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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그림자 속에서
알비다스 슐레피카스 지음, 서진석 옮김 / 양철북 / 2023년 11월
평점 :
생소한 리투아니아 작가 알비다스 슐레피카스의 소설은 참혹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6년간 지속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을 조명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이 히틀러 사망 후 1945년 5월 7일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소설의 배경이 되는 독일의 동프로이센은 승리한 러시아군의 점령 아래서 전쟁의 남은
잔재를 겪으며 극심한 기아와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P.7
거기엔 사람 고기에 맛을 들인 늑대들이 있었어.
거기엔 사람의 시커면 턱뼈를 물고 다니는 개가 있었어.
거기엔 굶주린 눈동자들이 있었고,
거기엔 온통 굶주림, 굶주림, 굶주림, 굶주림뿐이었어.
거기엔 시체들이 있었지, 죽음과 시체들만.
거기엔 바람조차 폐허와 사막 사이에서 길을 잃은 채 방황하는,
공허하고 을씨년스러운 광야가 있었지.
전쟁은 끝났지만
프로이센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약탈당하고 포화로 주저앉아 버렸지.
'
늑대의 그림자 속에서'는 한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인공 레나테의 가족은 엄마 에바, 이모 로테, 맏오빠 헤이츠, 브리기테, 모니카, 헬무트이다.
그리고 이웃의 여인, 마르타와 그녀의 아이들 그레테와 알베르트, 오토가 있다.
그들이 사는 지역은 사람들이 전쟁과 기아에 시달리다 못해 아이들과 함께
네무나스강으로 뛰어들고, 이름 모를 사체들은 검게 썩어서 강물에 떠내려 오는 곳이었다.
어느날 밤, 레나테의 엄마인 에바와 이웃 여인 마르타는 아이들에게 먹을 음식을 찾으러 나갔다가 러시아 군인들에게 쫓기게 되고, 마르타는 집까지 따라온 군인들의 밤새 이어진, 무자비한 폭행에 의해 삶의 의지를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마르타를 의지했던 에바 역시 지쳐만 갔다.
P.58
"아니야, 에바. 내 웃음소리는.... 그놈들이 다 죽였어."
P.59
그 길에는 파시스트 짐승들의 소굴이라 불리는 독일의 동프로이센이 있다.
네무나스강을 건너면 그 반대편엔 리투아니아 그리고 소련의 광활한 땅이 펼쳐진다.
P.59
주여, 제발 그들이 집단 수용소에 가지 않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살아서 만나기를,
불타지 않고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기를 간곡히 기도하나이다.
아직은 어리지만, 배고픔에 시달리는 가족을 위해 헤이츠와 알베르트는 음식을 구하러
리투아니아로 떠나고, 이후 브리기테와 모니카 역시 동프로이센의 비참한 현실을 버티지
못하고 각자 희망을 찾아 리투아니아로 떠나게 된다.
그 사이 에바와 남은 가족들도 러시아 군인들에 의해 그나마 살고 있던 곳에서도 쫓겨나 강제 노역을 하러 집을 떠난다.
레나테 역시 가족과 떨어져 리투아니아로 가게 되고,
이후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생존을 위해 리투아니아 사람들 밑에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밥을 얻어먹거나, 자신의 신분과 이름을 속인 체 살아가게 된다.
결국 레나테 역시 독일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리투아니아의 마리톄로 이름을 바꿔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전쟁이 인간의 정신을 어떻게 파괴시키는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세 가지 존재의 거짓말'을 통해 예전에 이미 한번 느꼈었다.
그러나 이번 '늑대의 그림자 속에서'는 그와 다르게 전쟁의 피폐함은 물론, 읽는 내내 어둡고 깊은 숲속,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곳에 홀로 버려진 두려움 가득한 아이들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사방이 어둠뿐인 늑대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도 늑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보며,
참혹한 현실 앞에서도 그들이 삶에 강렬한 의지를 잃지 않기만을 바랐다.
'늑대의 그림자 속에서'는
눈 감고 귀 막고 싶은 이야기
하지만 눈을 똑바로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
참혹함을 마주해야 하고,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야기가 담겨있다.
잔혹했던 전쟁으로 영혼이 파괴되고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현재까지 이어져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가슴 아픈 상처로 되새겨진다.
‘늑대의 그림자 속에서'는 지금도 이어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하마스간의 전쟁의 참극이 어서 멈추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서글픈 현실과 동화되어 나의 마음 한구석을 한동안 계속 울릴 것 같다.
※ 양철북 출판사를 통해 제공 받은 도서입니다.
거기엔 사람 고기에 맛을 들인 늑대들이 있었어. 거기엔 사람의 시커면 턱뼈를 물고 다니는 개가 있었어. 거기엔 굶주린 눈동자들이 있었고, 거기엔 온통 굶주림, 굶주림, 굶주림, 굶주림뿐이었어. 거기엔 시체들이 있었지, 죽음과 시체들만. - P7
바람이 죽어 버린 벌레 몸뚱이 같은 눈송이를 날려 보내고 있었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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