 있다니까잊는다고요소되는 게 아니라잊는다고요기성세대가혹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무한경쟁사회가자본주의와 보이지 않는 손이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막막해하는 청춘들 덕에-잔인한 발언이지만-어쩌면 이 세상은 좀 더 인간다워지는 법이다잘 적응하고곧 순응하는 빠른 개미들 대신방황하고반항하는 느린 베짱이들을난 더 사랑한다그들 덕분에 우린 한숨 돌리고소설은 빛난다너구리에겐 막막한 순간들이 있고그 순간들은 다른 순간들과 손을 잡으며 이어진 전선처럼 삶에 불을 밝힌다이를테면 이런 장면들.

 

설탕 봉지를 기울이자 흰 가루가 한줄기로 가느다랗게 쏟아졌다밀가루면 좋았을걸밀가루라면 가루가 눈처럼 날렸을 것이다봉지를 천천히 비우고 하나를 더 뜯었다두 번째는 입구를 크게 벌려서 탈탈 털었다설탕이 떨어지는 것을 본 원숭이들이 날뛰었다야유가 함성으로 바뀌었다나는 명예를 회복하고 다리를 떠났다.(22)

 

나는 명예를 회복하고 다리를 떠났다란 문장이 너무나 능청스러워 몇 번을 다시 읽었다설탕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빛나는 순간너구리도참치도영수도영식이도 모두 함께 빛난다밀가루였다면 눈이 날리는 낭만적이고 그림 같은 순간이었겠지만설탕이기에짜릿하게 달콤하고 새하얗게 반짝이는 청춘들을 함성 지르게 한다.

 

작가는 이 소설을 두고 여덟 개의 작은 조각보로 이루어진 하나의 커다란 조각보라는 표현을 썼다여러 빛나는 순간들의 닮은 점을 찾아 이어 붙이면그들이 빛났던 이유를 알게 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너구리에게 묻고 싶다어떠니네 순간들이 모여 한 장의 조각보가 되었어네가 막막했던 이유를 알겠니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빛났던 이유를 알겠니.


내 것도 없고내 자리도 없다는 생각길을 걷다 문득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리라는 예감 같은 것에 휩싸일 때이런 조각보의 존재는 위안이 된다내 삶도 어쩌면다른 세상의 누군가가 빛나는 조각보로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의미를 알 수 없이 그 자체로 빛나는’ 나만의 조각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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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가죽소파 표류기 - 제3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정지향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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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상처를 주는 사람한테 일부러 더 실없이 농담하고 모든 걸 다 가볍게 하려고 해. 요조처럼. 그래서 우리의 이상한 동아리에도 들어갔던 거고.(32)’


비가 왔다 그친 후, 작은 방을 가득 메운 습기. 허벅지를 철썩 붙게 하는 진득이는 장판. 그 위에 누워 새하얀 천장을 바라본다. 직육면체 모양의 각진 공기가 날 내리누르고, ‘대학생이란 말을 곱씹어 본다. ‘20’, ‘청춘이란 단어가 함께 딸려온다. 마지막으로 가장 좋은 시절이란 의심스러운 덕담이 필수적인 향신료처럼 첨가된다. 피식 웃는다. 자취방의 적막이 내 속을 마구 휘저어 놓는다. ‘일부러 더 실없이 농담하고 모든 걸 다 가볍게 하려고하는 요조가 내 웃음에 동조한다. ‘가장 좋은 시절에 우울하면 안 될 것 같아 가시를 세우고 나를 보호한다.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는 대학생이 쓴 대학생에 관한 소설이다. 나 또한 대학생이고, 때문에 이 소설 속 대학생들의 모습이 특출하게 무료하고, 우울하고, 불안한 형상이라고 느껴지진 않는다. ‘20’, ‘청춘’, ‘가장 좋은 시절이란 말과 어쩌면 가장 멀리 떨어져있다고 볼 수 있을 대한민국의 대학생들. 지금도 축축한 공기 속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쥐고 있을, 그 수많은 대학생들. 가족문제와 인간관계, 취업난, 여행, 사랑과 우정 같은 키워드 속에서 골머리 앓는 이들을 어떤 이야기와 어떤 언어로, 어떤 새로운 국면을 맞게 하여 어떤 행동을 하게 할까, 하는 문제를, ‘대학소설상의 수상작가가 능수능란하게 해결했다. 어쩌면 대학소설상이 원했던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였던 건지도 모른다.


소설은 민영이 찾아옴과 함께 시작되고, 민영과 요조가 방을 떠남과 함께 끝난다. 언뜻 보면, 이것은 민영의 고아의 도시방문기다. 또 언뜻 보면, 세 친구의 결합과 불가피한 해체를 이야기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작가는 천연덕스레 이것이 그들의 여행이라고 주장한다.

 

그러고 보면, 민영은 그저 고아의 도시로 여행을 온 게 아니었어. 그애가 나에게로 여행을 데려온 거야.(72)’

 

셋이 지내기엔 좁은 방에 초록 가죽소파가 있다 치고, ‘카우치 서퍼민영이 들어왔다. 그리고 여행이어쩌면 표류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시작되었다. 고아의 도시를 구석구석 돌아보고, 서울의 후원에 갔다가 연못에 둘러앉아 날밤을 새기도 한다. 무슨 고급 노천탕처럼 동네 목욕탕에 몸을 담근다. 민영은 요조와 에게 또 다른 고아의 도시와 또 다른 서울을 선사한다. ‘여행을 데리고 왔다는 표현이 이보다 어울릴 수 없다. 남겨지거나 남을 남겨두고 왔던 고아들에게 평소와는 다른 해류가 닥친 것이다. 바다 한가운데 남겨져서 표류하는 그들에게선, 이상하게도, 땅에 정착해있을 때와는 다른 묘한 생기가 느껴진다. 요조와 민영이 떠난 후, ‘는 생각한다.

 

눌러뒀던 생각들이 봇물처럼 터졌지. 민영과 요조가 모두 떠나고 나면 나는 방안에서 뭘 해야 할까. 학기가 시작되고 도시로 나갔던 아이들이 모두 돌아오면 나는 그 사이에서 어떤 모양으로 걸을까. 그들을 만나기 전에 내가 어떻게 시간을 견뎌왔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어. 고작 일 년 전의 일인데 말이야. 새벽에 혼자 방에서 깨어났을 때 문득 나와 연결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어떻게 버텼는지. 수업이 끝난 뒤 이 도시와 서울의 낯선 동네들을 아무렇게나 걷다가 해가 지는 하늘을 봤을 때 그리운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어떻게 버텨왔던 건지.(113-114)’

 

그래, 어떻게 버텨왔던 걸까. 그때는 모든 것을 남겨두고 온 였고, 이제는 남겨진 . 요조, 민영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문득 문득 떠오를 것이고, 왜 더 이상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인지, 슬플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리운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대신 그리워 할 것이고, ‘나와 연결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대신 삼각형의 꼭짓점에서 민영과 요조에게 전화를 걸 것이다. 그들의 표류는 성공적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당신과의 화해처럼 말이다. 언젠간 나도, 민영에게 소파를 내어주고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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