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읽는 그리스도인 - 소설은 한 사람을 알게 하는데 그게 나일 수 있다
이정일 지음 / 샘솟는기쁨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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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이정일/샘솟는기쁨)을 읽고


긴 겨울의 끝자락, 봄의 길목에서 봄소식과 함께 이정일 목사님의 따끈따끈한 신간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이 출간되었다. 앞서 펴낸 <시와 소설과 그리스도인>(2020), <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2022)에 이어 세 번째 책이다. 앞에 만났던 두 책도 한 문장도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밑줄 그을 게 너무 많아서 차라리 문장을 외우고 싶은 책이었는데, 막 쪄낸 따끈따끈한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도 역시 그랬다. 이 책은 또 책표지도 독특하고 예뻐서 아껴 읽으며 어디든지 옆에 끼고 다녔다. 


사실, 저자 이정일 목사님은 2년 전부터 내가 참여하고 있는 ‘소설 읽기’모임의 멘토이시고, 줌(zoom) 모임에서 저자의(목사님의) 모습을 뵙고 있지만, 거제도에서, 서울 청파동에서 직접 만나본 목사님의 따뜻하고 섬세한 성품과 인격, 그리고 삶의 성실함과 지혜에 더욱 놀라웠다. 그리고 목사님의 깊은 속내를 나누어 주어서 우리는 '사소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진짜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읽기도 전에 마음에 그냥 스며드는 듯했고, 깊은 감동과 신뢰와 사랑으로 마주하며 마치 목사님의 육성을 듣는 것처럼 한 땀 한 땀 책을 읽었다.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에게 소설이 왜 필요하고, 이게 어떻게 신앙을 자라게 하는지, 소설을 읽을 때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등을 말’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앞으로 교회를 지켜갈 하나님의 사람들의 내면을 든든히 세워가기 위해서’라고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저자는 왜 우리에게 소설이 필요한지,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를 얘기한다. 해서 책을 한 번 손에 들면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손에서 놓지를 못하게 만든다. 독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작가의 마음이 만져질 것 같다.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지새우는 수고와 기도를 했을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이 책의 내용 전체를 아우르는 문장이 있다면 바로 다음 문장이 아닐까. 


“처음엔 잘 감지하지 못해도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우리의 신경계는 비상 체제로 돌입하고, 인생이 주는 다양한 경험(방황과 동요, 성에 눈뜸, 죽음의 인식, 악의 경험, 자아 찾기, 모순된 세상에 대한 인식 등)을 등장인물을 통해 받아들인다. 주인공은 곤경에 빠져 고생하고 모순된 세계에 혼란도 느끼지만 결국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알게 되면서, 자신만의 느낌과 생각을 만들어내는데, 이런 간접경험이 우리를 성장시킨다.”(22쪽)


책을 읽으면서 모든 내용 하나 하나가 중요하게 다가왔다. 밑줄을 긋고 긋다 보면 빨강, 노랑, 파랑,검정 ㅋ 너무 많아 통째로 외우고 싶어진다. 그 중에서도 마음에 담긴 것들은 나만의 ‘느낌’, 문해력, 심리적 죽음, 삶의 확장과 변화,그리스도인에게 소설이 필요한 이유 등등이었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소설을 읽을 때 줄거리나 의미 찾기가 아니라 ‘나만의 느낌’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는 것이다. ‘소설 읽기’에서 늘 강조하시는 부분이다. 우리는 대부분 소설을 읽을 때, 대부분은 그 소설의 줄거리와 소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의미를 찾고 교훈을 찾는 것이 버릇되어 있다. 학교에서 공부했던 방식대로 모범답안을 찾듯이. 그런데 저자는 ‘진짜 중요한 건 느끼는 것’이라 강조한다. 소설의 주인공을 통해 나 자신의 감정까지도 알려고 해야 나만의 사유가 열린다. 나만의 사유, 나만의 느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무서운 건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고 ‘나’다운 나로 살려면 가끔이라도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걸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인생은 확연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소설은 사건이든 사람이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공감하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지를 일깨워준다. 이걸 ‘인생책’이 보여준다. ...작가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소설에서 뭘 배웠는지를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 더 나가 주인공을 보면서 자신의 감정까지도 알려고 해야 나만의 사유가 열린다. 이런 자기만의 느낌을 얻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자기 느낌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쉽게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우리는 잠시라도 멈춰 서서 느껴야 한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래야 남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90쪽)


나 역시 자주 불안했었다. 책을 읽고 나눔을 할 때, 토론 문화에도 익숙지 않았기에 처음엔 몹시 낯설고 마음이 울렁거렸다. 내가 말하는 게 맞는지 의심했고 또 자신감이 없어 불안했었다. 나의 감정을 못 믿어서 남의 시선, 남의 평가에 신경 쓰는 내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자유로워진 것 같다. 그리고 의미 찾기 보다는 느끼려고 한다. ‘느낌’이 중요하다는 것은 한 마디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소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소설이?! 누가 이런 생각을 해 봤을까. 그 누구도 지금까지 소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하고 작가가 되면 가난하게 산다고 하면서 오히려 부정적인 말을 들은 것이 더 많았고, 그런 부정적인 말들에 마음속에서 피어나던 꿈마저 찬 서리 맞은 듯 소멸되곤 하지 않던가. 그런데, 소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소설 읽는 것, 문학하는 것의 편견을 깨부수는 이 한마디의 말이 마치 뜨거운 한여름 목마른 영혼에 시원한 얼음물을 마시는 듯 시원케 했고, 그것은 ‘내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였다. 


우리는 얼마나 오래된 고정관념과 편견을 가지고 사는지…단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고 남의 생각, 남의 의견에 동조하고 사는지. 가끔 보면 기독교인들 중엔 소설을 읽는 것이 마치 신앙이 없는 사람, 영성 없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소설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신의 한수’라는 말에, 저자에 대한 내 마음이 더 활짝 열리고 무한신뢰가 싹트는 듯했다.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의 말이 이럴 때 딱 어울리는 것 같다. “배움이란 평생 알고 있었던 것을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228) 


“하나님이 이 시대에 작가를 우리 곁에 보내신 이유가 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나’가 되거나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나’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이걸 아시는 하나님은 작가를 우리 곁에 보내 인생을 후회로 채울 여지를 줄이신다.……소설은 신의 한 수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인생에 갇혀 후회스런 삶을 살지 않게 하려고 이야기를 주셨고, 소설 인물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게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신다.”(66쪽)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마음에 다가온 건 변화와 성장이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대부분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그런데 ‘심리적 죽음’을 통해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걸 일깨워준다고 한다. ‘심리적 죽음’은 일단 들어서면 되돌아갈 수 없는 다리다. 그것이 없는 인생은 한 마디로 ‘영혼이 빠져나간 인생’이다. 


소설 속에서 ‘나’를 만나는 것…!!!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232)이라고 했다. 어쩌면 우리는 평생을 살아도 진정한 자기 자신과 대면해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있고 피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의 말 대로 ‘자기다운 삶을 살려면 반드시 알을 깨고 나와야’하는데 그 과정이 바로 ‘심리적 죽음’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혼돈이 주는 심리적 죽음을 대면하면서 그 심리적 죽음을 뚫고 나가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이 혼돈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저마다 자신의 자아를 확장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소설 <주홍글자>속의 딤즈 데일 목사나 <데미안>의 싱클레어, <레미제라블>의 장발장,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 등등의 소설에서의 삶을 통해 우리는 경험하고 또 우리 삶 속에서 경험한다. 우리는 심리적 죽음이라는 혼돈을 겪으면서 바닥까지 닿거나, 벼랑 끝에 내몰렸을 때 비로소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자기 정체성을 알게 되고 변화를 겪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과 얼마나 대면하고 살까. ‘우린 언제나 살아갈 준비만 할 뿐 정작 제대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 건 아닐까.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리스본행 야간열차’중)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와닿는다. 저자는 “어떻게 살아야 인생을 잘 사는 것일까? 소설은 이 물음에 대한 작가의 답안지”라고 한다.소설은 한 인물이 살아가는 삶의 자취를 보여주면서 그가 하는 시행착오를 통해 독자의 시야를 넓혀주는데, 우리의 사고가 유연해지면 작가가 말하지 않는 것도 읽어내는 눈이 열린다.”(218쪽)는 것이다.


“소설은 이 세상 모두가 눈이 멀어도 단 한 사람만은 보기를 원한다. 한 사람이 중요한 건 사회를 바꾼 변화는 언제나 한 사람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 한 사람이 내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을 초월하면서도 자신에게 충실한 존재가 되는 경험을 하는데 그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군지를 묻게 되고 인간이 처한 삶의 처지를 세밀히 들여다보게 된다. ......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가장 깊은 감정을 맛보게 되고 그걸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이런 경험을 인식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이 만들어진다….(중략)…물론 순응하는 사람은 다르다. 자신을 세상에 맞추기에 성공을 꿈꾸게 되면 모험하지 못한다. 대개는 실패의 두려움으로 <천국의 열쇠> 속 밀리 신부처럼 많은 사람이 걸어간 길을 따라 간다. 그런데도 소수는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애쓴다 순리를 거스르는 일은 위험하고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면 포기해야 할 게 있다. 일단 성공에 대한 미련을 접어야 한다. 그래도 소수는 그 길을 걸어간다.”(244)


마지막 장을 읽다가…가슴이 먹먹해졌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의 감정을(생각)을 따라 가고 싶지만 자기 감정이 옳은 것인지 자신이 없고, 거기서 가시적인 열매가 요원해 보이고,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눈치 보면서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인생이 ‘눈에 보이는’ 뭔가를 찾고 보기 때문이다. 


<천국의 열쇠>에서 치셤 신부는 내려가는 길을, 친구 밀리는 올라가는 길을 택했고, 남들 보기엔 성공했지만 소설의 눈으로 보면 가진 게 많고 능력이 있는 게 좋지만, 그것이 ‘인생을 낭비’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충격으로 와 닿았다. 소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느낍니까”(239)  


소설이 우리가 생각해보지 않은 것을 생각하게 하듯이,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 역시 잊고 있었던 한 꿈을 다시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만나는 건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것이 변화와 성장으로 가는 단서가 되며, ‘내 자신과 하나님에 관해 묻게 된다’. 배우 김혜자씨의 백상예술대상수상 소감이 매우 인상깊었던 걸 기억한다. 여기 재인용한 글을 옮겨 적어 본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나는) 그렇게 ‘눈이 부시게’ 살아야 한다. “남들 눈에 사소하게 보여도 자기에겐 한없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가치관이 있다면 그걸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나 다운 나를 만들어주는 요소이고, 또 그게 있어야 현실적인 삶을 살되 ‘이룰 수 없는 꿈’(인간답게 살려고 애쓰는 것)을 붙들고 살 수 있다.”(240쪽)라고.


이 책은 ‘소설은 현실에 익숙해져 잘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우리를 일깨워 주인공 답게 살게’하는 것처럼, 이 책이 지금 ‘주목하는 그 ‘한 사람’은 바로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다. 그리고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이다. 나도 오르한 파묵의 고백했듯이 “어느 날 책 한 권을 읽었고 내 인생 전체가 바뀌었다”라고 고백하고 싶다. 

"소설으 이야기에는 매듭 같은 게 있어서 그것을 잡아당기면 온 우주가 열리며 아주 잠깐 놀라운 비밀을 드러낸다는 걸 작가는 안다‘ 매듭이 풀리는 건 순간이다. 0.2초나 될까 싶은 그 찰나의 순간, 어떤 느낌이나 생각이 섬광처럼 순식간에 나를 훓고 지나간다. 신기한 건 조금 전까지 ‘나라고 느꼈던 나‘가 전혀 다른 나‘가 된 듯 느껴지는데, 이게 소설을 읽을 때 자주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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