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간호사다. 그녀가 갖춘 역동적이고 조직적인 기량은 간호학의 얼굴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하지만 혼자만의 업적은 아니었다. 간호의 역사는 간호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삶을 헌신한 수많은 여성 덕분이다. - P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과학자들이 틀렸을 때 놀라서는 안 된다. 인간은 누구나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는 것보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하는 것을 훨씬 잘한다. - P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릴적 내가 접한 '청소년 추천 도서', '청소년을 위한--' 같은 꼬리표를 달고 있던 청소년 문학이, 최근 몇 년 간 영미권 "영어덜트(YA)" 장르 유입으로 한층 풍성해졌다는 기분이 든다. 영어덜트 장르 소설을 읽다 보면 사실 표면적으로는 일반 문학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 내가 생각하는 청소년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딱 2가지가 있다. 주요 인물이 청소년 혹은 어린이일 것(성인이 아닐 것). 그래서 어른은 일방적으로 발언권을 앗아가 이야기 전개에서 중요한 흐름을 만들려 들지 않고 철저히 곁다리가 될 것. 두 번째는 혼란스럽지 않고 명료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할 것.

그래서 절대 YA 소설로 이름 붙일 수 없는 작품이 뭐가 있을지 잠시 내 방 책장을 훑어 보았다. 머릿속으로는 제법 기준이 확고했는데 막상 자연계(?)에서 그 예시를 찾으려니 쉽지가 않다. 비교적 최근에 읽은 소설 중 그나마 크리스틴 맹건의 《탄제린》 정도가 떠오른다. 주인공 '루시'가 자신의 일방적인 사랑을 관철하려 또다른 주인공 '앨리스'를 가스라이팅하고 심지어는 그 작전이 성공해 앨리스를 나락으로 떨구는 이야기라서 다분히 1차원적인 교훈을 전한다고 보기엔 어렵다.

이 다소 파격적인 크리스틴 맹건의 데뷔작에 비하면, 다이애나 하먼 애셔의 첫 소설 《우리가 함께 달릴 때》는 충격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언젠가 학교 운동장에서 맡던 연노란색 흙, 햇빛이나 비 냄새를 돌이키게 하고(그런 기억이 없다면 비슷한 다른 기억이라도), 가을 운동회날 이상하게도 파랗던 하늘을 곱씹게 하는 친근함이 있다(나는 학창 시절 운동회를 세상에서 가장 싫어했다). 다만 그 방식이 전형적이지 않다.

YA 소설의 가장 큰 단점은 "만만한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이 문장을 고쳐 써서 장점으로 바꿔 보자면, 청소년 소설은 대체로 아주 보편적이고도 만연한 기억을 배경지로 삼는다. 그래서 웬만큼 나이를 먹었다면(10대 중후반을 넘겼다면) 이야기의 진입 장벽을 대체로 쉽게 넘는다. 오히려 너무 쉽다는 게 때론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 인간 심리의 미묘한 지점 아닐까.

큰 노력 없이 허들을 넘고, 책장을 넘기면, 저기 멀찍이 '조지프 프리드먼'이 숨은 그림 찾기 속 교묘하게 숨은 뒤집어진 운동화 한짝처럼 머쓱하게 독자를 맞이한다. 나는 살면서 수많은 '조지프'를 만나 왔다. 심지어는 나부터도 '조지프의 시절'을 보내 왔다. 작가 인터뷰에서 다이애나 하먼 애셔가 밝힌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에 글쓰기 모임을 함께하는 지인 중 하나가 제가 조지프와 무척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저는 ADD 성향도 없고, 7학년 남자아이도 아니고, 친구를 사귀는 데도 딱히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연 걱정이 많고 사물을 독특하게 바라보는 편이긴 해요. 작중에서 찰리의 축구화가 벌 위로 내려앉는 대목을 예로 들면, 조지프가 보인 반응이 딱 제가 보였을 법한 반응이에요. '가엾은 벌! 찌부러졌을까? 갇혔을까? 내가 살릴 수 있을까? 제발 무사하길.' 아마 저는 조지프의 성격을 통해 이런 생각을 확장해 나갔던 것 같아요."


앞서 만난 조지프처럼 머쓱하게 고백하자면, 여러 대목에서 찔끔찔끔 눈물을 짜내며 소설을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TV프로그램 〈금쪽같은 내새끼〉를 보며 방송에 출연한 아이와 어른의 치유 과정을 공감하고 함께 치유받는 기분을 느끼듯이, 《우리가 함께 달릴 때》에는 어릴적 우리가 직접 듣지 못한 격려와 응원, 공감이 있다. 심지어 따로 유효 기간도 존재하지 않아, 우리가 마음을 조금만 열고 받아들이면 지금이라도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책 속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땐 퍼뜩 〈원더〉가 떠올랐는데(영화의 원작 소설이 있는 줄은 이번에야 알았다), 영화의 전개가 대체로 '어기'의 단독 시점에 의존한다면, 《우리가 함께 달릴 때》는 아예 도입부에서부터 조지프의 친구 '헤더'의 존재가 기분 좋은 균형감을 준다. 그리고 이 균형은, 우리가 삶을 온전히 혼자 내달려 갈 수 없음을 일깨우는 소설 자체의 메시지와도 맞닿아 있다.

조지프, 헤더 외에도 주변 학교 친구들, 크로스컨트리 경기로 만나게 되는 타학교 학생들, 가족과 동네 어른들 등, 등장하는 비중이 크지 않더라도 개별 인물의 색채가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것도 작가의 힘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아, 책을 읽다가 문득 예전에 내가 반장 선거에 나갔던 일이 떠올랐다(왜 나갔는지 이유는 당시에도 몰랐고 지금도 모르겠다). 뭔가 남들처럼 감투를 써 보고 싶었던 걸까? 구체적인 이유는 몰라도, 단상에 나간 직후에 짙게 후회한 기억은 여전히 선명히 떠오른다. 그 학기에 나는 부반장이 되었다(대반전!). 다만 그 과정이 좀 창피했다. 딱히 반 아이들이 제 의지로 날 뽑아줘서 부반장이 된 게 아니라(나는 인기는 커녕 딱히 친구도 없었다) 순전히 반장 1명, 부반장은 여자 1명, 남자 1명을 뽑던 당시 체계 덕분에 부반장이 됐는데, 그때 소감을 말하라는 담임 선생님 말씀에 그냥 아무 말도 안 하면 안 되냐고 한참이나 어물거린 기억이 난다(아무도 날 뽑지 않았으니 딱히 소감이랄 것도 없지 않은가?). 별안간 얼굴 붉어지는 옛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게 한 건 바로 다음 대목이었다.


하지만 나는 번번이 헛다리를 짚었다. 헷갈리기만 했다. 공을 가로채 바스켓에 넣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고, 그 대신 아무에게도 주목받고 싶지 않은 마음과 두 번 다시 공에 손을 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딱 한 번 부반장을 해 본 경험 덕분에, 이후 중학생이 되어 뭣모르고 3년쯤 서기도 해 보았고 선생님들과도 아주 살짝 친해지고 결론적으로는 괜찮은 방향으로 풀렸다(창피하든 말든 아무렇게나라도 그냥 하는 게 최고인가 봐, 조지프!). 나 역시도 창피한 감정을 피하고 싶어서(=걱정하느라 바빠서) 차마 도전하지 못 하고 뒤로 한 일들이 많았는데 《우리가 함께 달릴 때》는 이런 미묘한 심리를 조지프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섬세하게 풀어 준다.

이쯤해서 내가 한밤중 베갯잇을 적시며 읽은 구절을 잠시 소개한 후 리뷰를 마쳐 볼까 한다.


"이거 반칙 아니에요?"

"어째서?"

"아무도 안 쓰잖아요."

"그야 아무도 필요하지 않으니까. 필요하다면 다들 쓸 거야."


"누가 뭐래도 넌 슈퍼히어로야."

벗어나려 했으나 할아버지는 나를 더 꼭 붙들었다.

"들어 봐. 왜 너에게 귀마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그야 무서우니까―"

"아니야! 그건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듣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끼기 때문이라고. 나는 너의 그런 점이 좋아. 그게 네가 지닌 초능력이야. 내가 괜히 그렇게 부르겠냐?"


리뷰의 제목은, 최근 애나 아카나의 에세이 《슬프니까 멋지게, 애나 언니로부터》 마케팅의 일환으로 작업한 유튜브 영상 중 하나에서 애나 아카나가 소개한 브레네 브라운의 책 《The Power of Vulnerability》 제목에서 가져와 봤다. 순간의 당혹감과 창피함을 이겨내면 우리 안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듣고, 보고, 느낄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연약해질 수 있는 "용기"가 자라남을, 이 책 《우리가 함께 달릴 때》는 아주 잘 보여 준다. 올해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조카들이 아주 조금만 더 자라면 선물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계속 전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 P149

다음 번에도 생각지 못한 무언가가 나올 것이다. 그다음 번에도, 그다음다음 번에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은 성공의 경험"의 중요성은 이제 자기개발 분야의 흔한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한 권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내하며 자분자분히 읽어내려가는 일은, 이 행위의 앞머리에 강조점을 찍는다면야 그저 흔한 "작은" 성공의 경험 중 하나로 치부되겠지만, 행위의 뒷꼬리 마침표에 부러 힘을 주어 마치 방점이라도 찍듯 꾹 눌러 매듭 짓고 나면, 이는 비교가 필요 없는 유일하고도 온전한 성공으로 남는다. 내게도 이런 경험이 몇 번 있었다. 〈닥터후〉 전시즌을 완주한 일(이후 새 시즌이 2개는 더 나왔지만)이나, 이론물리학자 리사 랜들의 《숨겨진 우주》를 완독한 일, 그리고 바로 이 책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중세편》 1권 완독을 세 번째 성공으로 꼽고 싶다.

이렇게 두꺼운 책을 두고 사람들이 '벽돌책'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솔직히 이번에야 알았는데, 이 리뷰를 쓰기 직전 잠시 뒹굴거리며 보던 유튜브 영상에서 마침 '김겨울' 님이 이 '벽돌책'에 관한 인용을 읽어 주셔서,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시리즈와도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아 소개해 본다.



벽돌책은 언제나 나의 로망이다.

벽돌책을 읽는 데에는 유난히 긴 경청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께는 그 자체로 주장이며 난이도는 그 자체로 방어다.

대개 하드 커버로 감싸진 두꺼운 책의 내부로 들어가려면

독자와 저자 모두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 방어선을 뚫어야 한다.

뚫고 들어갔다면 긴 미로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책의 말들》, 김겨울


어릴 적 만화책에서 아리아드네가 미궁의 입구에 붉은 실을 묶어 두고 조금씩 풀어가며 결국 테세우스를 찾아 함께 미로를 빠져 나오는 데 성공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 책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중세편》이라는 이름의 미로 속에서 중도 포기해 입구로 돌아오지 않고, 또 길을 잃지도 않고 무사히 출구로 나오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우선, 거창한 마음을 버려야 한다. 두꺼운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그냥 바로 눈앞의 문장과 페이지, 챕터에만 집중해 본다. 물론 이게 마음만으로 쉬이 되는 일은 아닌데, 나는 주로 낯선 이름이나 개념 등이 우다다 나올 때면 무조건 노트에 끄적거리며 책과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방법을 택한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필기에 신경쓰기보다는 이를 철저히 보조 수단으로, 예전 라디오 안테나의 주파수를 맞추듯 조심조심 내 머릿속을 책 내용과 연결짓는 데에만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여간해서는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으면 잠시 다른 일을 하며 다음 시도를 노려보는 게 효율적이다.

두 번째로, "심리적 방어선"을 뚫는 데 성공했다면 우선 충분히 기뻐하며 내 자신을 칭찬한다. 그런 다음, 마음의 문이 살포시 열린 독자들에게 이 책이 마련한 붉은 실을 마음의 손 끝으로 가볍게 쥐면 된다.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중세편》은 각 장마다 장의 제목과 함께 연도 및 해당 역사를 짧게 요약해주는 글이 상단에 배치된다. 해당 장의 내용을 다 읽고 났을 때 이전 페이지의 요약 문장이 나타내는 의미가 한결 머릿속으로 잘 들어온다면 질 좋은 독서를 하고 있는 중인 셈이니 안심해도 좋다.

로마 제국, 진 제국, 인도, 고구려-백제-신라의 한반도 삼국시대, 페르시아 등으로 시작되는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중세편》은 최대한 전세계를 두루 아우르려는 저자의 노력이 돋보인다. 미국인 저자다보니 아무래도 서양 역사의 큰 뿌리가 되는 그리스-로마 역사 비중이 가장 크지만, 전체적인 역사의 얼개를 맞추는 데는 소재의 빈틈이 없어 보인다(설령 빈틈이 있다고 해도 개인적으로 알아챌 만큼 역사를 잘 알지 못하기는 하지만). 또,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직전 장 혹은 관련 장에서 다룬 다른 나라의 연대를 시간순으로 함께 제공해주어, 그동안 주로 분리된 과목으로 배워온 국사와 동양 및 서양의 역사를 하나의 연대기에 두고 찬찬히 싱크를 맞춰보는 재미 역시 톡톡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를 왜 알아야 할까? 아니, 왜 역사책을 읽어야 할까? 이 부분에 관해서는 이런 생각을 한번 해보게 되었다. 나는 어릴적부터 꽤 오래 컴퓨터를 배워왔는데(일단 요즘 세대에게는 '컴퓨터를 배운다'는 행위부터도 좀 어색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고릿적 도스 운영체제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처음에는 컴퓨터에 구현된 기능이 거의 없었다. 지금은 다수의 트랜잭션을 '터치'로 구현하지만, 마우스 입력으로 컴퓨터를 구동하던 시기가 있었는가 하면, 그전에는 온전히 키보드 명령만으로 컴퓨터를 작동시키던 때도 있었다. 더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구멍을 뚫어 0/1을 구분해 데이터를 처리하던 천공카드 시스템도 존재했다(이게 무슨 소리인지 궁금하다면 영화 〈히든피겨스〉를 추천한다).

일명 '컴퓨터'로 대표되는 컴퓨팅 하드웨어/소프트웨어 기술은 빠른 발전을 거듭해 지금에 이르렀고, 어쩌면 앞으로 이러한 발전의 속도는 더욱 가파라질지도 모른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그저 이 기술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기술의 발전은 전부 이 기기에 내장되고, 전제되므로 이걸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면야 이 보이지 않는 기술의 뒷면을 일부러 의식적으로 알 필요도 없다. 인간의 역사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 자체가 인간이고, 내 안에 역사라는 이름의 소프트웨어가 온전히 내장되어 있는데, 굳이 인간과 문명의 역사를 더 알 필요가 있을까?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해본 이 물음의 답을 먼저 내놓자면 이렇다. "이렇게 영원히 살 거라면 (혹은 살 수 있다면) 알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어디론가 나아가고 싶다면 (혹은 현재 시스템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면) 반드시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당장에 실용적이지도, 이렇다 할 쓸모도 없어보이는 역사에서 답을 구하고 싶은 순간 역시 이따금 우리를 찾아온다. 우리는 어째서 현재 이러한 삶을 살고 있을까? 내 인생은 왜 이러지? 코로나19는 언제 끝날까? 같은, 잘 포장하자면야 제법 철학적이긴 해도 누구에게서도 속시원한 답을 얻어내기 어려운 자못 아리송한 질문이 뾰족한 빙산의 일각처럼 대뜸 내 안에 자리하게 될 때,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중세편》같은 책들은 수면 아래 잠긴 빙산의 커다란 저변처럼, 인류의 일장풍파를 가득 품은 채 가만히 때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에게 시의적절한 해답과 통찰을 전한다. 현대 인간 특유의, 과거 사실(혹은 사실로서 기록된 것)과 거리두기 하며 서술하는 저자의 쿨한 문체도 읽는 재미를 더하며, 번역/편집에도 아주 꼼꼼한 장인의 솜씨가 느껴진다.

찬드라굽타 1세는 마가다에서 시작해 옛날 코솔라와 밧사의 영토에 이르는

전 지역을 정복하고 갠지스강을 심장부로 하는 소규모 제국을 이룩해 냈다.

그러고는 그것이 꽤나 뿌듯했던지 스스로에게 '마하라자드히라자'

즉 "뭇 왕들의 대왕(현실이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의 표현이었다)

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중세편》 1권 중


보다 근원적이고도 실용적인 독서 목적을 하나 제시해보자면, 몇 년 전 한겨레센터에서 〈스타일 레슨: 명확하고 아름다운 영어 글쓰기〉의 원서를 교재로 진행하는 수사학적 글쓰기 수업을 한차례 들은 일이 있는데, 이 수업의 가장 첫 시간도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중세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로마의 역사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영어나 한국어 글쓰기 외에도 보다 풍부한 레퍼런스를 소화하고 싶은 출판/영상 번역자(혹은 지망생)들에게 읽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런 '벽돌책' 한 권 읽은 경험이 어쩌면 작금의 코로나 시대, 우리 삶에 독특한 무늬의 나이테를 새겨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현실도 훗날 언젠가는 역사가 되어 까마득한 후대의 누군가에게 읽힐 것이다. 이러한 과정 그 자체가 지난하게 쌓여 인류의 역사가 되었음을 이 책을 통해 새삼 되새겨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