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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

지은이클레어 키건 /홍한별 옮김

출판다산책방

출간일초판 48쇄 발행 2024 3 20

가격: 13,800

저자 소개:

'1968년 아일랜드 위클로에서 태어났따. 17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로용라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이어서 웨이릇대학교에서 문예창작 석사 학위를 받아 학부생을 가르쳤고더블린트리니티칼리지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디건>은 키건의 작품을 두고 "탄광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고 진귀하다"라고 평한 바 있다이는 그가 24년간 활동하면서 단 4권의 책만을 냈는데 그 모든 작품들이 얇고 예리하고 우수하기 때문이다키건은 1999년 첫 단편집인 <남극>으로 루니 아일랜드 문학상과 윌리엄 트레버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2007년 두 번째 작품 <푸른 들판을 걷다>를 출간해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출간된 가장 뛰어난 단편집에 수여하는 에지 힐상을 수상했다. 2009년 쓰인 <맡겨진 소녀>는 같은 해 데이비 번스 문학상을 수상했고 <타임스>에서 뽑은'21세기 최고의 소설 50'에 선정되었다. 2021년 출간된 <이처럼 사소한 것들> 2022년 오웰상(소설부문)을 수상하고같은 해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라 "아름답고 명료하며 실리적인 소설"이라는 심사위원들의 찬사를 받았다.

자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거장의 반열에 오른 키건에게 미국을 넘어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이 책은 '역대 부커상 후보에 오른 가장 짧은 소설'로도 알려져 있다.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아일랜드 정부의 협조하에 가톨릭 수녀원이 운영하며 불법적인 잔혹 행위를 저질렀던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자칫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선택 앞에서 고뇌하는 한 남자의 내면을 치밀하게 그려낸 소설이다이 작품은 현재 아일랜드 배우 킬리언 머피가 직접 주연과 제작을 맡아 영화로 제장 중이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첫 문장)

​​


'1985년 아일랜드 작은 도시에 사는 빌 펄롱'과 주변 사람들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24)살아가는 사람들이다만약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22)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 펄롱은 엄마가 열여섯 살 때 미시즈 윌슨의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일하던 중 임신을 했다미시즈 윌슨은 남편을 먼저 보내고 시내에서 몇 마일 떨어진 큰 집에 혼자 사는 개신교도였는데펄롱 엄마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가족들은 외면하고 등을 돌렸지만 미시즈 윌슨은 엄마를 그 집에서 지내며 일할 수 있게 해준 사람이고 또한 엄마가 죽고 나서도 미시즈 윌슨은 그를 학교 공부도 시켜주고 돌봐 주었다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른 채펄롱은 아내 아일린과 딸 다섯을 부양하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혹독한 시기였지만 펄롱은 그럴수록 조용히 버티고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 하겠다는 생각으로 쳇바퀴 도는듯한 생활이지만 열심히 해 나간다그는 야적장에서 석탄이나 토탄무연탄분탄장작 등을 팔았다펄롱의 일상은 매일 똑 같았다그는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삶이 어떨까펄롱은 생각했다.'(29). 가끔 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 하고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는 가끔 생각했다. "이게 다 무엇 때문일까펄룽은 생각했다일 그리고 끝없는 걱정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뜬금없이 기술학교에서 나와 여름에 버섯 공장에서 일하던 때가 떠올랐다출근 첫날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버섯을 땄음에도 손이 더뎌 다른 사람들 작업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마침내 라인 끝에 다다랐을 때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잠시 멈춰 작업을 시작한 지점을 돌아보았는데거기에서 벌써 새끼버섯이 배양토를 뚫고 올라오는 걸 보고 똑같은 일이 날이면 날마다 여름 내내 반복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44)

매일 쳇바퀴 돌듯 하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멈추어 서서 생각해 볼 시간도 없이 나날이 똑같은 일의 반복되는 일상...'새끼버섯이 배양토를 뚫고 올라오는 걸 보고 똑같은 일이 날이면 날마다 반복되겠구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는 펄롱의 마음이 공감이 간다쉴 새 없이 그의 일상은 똑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석탄을 갖다 주기 위해 수녀원을 방문했다가 펄롱은 석탄광 안에 여자아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조용하지만 결코 평화로워 보이지 않는 음습한 수녀원에서 창고에 갇혀 있던 소녀를 다시 수녀원장한테 되돌려 주고 나왔지만석연치 않았고여자애를 내버려두고 나온것이 위선자 같아서 괴로워한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막달레나 세탁소는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고 아일랜드 정부에서 지원한 같은 이름과 명분의 여러 시설 가운데 하나'타락한 여성들을 수용한다는 명분으로 설립했으나성매매여성혼외 임신을 한 여성고아학대 피해자정신이상자성적으로 방종하다는 평판이 있는 여성심지어 외모가 아름다워서 남자들을 타락시킬 위험이 있는 젊은 여성까지 마구잡이로 이곳에 수용했고 교회의 묵인하게 착취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세탁소의 실체에 대해 짐작하면서도 입을 다물고 학대에서 눈을 돌리고 산다비리를 알면서도 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봐 모른 척 하고 살아간다펄롱에게도 그 일에 말려들지 말라고 충고를 하기도 했다하지만 펄롱은 만약에 우리 애가 그중 하나라면하고 생각했고미시즈 윌슨이 그의 엄마를 구해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여기 있다고 생각에 미친다결국 펄롱은 여자애를 구해내기로 작정하고 수녀원으로 향한다그는 앞으로 그 일로 말미암아 어떤 부당한 일을 당하고 또 겪어야 하는지 두려움으로 내다보았지만결심을 바꾸지 않고 시행한다

"이제 거의 다 왔어." 펄롱이 기운을 돋웠다. "조금만 가면 집이야."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 나날을수십 년을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그걸 뭐라고 부르든-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 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갓날 딸들을 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조차도.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더 옛날이었다면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하지 않은 일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120~121)

펄롱이 어느 날수녀원 앞에 갔다가 빠져 나오던 밤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당황스러워하며 길을 찾아헤매다가 한 노인에게 길을 물었을 때노인은 이렇게 말했었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54). 어두운 숲속 좁은 길에 염소 옆에서 죽은 엉겅퀴를 낫으로 베고 있던 노인...그는 왜 거기 있었을까. 소설을 다시 읽으며 문득 이 노인이 마치 심판대 앞에 선 예수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길로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자네가 책임지는 걸세'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120~쪽)

남의 불행을 모르는 척하고 깊이 관여하지 않으면서 나와 내 가족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위를 위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살 수도 있다그런데 또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많은 사람의 비방과 비난의 시선을 감수하고서라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기꺼이 어려움을 감수하고 선택하는 펄롱미시즈 윌슨이 그의 엄마를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는그리고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하고 생각했다펄롱은 자신의 엄마가 위기에 처했을 때선뜻 받아주었던 미시즈 윌슨이 있었기에펄롱의 엄마도아버지도그리고 펄롱의 현재도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생각만 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다

나는 펄롱이 매일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가 문득 문득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한 데서, 바삐 돌아가는 버섯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잠시 멈춰'(44) 생각하던 버릇,생각의 힘이(?) 불의를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고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과 같지 않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거대한 힘 앞에서 나 한 사람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용기있는 선택을 하는 주인공 펄롱...! 소설은 독자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소설은 간결한 문장빠른 전개로 금방 읽어지지만결코 가볍지 않았다내용은 짧지만 함축과 암시로 가득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소설은 독자에게 묻는다최악의 상황이 이제 시작되리란 걸 내다보면서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꼭 해야 할 일도와야 할 일 앞에서 그대는 어떤 태도를 선택할 것인가묻는 것 같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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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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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장편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를 읽고

은희경 작가는 1995년에 쓴 <새의 선물>을 읽고서 반해 다른 소설들도 몇 권 찾아서 읽었었다. 오랜 만에 소설읽기 모임에서 3월의 책으로 <새의 선물>로 선정한 까닭에 다시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때의 감동을 재현하는 즐거움을 맛보았고, 다시 읽으면서도 참 잘 썼다 생각했다. 이왕에 다른 소설도 찾아 읽어보자 싶어서 짧은 소설들로 엮은 <타인에게 말걸기>도 읽었다. 그리고 <소년을 위로해줘>란 장편소설을 읽었다. 하지만 내 마음 속의 은희경 작가의 최고의 소설은 여전히 <새의 선물>이다. 몇 권의 소설도 읽어보고 또 그 나름대로의 재미도 있지만 역시 첫 장편소설인 <새의 선물>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첫 사랑, 첫 감동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장편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는 열일 곱 살의 연우라는 소년의 시선으로 쓴 성장소설로 힙합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꾸어 나가는 성장소설이다. 우연히 힙합 음악을 듣다가(‘소년을 위로해줘’) 착상했다는 소설이다. ‘무엇다워야 한다는 가르침에 난 또 놀라. 습관적으로 모든 일들에 익숙한 척 가슴을 펴지만 그 속에서 곪은 상처는 아주 천천히 우리들을 바보로 만들어. 우리는 진짜보다 더 강한 척해야 하므로.’(‘소년을 위로해줘’가사)

처음부터 흥미로웠던 건 아니다.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한 장 두 장 넘기는데, 읽다 보면 계속 읽게 되는 매력이 있었다.. 작가가 처음부터 많은 정보를 주지 않고 마치 양파껍질을 하나씩 벗겨가듯이 조금씩 던져주고 천천히 알려주는데 처음엔 주인공 ‘나’가 누구이고 몇살인지, 뭘하는 사람인지…아무런 정보가 없다가 한. 겹 한 겹씩 벗겨가는 느낌이다. 이름은 연우, 그리고 연우 엄마의 이름, ‘나’의 나이’ 이렇게 조금씩 툭툭 던진다. 독자들이 궁금하게 하면서 독자가 소설속으로 발을 들여놓게 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주인공 연우와 연우 엄마 신민아다. 아들 연우를 방목하며 여느 엄마들하고는 조금 다른 라이프스타일로 살아가는 이혼녀다. 연우 엄마 신민아씨는 허세가 없다. 그녀의 툭툭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톡 쏘는 탄산음료처럼, 혹은 박하사탕처럼 상쾌 유쾌해진다.

“주변의 위험한 물건 다 치워놓고 마음껏 놀게 해주는 것. 그게 방목이야. 대부분 혼자 하도록 내버려두지만 결정적일 때는 개입을 해야 해. 그러니까, 멀리 있더라도 연결은 끊어지면 안된다 이거야. 그런 걸 방목의 기술이라고 하지.”(251)라고 하는 말이나,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연우를 깨우며 하는 말, “연우야, 빨리 일어나. 빨리. 어서 옷 입어! 다급한 엄마가 나를 마구 흔들었다. 벌떡 일어나 창밖을 보니 성난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비바람과 싸우듯 난폭하게 가지를 흔들어대고 흙탕물 줄기가 흙길을 쓸어내리며 거칠게 휩쓸려가고 있었다. 거의 재난 수준인데…’바람 보러 가자. 바람? 응, 빨리 챙겨. 고작 바람을 보려고 이런 폭우를 뚫고 밖으로 나간다고?...지금 숲에 가면 숲 전체가 미친 듯이 흔들리는 걸 볼 수 있어. 쉽게 못 보는 그림이야. 네 감수성 훈련을 위해 교육적 목적으로 데려가는 거라니까. 남자는 날씨와 장소에 섬세하게 반응할 줄 알아야 해.” 또 “폭풍우 몰아치는 날 카페에 앉아 창밖 경치를 봐야 했고, 어떤 새벽에는 취해 돌아와 마구 깨우는 바람에 공원에 나가서 탠덤바이크를 태워줘야 했고, 극장에서는 반드시 캐러멜 향 팝콘과 다이어트 콜라를 나눠 먹어야 했고, 핑크색과 초록색 가발로 바꿔 써가며 스티커 사진을 찍어야 했고, 각기 다른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거리를 걷다가 반쯤 남았을 때 바꿔 먹어야 했고, 집 앞 놀이터에 불려나가 캔맥주가 두 개쯤 비는 동안 스프라이트 한 캔을 마셔줘야 했고, 그네까지 밀어줘야 했고…이 모든 게 본인의 주장으로는 신 육아법이라고 한다.”(p351) 등등 라고 하는 흔한 상투성을 깨는 유쾌함이 있다.

“나는 또 생각했다. 이렇게 달리는 거다. 달리고 달리다보면 언젠가 모든 거리의 모든 밤을 가로질러 결국 불이 켜진 집에 가 닿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도둑이 들까봐 불을 켜놓은 빈집이 아니라 정말 누군가가 그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불 켜진 집. 그리고 그것은 이 밤의 끝까지라도 달려 도망쳐야 할 것만 같던 내가 마침내 지칠 대로 지친 발을 멈춰도 되는..이 세상의 가장 멋진 풍경.”(p216)

이 대목에선 마음이 짠~해졌다. 열일곱 살의 고민과 방황으로 힘들어하고 방황하며 잠시 떠돌다가도 내가 돌아가 쉴 수 있는 따뜻한 불빛 새어나오는 집, 나를 기다리는 집, 끝까지 믿고 기다리는 가족, 그 누군가가 항상 기다리고 있는 집…’정말 누군가가 그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불 켜진 집’…지칠대로 지친 발을 멈춰도 되는 …비빌 언덕. 그것이 있어서 방황도 언젠가 그칠 수도 있고, 또 안심할 수도 있는 것이리라. 그런 ‘나를 기다리고 있는 불 켜진 집’이 없는 아이들은 …어떻게 견디고 있고, 또 그런 시절을 보낸 사람은 또 그 시절의 허공을 무엇으로 채우며 또 무엇으로 이겨냈을까…. 문득 슬픔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소설을 읽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남의 생각을 필터 없이 그대로 주입하고 똑같은 목소리를 내고 또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다시 돌아보게 된다. 소설 속의 소년 소녀들처럼 열일곱 살의 ‘연우’가 되고 태수가 되고 채영이가 되어 보는 것…그것만으로도 경직된 가치관과 상투성, 고정관념의 근육이완제가 되고 우리의 굳어진 사고가 말랑말랑해지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시대의 젊은이들과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낯선 우주의 고독한 떠돌이 소년”과 같은 게 아닐까.
#소년을위로해줘 #은희경장편소설 #열일곱살소년의성장일기 #문학동네 #책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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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
마리오 푸조 지음, 이은정 옮김 / 늘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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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푸조의 <대부> 3부까지 읽고 (2024년 3월 11일)

소설 <대부>(마리오 푸조/늘봄)를 읽었다. 영화 <대부>는 본 지가 하도 오래 돼서 (그리고 얼마나 봤는지 모르겠다)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는데 흥미롭게 보았던 걸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다. 소설은 첫 장부터 흡인력 있게, 그리고 빠른 전개로 흥미진진하게 읽어져서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 이민자인 대부 ‘돈 코를레오네’와 소설 속 인물들에 감정이입이 되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주인공 대부의 행동에 반하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명언처럼 들리는 데다가 분명히 거대한 미국의 마피아세계의 두목(보스)이고 범죄자인데도 불구하고 그 ‘주인공’에 매료되어 재미있게 읽었다.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사건 중심의 빠른 전개와 개성 있는 인물 등 흥미로웠다.

지하세계(마피아)의 최고 권력자 돈 코를레오네는 12살에 아버지가 마피아의 총에 맞아 처참하게 죽은 뒤에 보복이 두려워 모친은 그를 미국으로 보내는데, 힘들게 정착하는 과정에서 그를 비롯해 주변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돈을 갈취하고 약자들을 괴롭히는 이웃 사람 ‘파누치’를 제거하면서부터 점점 범죄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법으로도 해결하지 못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오고 도움을 주면서 자기 일처럼 문제를 해결해주고 그런 가운데 타고난 감각과 사업수완을 발휘해 사업을 확장하고 암흑계에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미국 뉴욕 최고의 마피아 최고권력자가 된다.

주인공은 권력과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데다 그들을 뒤에서 조종하며 움직이는 숨은 권력자다. 대부는 또 자기 사람들을 철저하게 챙기고 선행을 베풀고 우정을 중요시하고, 자기한테 부탁하는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내는 법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또 자기와 자기 사람들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지킨다. 그는 분명 범죄자인데도 불구하고 읽다 보면 감정이입이 되면서 소설속에 빠져든다.

자기 목적을 위해 상대방을 이성적이고도 냉철하게 설득하고, 그 제안을 거절할 때는 제거하는 폭력성과 잔인함을 보인다. 소설을 읽다 보면, 주인공 대부에 감정이입이 되어서 그가 행하는 불법이 그의 선행에 매료되고 희석되어서 범죄 행위가 덮이는 것 같다. 그가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고 우정을 소중히 여기며 힘든 일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의 원한을 대신 갚아주고 그들의 일을 자기 일처럼 해결해주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오는 사람을 결코 실망시킨 적이 없다. 그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거나 자기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따위의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지도 않을 뿐 아니라, 상대가 그의 친구가 아니어도 되고, 자신에게 사례금을 낼 처지자 못 되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면 그는 충분했다. 스스로 그에 대한 우정을 맹세하는 일이었다. 그렇게만 하면 아무리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돈 코를레오네는 진심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들어준다. 또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놓인 어떤 장애물도 제거해 준다.

그는 우정을 소중히 여기고 어떤 부탁도 들어준다. 뿐만 아니라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수치심을 갖지 않도록 따뜻하게 마음을 써주고 용기 있는 말을 해주기도 한다. ‘그는 자기 세계와 자기 사람들을 아버지처럼 보살폈’고 ‘상대가 가난뱅이건 부자이건, 권력이 있건 없건 똑같이 반갑게 맞이’하고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것은 그의 성품’이었다.

대부는 분명 나쁜 놈인데 왜 이 인물에 매력을 느낄까. 암흑계의 대부, 마피아란 말만 들어도 사실 무시무시하다. 그런데도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 ‘대부’는 그 모든 걸 잊게 만든다. 그가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내치는 법이 없고 선행을 베풀고 악을 대신 제거하는 데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감정이입이 되는 것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그의 말 한 마디의 엄중함(?)과 카리스마 있는 행동이 그가 암흑계의 사람이란 사실을 잊게 만든다.


소설의 1부에 대부 ‘돈 코를레오네’의 딸의 결혼식 장면을 길게 서술하고 있다. 대부의 딸 결혼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청첩장을 받고 신부의 결혼식에 온갖 선물과 돈봉투를 가지고 하객들이 찾아오는데 그 중에는 대부한테 도움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줄을 잇는 장면이 퍽 인상적이었다. ‘딸의 결혼식 날에는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게 시칠리아의 풍습’이기 때문에 이런 기회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이다. 12살 이후로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온 대부는 이들의 힘든 부탁을 들어준다.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도 없고, 해결할 길도 없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다.

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은, 대부 돈 코를레오네와 오랜 우정을 나눠왔고 그의 밑에서 오른팔 노릇을 했던 젠코 아반단도가 암투병 끝에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을 때의 장면이었다. 병문안 온 대부한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데, ‘대부님, 대부님…나 좀 살려주시오…당신에겐 힘이 있잖습니까? 불쌍한 내 마누라가 울지 않도록 해주세요. 우린 어릴 적 친구가 아닙니까? 난 지은 죄가 있어서 지옥에 떨어질 텐데 나를 이대로 죽게 내버려둘 겁니까?” “오늘이 따님 결혼식이니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겠죠?” 대부 돈 코를레오네의 힘이 얼마나 크고 또 그를 믿고 따랐는지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대부한테 애원하고 하소연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정치, 사회적인 온갖 불법과 살인, 범죄, 권력 간의 연결고리들이 마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소설 <대부>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의 두 얼굴, 특히 미국사회의 민 낯을 보여주는 것 같다. 소설 맨 앞장에 “거대한 부 뒤에는 항상 범죄가 있다”는 발자크의 말을 적어 놓았듯이, 미국자본주의 사회의 한 단면, 만연해 있는 사회악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또 이 소설을 쓴 작가가 자연히 궁금해진다. 어떻게 마피아의 세계를 이토록 실감나게 적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소설 속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실제 인물들처럼 그려낼 수 있었을까.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보지 않고는 이토록 실감나게 쓸 수 없을 것 같았고 궁금해진다. 책 뒤편 ‘해설’에 보면 작가 ‘마리오 푸조’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

45세의 푸조는 친척들과 도박장 주인들에게 2만 달러이 빚을 지고 있어 불안한 날들을 보내는 가운데 출판사에 선수금을 받고 소설을 썼고 또한 영화사에 팔았다. 순수 문학 작품을 대표하는 초기 두 작품을 썼지만 좋은 평은 받았으나 수입은 꽝이었고 그는 돈을 위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한편의 소설이 그를 백만장자로 만들어 주었고, 소설은 뉴욕타임즈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67주나 올랐으며 전 세계 독자들에게 읽혀졌고 무일푼의 작가 푸조를 국제적인 명사로 만들어주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정작 작가는 자신이 좋은 작품을 쓰지 않았다고 자책했다고 한다.

‘타고난 냉소주의자였던 푸조는 <위대한 맥긴티>에 등장하는 인물의 말을 인용하길 좋아했다’고 한다. “만일 당신이 뇌물을 받은 적이 없다면 정치적으로 최하층민이라는 증거다”. 악의 보편성…씁쓸하다.

#대부 #소설대부 #마리오푸조 #소설읽기 #대부는분명나쁜놈인데왜끌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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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그리스도인 - 소설은 한 사람을 알게 하는데 그게 나일 수 있다
이정일 지음 / 샘솟는기쁨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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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읽고, 짧은 리뷰 )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은 한 마디로 말하면 '소설의 쓸모'에 대해 이야기 한다. 또 한편으로는 어디서도 듣지 못했던 찐한 문학창작 강의를 듣는 것 같았다. 첫물에 우려낸 생얼(?) 리뷰를 쓰고 난 뒤, 두번째로 천천히 읽으면서 나는 내 삶을 복기하는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소설의 역할이 '우리가 자기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있는 것처럼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을 읽다보면 역시 어느새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게 해 주었다. 그래서 소설 속 주인공에 나를 대신 올려놓고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며 나를 복기했다.
글의 행간에 가끔 깨알같은 연필글을 적어넣으면서...내 삶의 '심리적 죽음', 그리고 내가 모르고 지나온 내 삶의 '플랫포인트'는 언제였을까, 더듬어 생각해보면서... 내 안의 나를 만나러가면서... '소설을 읽으면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살게 된다'고 저자는 말했다. 나는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을 읽으면서도 나를 복기해보며 두 번 사는 시간여행을 했던 것 같다. '늘 부딪쳤지만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나를 만나는 여행을.



"소설은 한 사람의 삶을 따라간다. 힘들게 그의 삶의 끝에 다다르면 이상하게도 그런 인생을 선물한 하나님(운명)의 의도가 느껴진다. 자기 계발서처럼 한 줄 문장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아도 소설을 읽고 나면 인생이 뭘까에 대한 확실한 느낌을 손에 쥐게 된다. 바로 그렇게 느끼는 게 중요하다. 그런 느낌을 느껴보는 시간이 내 안의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늘 부딪쳤지만 만난 적은 없는 나를 소설은 느끼게 한다."(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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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그리스도인 - 소설은 한 사람을 알게 하는데 그게 나일 수 있다
이정일 지음 / 샘솟는기쁨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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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이정일/샘솟는기쁨)을 읽고


긴 겨울의 끝자락, 봄의 길목에서 봄소식과 함께 이정일 목사님의 따끈따끈한 신간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이 출간되었다. 앞서 펴낸 <시와 소설과 그리스도인>(2020), <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2022)에 이어 세 번째 책이다. 앞에 만났던 두 책도 한 문장도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밑줄 그을 게 너무 많아서 차라리 문장을 외우고 싶은 책이었는데, 막 쪄낸 따끈따끈한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도 역시 그랬다. 이 책은 또 책표지도 독특하고 예뻐서 아껴 읽으며 어디든지 옆에 끼고 다녔다. 


사실, 저자 이정일 목사님은 2년 전부터 내가 참여하고 있는 ‘소설 읽기’모임의 멘토이시고, 줌(zoom) 모임에서 저자의(목사님의) 모습을 뵙고 있지만, 거제도에서, 서울 청파동에서 직접 만나본 목사님의 따뜻하고 섬세한 성품과 인격, 그리고 삶의 성실함과 지혜에 더욱 놀라웠다. 그리고 목사님의 깊은 속내를 나누어 주어서 우리는 '사소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진짜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읽기도 전에 마음에 그냥 스며드는 듯했고, 깊은 감동과 신뢰와 사랑으로 마주하며 마치 목사님의 육성을 듣는 것처럼 한 땀 한 땀 책을 읽었다.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에게 소설이 왜 필요하고, 이게 어떻게 신앙을 자라게 하는지, 소설을 읽을 때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등을 말’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앞으로 교회를 지켜갈 하나님의 사람들의 내면을 든든히 세워가기 위해서’라고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저자는 왜 우리에게 소설이 필요한지,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를 얘기한다. 해서 책을 한 번 손에 들면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손에서 놓지를 못하게 만든다. 독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작가의 마음이 만져질 것 같다.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지새우는 수고와 기도를 했을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이 책의 내용 전체를 아우르는 문장이 있다면 바로 다음 문장이 아닐까. 


“처음엔 잘 감지하지 못해도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우리의 신경계는 비상 체제로 돌입하고, 인생이 주는 다양한 경험(방황과 동요, 성에 눈뜸, 죽음의 인식, 악의 경험, 자아 찾기, 모순된 세상에 대한 인식 등)을 등장인물을 통해 받아들인다. 주인공은 곤경에 빠져 고생하고 모순된 세계에 혼란도 느끼지만 결국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알게 되면서, 자신만의 느낌과 생각을 만들어내는데, 이런 간접경험이 우리를 성장시킨다.”(22쪽)


책을 읽으면서 모든 내용 하나 하나가 중요하게 다가왔다. 밑줄을 긋고 긋다 보면 빨강, 노랑, 파랑,검정 ㅋ 너무 많아 통째로 외우고 싶어진다. 그 중에서도 마음에 담긴 것들은 나만의 ‘느낌’, 문해력, 심리적 죽음, 삶의 확장과 변화,그리스도인에게 소설이 필요한 이유 등등이었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소설을 읽을 때 줄거리나 의미 찾기가 아니라 ‘나만의 느낌’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는 것이다. ‘소설 읽기’에서 늘 강조하시는 부분이다. 우리는 대부분 소설을 읽을 때, 대부분은 그 소설의 줄거리와 소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의미를 찾고 교훈을 찾는 것이 버릇되어 있다. 학교에서 공부했던 방식대로 모범답안을 찾듯이. 그런데 저자는 ‘진짜 중요한 건 느끼는 것’이라 강조한다. 소설의 주인공을 통해 나 자신의 감정까지도 알려고 해야 나만의 사유가 열린다. 나만의 사유, 나만의 느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무서운 건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고 ‘나’다운 나로 살려면 가끔이라도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걸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인생은 확연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소설은 사건이든 사람이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공감하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지를 일깨워준다. 이걸 ‘인생책’이 보여준다. ...작가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소설에서 뭘 배웠는지를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 더 나가 주인공을 보면서 자신의 감정까지도 알려고 해야 나만의 사유가 열린다. 이런 자기만의 느낌을 얻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자기 느낌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쉽게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우리는 잠시라도 멈춰 서서 느껴야 한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래야 남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90쪽)


나 역시 자주 불안했었다. 책을 읽고 나눔을 할 때, 토론 문화에도 익숙지 않았기에 처음엔 몹시 낯설고 마음이 울렁거렸다. 내가 말하는 게 맞는지 의심했고 또 자신감이 없어 불안했었다. 나의 감정을 못 믿어서 남의 시선, 남의 평가에 신경 쓰는 내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자유로워진 것 같다. 그리고 의미 찾기 보다는 느끼려고 한다. ‘느낌’이 중요하다는 것은 한 마디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소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소설이?! 누가 이런 생각을 해 봤을까. 그 누구도 지금까지 소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하고 작가가 되면 가난하게 산다고 하면서 오히려 부정적인 말을 들은 것이 더 많았고, 그런 부정적인 말들에 마음속에서 피어나던 꿈마저 찬 서리 맞은 듯 소멸되곤 하지 않던가. 그런데, 소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소설 읽는 것, 문학하는 것의 편견을 깨부수는 이 한마디의 말이 마치 뜨거운 한여름 목마른 영혼에 시원한 얼음물을 마시는 듯 시원케 했고, 그것은 ‘내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였다. 


우리는 얼마나 오래된 고정관념과 편견을 가지고 사는지…단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고 남의 생각, 남의 의견에 동조하고 사는지. 가끔 보면 기독교인들 중엔 소설을 읽는 것이 마치 신앙이 없는 사람, 영성 없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소설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신의 한수’라는 말에, 저자에 대한 내 마음이 더 활짝 열리고 무한신뢰가 싹트는 듯했다.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의 말이 이럴 때 딱 어울리는 것 같다. “배움이란 평생 알고 있었던 것을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228) 


“하나님이 이 시대에 작가를 우리 곁에 보내신 이유가 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나’가 되거나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나’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이걸 아시는 하나님은 작가를 우리 곁에 보내 인생을 후회로 채울 여지를 줄이신다.……소설은 신의 한 수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인생에 갇혀 후회스런 삶을 살지 않게 하려고 이야기를 주셨고, 소설 인물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게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신다.”(66쪽)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마음에 다가온 건 변화와 성장이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대부분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그런데 ‘심리적 죽음’을 통해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걸 일깨워준다고 한다. ‘심리적 죽음’은 일단 들어서면 되돌아갈 수 없는 다리다. 그것이 없는 인생은 한 마디로 ‘영혼이 빠져나간 인생’이다. 


소설 속에서 ‘나’를 만나는 것…!!!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232)이라고 했다. 어쩌면 우리는 평생을 살아도 진정한 자기 자신과 대면해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있고 피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의 말 대로 ‘자기다운 삶을 살려면 반드시 알을 깨고 나와야’하는데 그 과정이 바로 ‘심리적 죽음’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혼돈이 주는 심리적 죽음을 대면하면서 그 심리적 죽음을 뚫고 나가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이 혼돈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저마다 자신의 자아를 확장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소설 <주홍글자>속의 딤즈 데일 목사나 <데미안>의 싱클레어, <레미제라블>의 장발장,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 등등의 소설에서의 삶을 통해 우리는 경험하고 또 우리 삶 속에서 경험한다. 우리는 심리적 죽음이라는 혼돈을 겪으면서 바닥까지 닿거나, 벼랑 끝에 내몰렸을 때 비로소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자기 정체성을 알게 되고 변화를 겪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과 얼마나 대면하고 살까. ‘우린 언제나 살아갈 준비만 할 뿐 정작 제대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 건 아닐까.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리스본행 야간열차’중)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와닿는다. 저자는 “어떻게 살아야 인생을 잘 사는 것일까? 소설은 이 물음에 대한 작가의 답안지”라고 한다.소설은 한 인물이 살아가는 삶의 자취를 보여주면서 그가 하는 시행착오를 통해 독자의 시야를 넓혀주는데, 우리의 사고가 유연해지면 작가가 말하지 않는 것도 읽어내는 눈이 열린다.”(218쪽)는 것이다.


“소설은 이 세상 모두가 눈이 멀어도 단 한 사람만은 보기를 원한다. 한 사람이 중요한 건 사회를 바꾼 변화는 언제나 한 사람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 한 사람이 내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을 초월하면서도 자신에게 충실한 존재가 되는 경험을 하는데 그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군지를 묻게 되고 인간이 처한 삶의 처지를 세밀히 들여다보게 된다. ......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가장 깊은 감정을 맛보게 되고 그걸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이런 경험을 인식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이 만들어진다….(중략)…물론 순응하는 사람은 다르다. 자신을 세상에 맞추기에 성공을 꿈꾸게 되면 모험하지 못한다. 대개는 실패의 두려움으로 <천국의 열쇠> 속 밀리 신부처럼 많은 사람이 걸어간 길을 따라 간다. 그런데도 소수는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애쓴다 순리를 거스르는 일은 위험하고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면 포기해야 할 게 있다. 일단 성공에 대한 미련을 접어야 한다. 그래도 소수는 그 길을 걸어간다.”(244)


마지막 장을 읽다가…가슴이 먹먹해졌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의 감정을(생각)을 따라 가고 싶지만 자기 감정이 옳은 것인지 자신이 없고, 거기서 가시적인 열매가 요원해 보이고,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눈치 보면서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인생이 ‘눈에 보이는’ 뭔가를 찾고 보기 때문이다. 


<천국의 열쇠>에서 치셤 신부는 내려가는 길을, 친구 밀리는 올라가는 길을 택했고, 남들 보기엔 성공했지만 소설의 눈으로 보면 가진 게 많고 능력이 있는 게 좋지만, 그것이 ‘인생을 낭비’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충격으로 와 닿았다. 소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느낍니까”(239)  


소설이 우리가 생각해보지 않은 것을 생각하게 하듯이,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 역시 잊고 있었던 한 꿈을 다시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만나는 건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것이 변화와 성장으로 가는 단서가 되며, ‘내 자신과 하나님에 관해 묻게 된다’. 배우 김혜자씨의 백상예술대상수상 소감이 매우 인상깊었던 걸 기억한다. 여기 재인용한 글을 옮겨 적어 본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나는) 그렇게 ‘눈이 부시게’ 살아야 한다. “남들 눈에 사소하게 보여도 자기에겐 한없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가치관이 있다면 그걸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나 다운 나를 만들어주는 요소이고, 또 그게 있어야 현실적인 삶을 살되 ‘이룰 수 없는 꿈’(인간답게 살려고 애쓰는 것)을 붙들고 살 수 있다.”(240쪽)라고.


이 책은 ‘소설은 현실에 익숙해져 잘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우리를 일깨워 주인공 답게 살게’하는 것처럼, 이 책이 지금 ‘주목하는 그 ‘한 사람’은 바로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다. 그리고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이다. 나도 오르한 파묵의 고백했듯이 “어느 날 책 한 권을 읽었고 내 인생 전체가 바뀌었다”라고 고백하고 싶다. 

"소설으 이야기에는 매듭 같은 게 있어서 그것을 잡아당기면 온 우주가 열리며 아주 잠깐 놀라운 비밀을 드러낸다는 걸 작가는 안다‘ 매듭이 풀리는 건 순간이다. 0.2초나 될까 싶은 그 찰나의 순간, 어떤 느낌이나 생각이 섬광처럼 순식간에 나를 훓고 지나간다. 신기한 건 조금 전까지 ‘나라고 느꼈던 나‘가 전혀 다른 나‘가 된 듯 느껴지는데, 이게 소설을 읽을 때 자주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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