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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돌고 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저들도 아는데 그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양 애꿎은 팔자주름만 더 깊이 패게 웃어보인 횟수에서 본성을 감추는 데 실패해 부지불식간에 표정관리 못한 횟수를 빼고 영어단어를 사정없이 버벅거린 횟수도 뺀 다음, 여기다가 저녁으로 때운 국수 한 그릇 값을 곱하면 얼추 오늘 내 일당이겠다.

약수동 국숫집에선 음악캠프를 틀어놓고 있었던 터라 면발을 끊으면서 몇 년 만에 그웬 스테파니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어느새 주먹밥 접시를 비워낼 즈음에는 존 레논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우먼은 월드의 니거다. 우먼 대신 워커라 했다면 울컥했을 것이다.

내 귀에 배철수 목소리는 밝은 저녁에 더 좋게 들리는데, 여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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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2때였나 고3때였나. 그다지 친하지 않은 친구 하나가 말했다. "야, 본 조비 진짜 좋지 않냐?"

나는 "뭐 별로."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대답하면서 표정은 '동감하지 못해'보다는 '너 좀 어이없다'에 가깝게 지었을 것이고.

그런데 나야말로 당시 얼마나 어이없는 인간이었던가. '본 조비는 무슨. 에어로스미스 정도나 되면 몰라도'라는 말을 턱밑으로 삼키며 하교했던 나는, 사실 'Bad Medicine'이었는지 'Livin' on a Prayer'였는지를 들으면서 몸을 한껏 들썩이던 인간이었다. '좋구나, 아 좋구나' 절감하면서, 방구석에서는 젖비린내 물씬한 내 자신의 이중성을 마음놓고 증명했던 것이다. 

그럼 한때는 본 조비가 좋다고 느끼질 못했느냐. 그럴 리가 있겠는가. 본 조비 음악은 원래 좋았다. 그저 본 조비는 어딘가 조심스러운 존재였을 뿐이다. 이른바 쭈구리로서의 삶을 살되 음악 얘기만은 꽤나 길게 할 수 있는 고등학생의 입을 통해 선호대상으로 밝혀지기는 어려운 존재였달까.

그 시절 그토록 코믹한 허세는 대체 어떤 과목 선생이 주입했던 것일까 하고 궁금해하지는 않겠다. 정작 교과서 지식의 주입은 거세게 거부해놓은 주제에 그런 의문을 갖는 것은 너무도 비양심적인 자세일 테니. 그러나 누구의 탓으로라도 좀 돌리고 싶을 정도로 그때의 기억은 민망하고 또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그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왜 나는 본 조비가 좋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말하자면 왜 나는 좋게 들리고 좋게 보이는 걸 좋아한다고 말 못했을까. 왜 즉각 와닿는 것들에 즉각 빠지지는 못했을까. 왜 뭔가 있어보여야 한다는 강박을 내다버리지 못했을까. 남들이 좋다는 걸 나도 더 좋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건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남들이 뭐라든 내 눈엔 너 좀 죽인다는 말을 왜 그렇게 아꼈을까.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좋아서 좋다는 말은 왜 못했을까. 대체 뭘 그렇게 살피고 눈치 보고 더 생각하려 했을까. 

뭣 때문이었든 그랬던 시절로는 다시 갈 수 있다 해도 온몸으로 극구 사양하겠다. 도무지 모양이라곤 안 살아서 도저히 못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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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정체성은 일반적으로 자기실현Self-realization에 대한 강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자기실현이란 매우 근대적인 현상 중의 하나로 만약 중세 사람에게 자기실현에 애쓰고 있느냐고 질문한다면 그는 그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실현이라는 개념은 중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낯선 생각이기 때문이다. 전근대적 세계가 불변하는 본질로 구성된 정적인 질서로 간주되는 반면, 근대적 세계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근대의 세계는 그 자체로 변화의 모든 근원을 가지고 있으며 결코 신과 같은 외부적 존재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변화하는 이 세계를 살아가는 근대인의 역할은 이미 주어진 세계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다."

-<패션:철학> 273~4페이지 중에서




패피라는 줄임말에 기겁을 하는 나라고 해서 옷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다. 비록 '힙'하고 '핫'하다는 트렌드를 알기 위해 잡지나 블로그에서 금쪽같은 팁을 구하고 그로부터 얻은 영감을 다음날 복장에 반영하는 부지런한 부류는 전혀 아니지만, 심지어 그러한 부류는 어쩐지 느끼하다고 느끼는 촌스러움까지도 장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옷차림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물론 인정한다. 내가 올해 에프더블유 시즌을 주도할 컬러 따위는 전혀 알지 못하며, 놈코어룩이란 말도 오로지 대화상대를 웃기기 위한 용도로만 써본 처지임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해보면 나는 옷을 꽤 좋아하는 것 같다. 적어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보다 잘 어울리는 옷을 입었을 때 조금 더 즐거워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옷을 좋아하는 나도 자기실현을 위한 성찰로써 입기를 실행하고 있는 날은 매우 드물다. 반드시 지드래곤 정도나 되어야 옷으로 발언을 할 수 있는 건 아닐진대, 그저 게을렀던 것이다. 이 게으름을 단박에 타파해줄 뭔가가 있으리라고 기대하며 읽은 책은 아니었지만 <패션:철학>에는 의외로 건질 만한 팁이 있었다. 즉 "패션은 의미를 가진 듯 보이는 매우 다양한 현상이지만 실제로 그 의미는 상당히 한정된 수준에서만 가능하다는" 것. 말하자면 패션과 관련된 성찰을 하지 않는 것도 자기 자각을 팽개치는 일에 가깝겠지만, 동시에 "삶의 인도자"로서의 역할 따윈 할 수 없는 패션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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